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로서의 언어 (2)
1930년대는 조선의 말과 글에 대한 담론이 신문과 잡지에서 넘쳐나던 시기였다. 조선어 사전을 만들자는 의지가 충만했고,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표기의 통일과 표준어의 선별 움직임을 둘러싸고 성명서와 지상 논쟁이 범람했던 때이다. 말과 글에 대한 논의가 지식 사회를 압도했고 논쟁의 와중에 누구든 어느 편엔가 가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물론 가장 극렬히 대립했고 결과적으로 각자의 진영을 일정하게 확보한 이들은 이극노 등이 주축이 된 조선어학회와 박승빈을 중심으로 한 조선어학연구회일 것이다. 이 논전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을 경성제대 조선어학과 관련 인사들 역시 당시 주요한 조선어 관련 전문가 집단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이희승은 경성제대 관련 인사 가운데 예외적이라 할 만큼 조선어학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에서 예외적인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홍기문이다. 그는 물론 언어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정규 교육 자체를 받은 적이 없다. 비정규 교육 기관이기는 하지만 주시경의 제자들이 조선어강습원 등에서 일정한 훈련을 받았던 것과도 구별된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조선의 지식계에 그의 이름을 알린 글은 「조선문전요령(朝鮮文典要領)」(『현대평론』1-5호, 1927.1.-6.)이라는 문법 관련 저술이고, 조선일보사에서 신문 기자로 일하며 꾸준히 언어와 문자에 관한 각종 연재 기사를 작성하던 시기는 앞서 언급한 1930년대이다. 훈민정음에 관한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저서라 할 수 있는 『정음발달사』(1946)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초이다. 그러나 조선어에 대한 논쟁이 지식인 사회를 달구고 있던 1930년대 그는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이는 사회주의자 홍기문이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던 당시의 조선어 운동에 일정한 거리를 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는 1927년 ‘가갸날’(한글날)에 대한 글에서 이 날을 문맹퇴치의 의미로는 기념할 만하나, ‘조선혼, 조선정신’ 운운하기 위한 것이라면 ‘반대, 배척’에서 더 나아가 그 ‘기념을 박멸하고 싶다’고까지 할 정도로 민족주의적 조선어 운동에 거리를 두었다.(「문맹퇴치의 의미로 기념하자」,『조선일보』, 1927.10.25.)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홍기문이 처음으로 발표한 글은 재일(在日) 사회주의자들이 내던 『대중신문』 창간호(1927년 6월)에 실린 「무산계급의 예술관」인 것으로 보인다.(강영주 2004) 동경에 머무르던 시절 사회주의 운동 단체인 일월회에 가입하기도 했던 그는 귀국 직후인 1926년 12월에는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맹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無産階級 藝術同盟 임시총회에서 위원을 개선」,『중외일보』 1926.12.26.) 저간의 사정을 보면 그가 사회주의 성향을 가졌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이런 사회주의적 성향이 조선어학 관련 저술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카프의 맹원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 1926년 12월이고 현대평론에 <조선문전요령>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1927년 1월이므로 시차가 거의 없는 셈인데, 일종의 상세한 품사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문전요령」에서 우리는 사회주의자 홍기문의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다.
같은 시기에 그는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염상섭의 논리를 부르주아 문화를 지지 옹호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염상섭군의 반동적 사상을 반박함」, 『조선지광』, 1927.2.) 계급문학이 민족 전통의 파괴를 가져 온다는 염상섭의 입장이 무산 계급의 문예 운동을 주장하는 홍기문에게 용납될 수 없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역사학에서 관해서도 홍기문은 철저한 계급론적 시각으로 일관했다.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우’요(신채호는 홍기문의 부친 홍명희보다도 8살이나 연상이다) 자신의 ‘가장 경모하는 선배’라는 신채호의 사관 역시 홍기문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조선역사학의 선구자인 신단제 학설의 비판」, 『조선일보』, 1936.2.29.~3.6.) 그는 신채호가 ‘역사의 원동력이 생산력에 놓여 있다는 것도 이해치 못하였고, 또 유사 후의 역사가 계급 대립의 역사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였다’면서 ‘연개소문 개인의 인물됨을 논하는 데 몇 백 언을 허비할망정 삼국시대의 경제생활 내지 계급 관계 같은 데로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며 일갈한다. 역사학에 관한 일반론을 전개한 글에서도 그는 역사학의 방법론으로 ‘정신사관과 유물사관의 두 큰 유파’가 있음을 밝히고 ‘적어도 역사학을 통해 객관적 합법칙성을 천명하려고 한다면 정신사관을 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역사학의 연구」, 『조선일보』, 1935.3.21-4.5.)
이와 같이 홍기문은 역사와 문학에 관한 글에서 시종 계급적 시각과 유물론적 세계관, 당파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어학에 관한 글에서만큼은 그러한 사회주의자 홍기문의 모습이 전연 보이지 않는다. 「조선문전요령」같은 문법 관계 저술에서는 물론이고 당시 한창 논쟁 중에 있었던 맞춤법에 관한 입장을 표명하는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양진영 모두를 싸잡아 비난하고는 있어도 염상섭이나 신채호를 비판할 때 들이대던 당파성이나 계급론이 등장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예컨대 「조선어 연구의 본령」(『조선일보』1934.10.5-20.)에서 그는 ‘도데이즘으로부터 조선어를 해방시키라’며 당시의 조선어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어 연구에서 마땅히 취하여야 할 바 태도’를 세 가지로 꼽는다. 첫째는 ‘조선어가 2천만 조선인 남녀노소의 공유라는 것을 알 것’, 둘째는 ‘오늘날 조선인이 사용하는 조선어를 현재의 참된 조선어로 알 것’, 셋째는 ‘언어학의 영역과 각 부분의 호상 관계 및 언어학상 기초 지식을 알아야 할 것.’
홍기문이 주문한 ‘조선어 연구에서 마땅히 취하여야 할 바 태도’에서 ‘2천만 조선인 남녀노소’는 고려의 대상이 되어도 이른바 ‘무산자 계급’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더욱이 제대로 된 조선어 연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것으로 지적한 언어학의 각 영역과 언어학상 기초 지식이라는 것은 그가 바로 「조선어 연구의 본령」 초반부에 언급한 독일과 러시아의 ‘신흥 자본가 계급’이 했다는 ‘과학적’ 언어 연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자 홍기문의 계급론이 이와 같이 언어학 앞에만 서면 가뭇없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홍기문 역시 근본적으로는 야콥슨의 의사소통 모델과 같은 것을 통해서 언어를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의사소통 모델에서 화자와 청자가 속한 계급이나 그들의 계급적 차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제되)는 ‘코드’이다. ‘남녀노소의 2천만 조선인의 공유’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언어학의 영역과 기초 지식이라는 것은 (계급과 관계없이) 언어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그 ‘코드’를 적절히 구획하고 체계화할 수 있는 방법론적 틀로, 이것들은 역사학과 문학에 홍기문이 들이대던 계급론적 시각으로 굳이 이야기하자면 몰계급적인 ‘부르주아 언어학’의 소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도관 은유이든, 야콥슨식의 의사소통 모델이든, 언어에 대한 근대적인 인식은 대체로 이와 같은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 은유 혹은 프레임은 사회주의자의 계급론을 무력화할 만큼 강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