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언어 · 헤게모니 · 권력』서평 (4)

pourm 2018. 1. 8. 17:42

언어적 근대의 극복을 위하여

– 가스야 게스케의 언어 · 헤게모니 · 권력(고영진 · 형진의 옮김소명출판, 2016) 서평 (4)


4. 언어적 근대의 극복을 위하여

4.1.

애석하게도 필자는 가스야 게스케의 언어 헤게모니 권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문제를 제기할 만한 능력이 없다. 애초부터 그보다는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15편의 논문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 대부분이 국내에서는 잘 소개되지 않은 주제와 시각들이라 가급적 저자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핵심을 추려내려고 노력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지극히 회의적이지만, 재독 삼독 그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문제의식이 우리 학계에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애초의 판단만큼은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공간과 언어의 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스야의 고뇌에 찬 서술은 언어=영토=공동체에 기반한 언어에 대한 자연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입장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필시 두 종류의 선과 면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면을 구획하는 질서의 선과 다방면으로 산란하여 서로 착종하는 선. 전자의 선은 출발점으로 회귀함으로써 일정한 동질적 영역을 획정한다. 거기에는 공백은 있을 수 없으며, 외부로 통하는 지하도도 없다. 모든 선이 그어지기 전에 그에 앞서서 존재하는 좌표 공간으로의 면이 있다. 그런데 후자에서는, 면은 선의 집합이고, 하나의 선이 그어질 때마다 면은 변화를 입는다. 그 면은 결코 동질적인 원리가 관철되고 있지는 않다. 선의 밀도와 방향에 따라서, 면은 희박한 부분과 농밀한 부분을 가지고, 여기저기에는 이질적인 공백마저도 존재한다. 그것은 동질적 좌표 공간이 아니라, 휘어지고 뒤틀린 비뚤어진 공간이다.

말은 결코 면을 획정하지 않는, 산란하는 선이다. 말은 결코 영토를 가지지 않는다. (266)

 

말에는 언제나 사회정치적인 문제가 개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상태를 매우 예외적이고 불순한 것으로 치부하는 이른바 자연주의, 자유주의적 입장이 실은 말을 면에 안에 가두고 특정 영토에 붙잡아 매고 있는 언어=영토=공동체라는 이데올로기와 공모 관계에 있음을 가스야는 이 책의 곳곳에서 고발하고 있다.

말은 결코 영토를 가지지 않으며 면을 획정하지 않는다는 가스야의 주장은, 그렇다면 그런 것이 아니라면 과연 말은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근대에 성립된 언어에 대한 이러한 관념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다. 사실 근대를 공부하는 이유 역시, 목적론적인 사고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면, 근대의 극복을 모색하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가스야는 다른 언어나 변종과의 영역 분담을 불허하고 따라서 소수 언어, 방언의 멸절을 가져오는 “‘국어체제로부터의 탈각을 원한다면, 복수의 언어들 사이에서의 기능 분담을 인정하면서도, 언어 간의 계층제를 끊임없이 붕괴시켜 간다는 대단히 어려운 실천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37)

그러나 이 책을 통틀어 근대의 극복, 혹은 근대 이후의 언어 인식과 관련해서 직접 참고할 만한 부분은 이 정도뿐인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국어의 지배에 대항해 온 말이, 자립화하자마자, 스스로를 국어의 논리에 따라서 규범화해 간다는 순환의 문제를 제기기하고 이러한 순환을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는 국어이후의 언어 인식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물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 물음에 대한 답, 국어이후의 언어 인식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닫고 침묵한다.(42)

 

4.2.

그에게 근대적 언어 인식을 극복할 수 있는 미래상을 그려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데리다의 말을 빌려 미래의 민주주의가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오직 부정적(否定的) 형식을 통해서만 제시되어야 한다고까지 하였기 때문이다.(284이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그리고 프랑스 사회의 극우화 과정에서 하버마스와 크리스테바가 자연적 네이션 개념에 맞서 계몽주의에 입각한 네이션 개념을 천명하였으나 결국 공히 타자의 목소리가 억압될 수 있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며 내린 결론이다

따라서 국어이후의 언어 인식은 국어의 논리가 갖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는 식의 부정적 형태로만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스야의 신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몇몇 구절을 열쇳말 삼아 국어이후의 언어 인식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더듬어 보는 것마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복수 언어의 기능 분담같은 것은, 비록 그 구체적 실현 형태에 대해서는 침묵하였지만, 그가 비교적 분명한 목소리로 언급한 극복 방안으로서 충분히 숙고할 만한 개념이다. 중세적 다이글로시아를 넘어서는 길이 반드시 국어와 같은 체제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의 여러 방언들 사이에서 이탈리아 국민어를 창출하려는 과정에서 대립했던 만조니와 아스콜리에 관한 대목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25) 각 방언들을 피렌체어로 치환하려 했던 만조니를 비판하며 아스콜리가 제시했던 것이 방언들 사이에서의 일종의 기능 분담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복수 언어의 기능 분담이라는 문제 말고도 우리가 주목해야 부분은 만조니와 아스콜리의 대립에 관한 글을 가스야가 근대 산문의 문체라는 일견 전혀 다른 문제로 매듭짓고 있다는 점이다. 가스야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필자가 보기에 아스콜리가 아니라 만조니와 같은 시각이 결국은 근대의 대세가 된 것도 이 근대적 산문 문체의 특수한 성격과 관련이 있다.

