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 헤게모니 · 권력』서평 (2)
언어적 근대의 극복을 위하여
– 가스야 게스케의 『언어 · 헤게모니 · 권력』(고영진 · 형진의 옮김, 소명출판, 2016) 서평 (2)
2. 근대의 새로운 권력 양식과 언어의 문제 - 언어와 헤게모니
2.1.
가스야 게스케의 『언어 · 헤게모니 · 권력』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세 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가 근대 사회의 언어 문제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총론적인 성격의 글들이다.
언어에 대한 인위적 개임을 거부하는 근대 언어학의 ‘언어적 자유방임주의’가 실은 근대국가의 ‘국어’ 형성에 일정한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있다거나(「언어인식과 언어정책 – 자연주의와 자유주의의 함정」), 다이글로시아 상황과의 대비를 통해 ‘국어’ 발생론을 매우 요령 있게 정리하고 개별주의적이면서도 보편주의적인 방향을 취하는 근대 특유의 언어관이 ‘국어’ 사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주장(「‘국어’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발생적 고찰), 그리고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하나하나의 언어가 전체론적 성격을 갖는 통일체’라는 생각이 사실은 근대 주권국가의 모델에서 기원한 ‘특정 언어는 고유한 영토에 토착하는 것’이라는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설명(「전체론적 언어상고귀한 속어에서 근대국민어로」) 등은 우리가 근대 사회의 언어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데 매우 계발적인 관점을 제공해 준다.
1부의 이러한 글들이 그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던 중요한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으나, 그러나 이 책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는 그러한 총론적이고 개괄적 관점을 뒷받침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의 구체적인 분석에 있다고 하겠다.
8편으로 구성된 이 책의 2부는 대체로 유럽 특히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상황을 중심으로 언어에 대한 근대의 특수한 관점이나 습속이 형성되고 정착되는 과정을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분석하고 있는데,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그 내용 자체가 국내에서는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거니와 분석의 방향이나 시각의 신선함은 국내외를 막론하고도 단연 독보적인 것이라고 감히 단언하고 싶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다루고 있는 2부의 1장 「언어와 헤게모니」이다. 사실 이 한 편의 글은 이 책의 전체에서 매우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부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의 총론이라 할 내용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조망하고 있다면, 2부는 이에 대한 각론 격의 글들로서 역사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2부의 앞머리에 위치한 이 「언어와 헤게모니」는 물론 근대 사회의 언어 문제에 관한 일반론을 전개하는 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이나 이탈리아 통일운동, 즉 리소르지멘토 과정에서 소수언어나 방언을 배제하고 단일한 ‘국어’를 형성해 나가는 언어 정책이나 그 속에서 제출된 주장이나 입장을 다루는 글도, 또 그와 밀접하게 연관된 이론이나 현상을 다루고 있는 글도 아니다.
그러나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은 그것이 명시적으로 언급되든 그렇지 않든 그러한 역사적 과정을 분석하는 데 있어 이 책의 저자가 늘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언어와 헤게모니」는 이후에 이어지는 2부의 다른 글을 읽는데 있어 하나의 지침과도 같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국어’를 중심에 놓고 근대 사회의 언어 문제를 총론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1부에 비해서는 각론이라 하겠지만, 그 1부를 뒷받침 하는 2부의 다른 글들에 대해서는 일반론이 된다는 것이고, 이는 다시 말해 2부의 첫머리를 장식한 「언어와 헤게모니」가 결국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축이자 이 책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열쇠라는 뜻이 된다.
그러한 사실은 헤게모니를 직접 다룬 것은 2부 1장뿐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서명이 ‘언어 · 헤게모니 · 권력’이라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2.2
사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그의 언어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지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국내에 소개된 그람시의 전기에서도 토리노 대학 재학시절 그의 전공이 ‘근대언어학’이었으며 재학 당시 청년문법학파에 비판적이었던 신언어학파의 마테오 바르톨리 교수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던 학생이라는 사실이 소개되어 있다.
