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중얼거리기

별로 다르다? 별로 다양하다!

pourm 2017. 1. 12. 13:42

별로 다르다? 별로 다양하다!

 

 

 

우리 지내 늦은 거 아닙니까?”

평양에서 공동회의를 할 때의 일입니다. 7~8개조로 나누어 남북 각 측이 집필해 온 원고를 하나하나 합의해 나가다 보면 서로 견해가 달라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얼굴이 붉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쉬는 시간을 갖는 것이 상책입니다. 잠시 쉬었다 하자는 저의 제안에 북측 참가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쑥 내뱉은 말이 바로 위의 말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고 돌아온 대답 역시 알쏭달쏭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허 참, 지내 늦다니까요.”

<지내>라는 말에 대해 조선말대사전에서는 너무 지나치게라고 뜻풀이하고 있고,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너무>의 비규범어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쪽 참가자는 제게 시간도 없는데 왜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느냐는 불만을 표현한 것이고 또 좀 속도를 내보자는 요청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내>라는 말을 못 알아들으니 그 불만과 요청은 제대로 전달되기가 어려웠던 것이지요. 이렇게 의사소통에는 사물을 지시하는 어휘들, 그러니까 명사 못지않게 화자의 생각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부사가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예문에서도 <인차>라는 말을 모르면 문장 자체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머니, 안심하세요. {인차} 오겠어요.”조옥희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인차><이내>와 같은말로 보았으니, “바로”, “지체하지 않고 곧정도의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문장은 어디를 가긴 가는데 오래 머물지 않고 곧바로 올테니 걱정하시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짜장>이라는 말 역시 이런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물론 이 말을 <짜장면><짜장>으로 많이 쓰지만, 북에서는 과연 정말로라는 의미로 씁니다. 이 말은 사실 북쪽말은 아닙니다. 우리 남측 사전에서도 부사 <짜장>이 올라 있고 또 말뭉치에서도 용례가 제법 발견됩니다. 그러나 역시 압도적으로 많이 쓰는 것은 <짜장면><짜장>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북에서는 <짜장면><짜장>은 거의 없고 과연 정말로의 부사 쓰임이 대부분입니다.

 

“{짜장} 나에게는 그 어디에도 마음을 지탱할곳이 없었다.”철산봉

“{짜장} 사슴같이 껑충 달려들어 란야는 나의 목을 얼싸안았다.”이효석: 성화

 

앞의 <지내><인차>는 북에서만 인정하는 말이고 부사 <짜장>은 남북 공히 사전에 올랐지만 북쪽에서 주로 쓰는 부사입니다. 이와는 또 다른 부류가 바로 <별로>입니다. 물론 <별로>는 남과 북이 모두 많이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쓰임이 좀 다릅니다. 우리는 오늘 벌이가 좋았니?” “아니, 별로야.”와 같이 <별로>그다지 대단치 않게정도의 뜻으로 쓰이지만, 북에서는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유난히, 상당히와 같은 정반대의 의미로도 쓸 수 있습니다.

 

민수는 {별로} 방안이 어수선해진것을 보고 놀랐다. 책상우에 간종그려놓은 종이들이 널려있고 연필통에 꽂아놓은 원주필과 연필이 종이우에서 나뒹굴고있었다.”(대양만리)

 

위의 문장을 대할 때 당황스러워지는 것은 우리에게 낯선 <원주필>(볼펜)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별로>의 다른 쓰임 때문일 것입니다. ‘별로 어수선하다? 그다지 대단치 않게 어수선하다?’ 그러나 맥락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문장에서 별로 어수선하다평소와 달리 대단히 어수선하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별로><특별하다>, <유별나다>()’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북쪽의 쓰임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별로 >“~지 않다는 부정 표현하고만 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말이 그다지 대단치 않다는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지요.

위에서 본 <지내, 인차, 짜장, 별로> 등은 물론 사회의 체제나 이념 등과는 무관한 말들입니다. 아마 분단이 되지 않았다면 이 어휘들이나 그 쓰임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의 출신 지역 말이 아니더라도 여러 매체를 통해 다른 지역의 말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역어들은 우리말을 더욱 풍성하고 다채롭게 해줍니다. 남과 북의 말을 통일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느 한쪽의 말로 단일화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지내>, <이내><인차> 같은 말이 모두 공존하며 다양한 뉘앙스로 제 나름의 빛깔을 뽐낼 수 있는, 그래서 더 풍요로운 언어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글은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의 웹진 <남녘말 북녘말>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