책일기

가라타리 고진, 세계사의 구조, 도서출판b

pourm 2013. 4. 2. 18:31

 

1.

고진(行人)을 언제 처음 읽었던가.

아마도 <탐구1>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 비트겐슈타인과 바흐친이 괴델과 엮여 있었고, 마침 무한론과 러셀의 역설, 괴델의 정리에 뭔가 언어학의 본질적 요소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엄청난 흥분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거꾸로 올라가 <일본근대문학의기원>을 읽었던가. 내적 고백으로서의 언문일치라는 개념에 매료되었고, 근대언어학이 전제하는 언어 관념의 핵심적인 요소를 거기서 엿보았다. 그 뒤로도 <은유로서의 건축>을 비롯한 문자, 언어, 언어학에 대한 그의 글은 언제나 내게 계발적이었다. 물론 그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늘 힘든 일이었지만.

올 초 <세계사의 구조>를 한 보름간 매일 아침마나 읽었다. 어느 때 못지 않은 흥분 속에서.

물론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눈에 띄게 힘이 빠졌고, 칸트의 세계공화국 운운하는 부분에서는 급기야 허망해졌지만, 초반에 제시한 증여에 대한 분석만큼은 여전히 나를 흥분시킨다.

 

 

2.

소규모 밴드 사회에서는 계속 이동하면서 수렵 채집했기 때문에 축적이 불가능했고, 또 필요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수렵 채집한 것을 공동기탁하여 서로 공유했다.

그러나 정주 사회로 진입하면서 축적이 가능해졌고 이로 인한 계급 발생과 분쟁이 불가피해진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해준 것이 바로 호수적 증여이다. 이때 증여는 가진 자에게 하나의 의무이다. 그리고 받는 쪽에서 역시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와, 또 언젠가 이에 대한 것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 의무를 진다. 증여에 의해서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일정한 위계가 형성된다.

또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서 보면 이 증여와 답례는 일종의 자연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이 된다. 증여와 답례를 통해서 공동체 간의 유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홉스식의 사회계약은 초월적 존재(리바이어던)이 필요하지만, 호수적 증여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치 않다. 그리고 이 증여와 답례는 꼭 대칭적일 필요가 없다. A는 B에게 B는 C에게, C는 다시 D에게 그러다가 A 역시 누군가로부터 증여를 받는 순환적 체계가 증여 경제의 기본 속성이다.

씨족사회에서 일반적인 주술 역시 증여-답례로 설명한다. 밴드사회에서는 죽은 자를 묻고 떠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정주사회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를 극복해야 한다. 제사가 바로 귀신에 대한 증여 의식. 그리고 귀신은 그 답례로 산자들을 돌본다는 것.

 

3.

이러한 증여에 대한 분석은 물론 ‘교환양식을 통해 본 세계사의 구조’라는 맥락에서 유의미한 것이다.

사적 유물론에서 맑스주의자들은 생산양식에만 주목했다. 국가는 상부구조이므로 이를 필요로 하는 생산양식만 교체하면 국가는 소멸한다고 본 것. 그러나 고진이 봤을 때 국가는 특정한 교환양식과 결부된 것으로 단순한 이데올로기나 상부구조가 아니다. 국가 자체가 특정한 교환양식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

증여-답례가 씨족사회를 특징짓는 교환양식이었다면, 국가의 주된 교환양식은 착취와 보호이다. 물론 여기서의 착취란 징세를 의미한다. 국가는 이 세금에 대한 보답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을 다른 국가로부터 또 공동체 내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한다. 따라서 국가의 본질을 폭력의 독점이라고 본 베버의 견해는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사실 씨족사회에서는 피의 복수가 불가피하다. 공동체 사이의 초월적 규범, 즉 법이 없기 때문에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이 끊기지 않는다. 이 복수 역시 증여와 답례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한데, 이러한 순환을 끊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국가이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요한 교환의 양식은 물론 등가교환이다. 이 등가 교환은 폴라니의 지적처럼 사실 근대 이전에는 한 번도 주요한 교환양식으로 기능했던 적이 없다. 시장을 전제로 하는 이 교환양식은 노동력, 화폐, 자연을 등가교환의 체계로 편입시킴으로써 완성된다. 보이지 않은 손으로 대표되는 자율적 매카니즘을 내세우지만, 주기적 공황에서 국가는 불쑥불쑥 등장하고, 계급적 불평등성은 네이션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의해 상상적으로(만) 해소된다. 자본=국가=네이션은 이처럼 서로 밀접하게 엮여 있는 하나의 매듭이다.

 

 

4.

근대적 언어 관념은 명백히 등가교환이라는 모델에 기초해 있다.

발화자가 발신하는 언어표현에 내재되어 있는 가치(의미)를 그대로 수신자가 해독해 낸다. 발신자와 수신자는 동일한 가치체계를 공유하고 있으며 원칙적으로 평등하다. 등가교환의 거래 당사자가 그렇듯이.

그러나 이 모델을 가지고는 발화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행위(사과, 약속, 명령, 협박, 사기...)와 의식, 의례(주례사, 개회선언, 선고...) 등을 설명할 수 없고, 정보의 교환이라는 맥락에서는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우애와 연대의 표현을 설명해 낼 수 없다. 언어로 벌어지는 갈등이나 긴장 역시 등가 교환에 기초한 정보 전달 모델로는 설명할 수 없다.

증여와 답례라는 호혜적 교환양식를 모델로 설정하면 이런 언어적 행위가 상당부분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증여-답례는 당사자들에게 교환 행위라기보다는 일종의 의례와 의식으로 인식된다. 이를 예의나 예절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복수나 저주의 의식, 또는 죽은 자에 대한 의례도 마찬가지이다. 언어 행위 역시 상황과 조건에 맞아야 적절한 것으로 판명되는 의례이자 의식의 성격이 강하다. 더구나 등가교환모델은 자본주의 및 국가, 네이션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반면에 증여-답례의 모델은 그렇지가 않다. 민족국가의 형성과 궤를 같이 하는 근대적 언어 인식을 넘어서는 제3의 모델을 증여-답례의 호혜성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고진이 증여로부터 자본=국가=네이션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듯이.

 

 

5.

탐구1에서 고진은 바흐친에 의지하여 모노로그와 다이알로그를 구별했다.

둘이 이야기하더라도 같은 가치체계 속에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독백일 뿐이라고. 서로 다른 가치체계를 가진 자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진정한 대화이라고. 도스토프예스키의 소설에서 그 실례를 발견한 바흐친은 이를 다성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 역시 등가교환이라는 모델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증여와 답례로 연대하고 때로 갈등하는 당사자들은 서로 다른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다만 씨족사회의 공동체적 구속에서 자유로운, 그리하여 도시와 시장이 전제하는 평등한 개인 사이의 증여와 답례란 어떤 것인지 아직까지는 지극히 불투명하다. 새로운 교환양식 D를 교환양식 A(증여-답례)의 고차원적 회복이라고 한 고진의 선언적인 설명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B: 착취-보호, C: 등가교환) 읽는 자의 몫을 남겨주었다고 할까.

여느 때와 달리 그는 이제 매우 피곤해 보인다.

 

2013.4.2. 昌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