또 가스야가 이 책에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시피 프랑코 로 피파로는 이미 『그람시에게 있어서의 언어, 지식인, 헤게모니』에서 “언어에 대한 이론적 관심은 그람시의 사상 형성을 그 출발점에서부터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일 뿐만 아니라, 그람시 사상의 핵을 이루는 헤게모니 개념 역시 “언어 개신의 전파 양상을, 바르톨리의 언어학의 도움을 빌려서 이론적으로 고찰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61쪽)
뿐만 아니라 그람시는 씌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언어활동에 내재하는 규범문법과 씌어진 규범문법을 구별하였는데, 전자는 시민사회의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헤게모니에 대응한다면 후자는 “현실의 혼질적인 언어 상태에서, 균질적 전체를 추출하여 도달해야 할 문화의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정치사회의 인위적 강제에 기초하는 ‘디타투라(dittatura)’에 대응한다는 것이다.(67쪽)
또 그람시가 이탈리아의 언어 통일에 대한 문제에서 각 지방의 방언을 피렌체어로 ‘치환’해야 한다고 보았던 만조니에 맞서, ‘국어’는 문화 활동에 의해 고양되는 ‘창조적 동의’에 의해서만 창출되며 법률적 명령에 의한 언어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본 아스콜리를 계승하고 있다는 게 가스야가 요약한 로 피파로의 그람시 이해다.(72쪽)
문법의 문제를, 그리고 이탈리아의 언어 통일 문제를 그람시가 이와 같이 그의 핵심 개념인 헤게모니 이론과 깊숙이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실은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2.3.
그러나 가스야는 이러한 로 피파로의 그람시 이해에, 그리고 언어 이론과 헤게모니 이론을 연결 짓는 방식에 대단히 큰 의문을 제기한다.
즉, 로 피파로가 시민사회와 정치사회, 동의와 강제를 이분법적으로 구별하고 이런 이분법에 의해 헤게모니를 설명하고 있으나, 다시 말해 시민사회의 동의를 얻으면 헤게모니를 획득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정치적 법률적 강제에 의한 것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가스야는 헤게모니가 이런 이분법(시민사회 대 정치사회, 동의 대 강제)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러한 이분법 자체가 헤게모니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헤게모니 개념이 가리키고자 하는 것이 “중심을 가지지 않는 비균질적인 장에서의 역학 관계의 분자적 변동과 그 침투 과정”(78쪽)이라면 로 피파로가 전제하는 이분법은 애당초 성립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결정적으로 로 피파로의 이러한 설명은 헤게모니 장치를 근대적인 권력 양식이라고 본 그람시의 입장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로 피파로는 그람시의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헤게모니라는 개념이 그의 대학 은사인 바르톨리 교수의 이론, 즉 언어의 개신과 전파가 한 언어의 사용자들이 다른 언어의 문화적 권위를 수용한 결과라는 주장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권위’와 ‘동의’라는 것은 헤게모니의 효과로서 사후적으로 승인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헤게모니의 성립 근거로서 ‘권위’와 ‘동의’를 상정한다는 것은 결과를 원인으로 오인한 것이라는 가스야의 지적은 이미 위에서도 밝힌 바이거니와 가스야가 더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관점이 헤게모니 개념의 특수한 역사성을 은폐한다는 사실이다.
그람시는 헤게모니 장치를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되어 처음으로 등장한 권력 양식”으로 파악하고 있는데(79쪽) 로 피파로에 의해 헤개모니 개념의 기원으로 파악된, 문화적 권의의 수용에 의한 언어의 개신과 전파는 전혀 근대 사회에 특수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 국가에서 경쟁적으로 ‘국어’를 창출해나가는 과정을 헤게모니 개념을 통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그 개념의 특수한 역사성을 온전히 복원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가스야의 주장이다.
부르주아지가 법 개념에 도입한, 따라서 또한 국가의 기능에 도입한 혁명은, 특히 순응시키고자 하는 의지(따라서 법과 국가의 윤리성)에 있다. 이전의 지배계급들은 … 자기계급의 영역을 ‘기술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확대시키고자 하지 않았다는 뜻에서 근본적으로 보수적이었다. 그들의 개념은 폐쇄적인 신분의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유기체, 전 사회를 흡수할 능력이 있는 유기체, 전 사회를 자기 자신의 문화적 ․ 경제적 수준으로 동화시킬 수 있는 유기체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모든 국가 기능이 변화하였는데, 국가는 이제 ‘교육자’가 되었다. (안토니오 그람시, 『그람시의 옥중수고1』, 308.쪽)
이전의 지배계급들이 폐쇄된 카스트를 만드는 데 만족했다면,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의 전 역역을 자신의 문화적 경제적 수준으로 ‘동화’시키려 하기 때문에 이전 시대와 구별되는 근대 국가의 특성은 (강압이 아니라) 교육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에는 “사회 공간 전체가,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교육 장치가 되고, ‘규율의 학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자발적 동의란 것은 그 교묘한 교육적 전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79쪽)
헤게모니 장치가 작동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넓은 의미의 ‘교육’의 과정에서이고 이를 통해 “시민사회는 ‘제재’나 강제적인 ‘의무’ 없이 작동하지만, 집단적인 압력을 행사하며, 관습이나 사고와 행동의 방식, 도덕 들의 진화라는 형태로 객관적인 결과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거듭 반복해서 강조하거니와 이전 사회와는 다른 근대 사회의 특수한 권력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그람시가 씌어지기 이전의 자발적 규범문법의 존재를 지적한 것은 이것이 단지 시민사회의 자발적 동의를 획득한 헤게모니에 대응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근대 국가에서는 언어의 통일이 통치의 가능성을 가져다주는 헤게모니 장치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 된다.(82쪽)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근대 사회 이전에는 모든 국민이 동일한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기이한 것이었고, 방언에서 ‘국어’로의 치환은 따라서 근대 시기 이전부터 있던 언어의 개신, 전파와는 전혀 다른 현상이다.
그것은 근대 사회의 특수한 권력 양식인 헤게모니 장치가 작동되는 회로를 따라갈 때만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될 터이지만, 동의에 의한 것이냐 강제에 의한 것이냐를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로 피파로의 관점을 따를 경우에는 프랑스 혁명 기간 그레구아르 같은 인물에 의해 추진된 언어 정책은 인위적 강제나 억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민 사회의 동의에 기반한 ‘민주주의적’이고 ‘문화주의적’이었다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발적 동의에 의한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가 아니라 그 자발적 동의를 얻어나가는 논리와 메커니즘이 무엇이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가스야가 그레구아르의 언어 정책을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일반문법을 지목하고, 그 일반문법의 정치학을 집요할 정도로 강조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2.4
반혁명의 위험을 미연에 제거한다는 목적에서 발레르가 공화국에서 사용되는 프랑스어 이외의 언어, 즉 브르타뉴어, 바스크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의 근절을 위해 법적이고 정치적인 강제를 사용하려 했던 것에 비하면 그레구아르는 확실히 달랐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강제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레구아르와 같은 이들이 혁명으로 인해 출현한 새로운 공간의 특성을 간파해 냈다는 데 있다. 그레구아르는 “강제, 억압, 금지로 설명되는 권력과는 별종의 권력이 작동하는 장”이자, “개인의 자발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것을 개발=이용함으로서 작동”하는 공간(177쪽)인 시민 사회의 중요성을 감지했고 언어의 통일 역시 이 시민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의 하나로 보았다.
즉 근대적 합리성으로 혁신한 새로운 언어는 (혁명의 제일 과제인 동시에 법적 강제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새로운 습속의 형성, 그리고 그것을 통한 근대적 시민의 창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이거니와, 새롭게 혁신된 언어를 시민사회의 각 영역에서 통일적으로 사용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새로운 습속의 형성과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레구아르가 언어 통일을 생활공간의 획일화와 같은 레벨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인데, 그의 이와 같은 사상을 지탱하는 것은 사회 조정의 학문으로서 성립한 ‘이데올로지=관념학’이었다.(234쪽) 새로운 시민의 형성을 목표로 한 관념학파의 교육 프로그램에서 일반문법이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은 앞서 언급한 대로이다.
그렇다면 시민 사회에서 작동하는 근대 특유의 권력 양식으로서의 헤게모니 장치와 언어 통일의 논리적인 연결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마 일반문법일 것이다. 일반문법에 의한 언어 통일은 시민사회의 요소요소에서 작동하는 헤게모니 장치를 전제하는 것이라면, 헤게모니 장치는 일반문법이 목표로 했던 것과 같은 언어의 혁신과 통일에 의해 창출된 근대적인 시민 사회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각주는 편의상 생략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