 

가스야가 보기에 근대의 산문은 언어적 작위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는 무표적인 언어를 이상적인 것으로 삼는다. 그것은 화자도, 청자도, 콘텍스트도, 그리고 발화 장면에도 의존하지 않는 무규정적인 언어 양식을 뜻하며 따라서 모든 사물에 중립적인 기술이 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그런 언어이다.(204-206그리고 그때 언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족적인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언어학 역시 이와 같이 레토릭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는 영도(零度, zero degree)의 문체를 표준으로 삼고 있으나 특정 문체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레토릭이 배제된 무표적인 것이므로 그것이 하나의 문체라는 것 자체도 깨닫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조니가 약혼자를 쓰는 과정에서 이러한 문체를 형성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사실이 웅변하듯이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산문 문체는 결코 자연적인것이 아니다. 그리고 언어의 기능 분담이라는 면에서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던 만조니와 아스콜리였지만 문어의 문체에 있어서만큼은 의견이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국어이후의 언어 인식을 구상하는 데에는 이러한 근대적 산문 문체의 이데올로기 역시 문제시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직접적으로 문체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개념을 통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을 재해석하는 부분(31언어와 권력)에서도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전통 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에로의 이행에 수반되는 아비투스의 변용은 언어 자본, 나아가서 문화 자본의 원리가 구비전승 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이행하는 것과 병행하고 있다”(294-295)는 것이 가스야의 생각인데, ‘실천의 감각에 충실한 구술문화에 비해 문자문화는 표상의 논리에 압도된다결국 문자문화는 콘덱스트에 의존하지 않고 객관적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세련된 코드’, “모든 상황을 초월한 정통 언어라는 관념을 낳게 된다. 화자에도, 청자에도, 콘텍스트에도 의존하지 않는 문체란 결국 그런 것들로 인한 변이를 완전히 지워버린 문장을 의미한다그리고 신체적 감각이 일소되고 표상의 논리가 전일하게 지배하는 문체란 낭송과 같은 것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구술성이 완전히 배제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만약 근대적 산문 문체의 이후를 논한다면 아마도 여기에서 단초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4.3.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개념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제3부에서는 국어형성의 구체적 과정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러한 근대적 언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 주요 개념들을 재검토하고 있는데(예컨대 3장에서는 언어 기호의 자의성이 의미하는 바를 소쉬르 대 방브니스트라는 익숙한 구도가 아니라 계몽주의 언어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재조명한다) 2장에서는 언어학에서든 상식적 차원에서든 별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언어공동체개념을 문제로 삼고 있다. 다각도의 검토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언어공동체하나의 단일한 언어라는 가상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무엇을 해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이것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의 언어적 상호 작용에 기반해야 한다고 제언하는데, 이때의 언어공동체란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거시적인 수준에 있는 것일 수 없으며, 언어만이 아니라 사회문화 혹은 정치적 차원 같은 외적 요소가 고려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한 개인이 동시에 복수의 언어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그 소속을 변경하는 것 역시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316)

그러나 사실 가스야가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문제를 삼고자 하는 것은 언어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라는 개념 자체이며 이것을 논할 때마다 끊임없이 언어가 호출되는 상황이다. 예컨대 퇴니스의 유명한 개념인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의 문제에서 전자는 후자와 달리 자연적인 것에 기반하며 또 개인의 행위나 의지에 앞서 존재하고 그 개인을 절대적으로 구속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게마인샤프트와 가장 친연성을 갖고 있는 것은 언어공동체일 것이다. 그러한 점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 모어라는 표현일 텐데, 실제로 가스야는 모어 파시즘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피히테까지 소급되는 독일적 전통을 찬찬히 더듬는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논의에 언어가 불려나오는 것은 모어로 상징되는 정서적 일체감의 맥락에서만은 아니다. 소장문법학파를 비롯한 역사언어학자들이 인간이 함부로 언어를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과학적인 모델을 설정했던 데 비해, 소쉬르는 인간이 언어를 좌지우지 할 수 없는 것은 언어가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때의 사회적이라는 것은 분명히 개인의 행위나 의지를 뛰어넘어 그것을 구속한다는 뒤르케임의 사회적 사실’(fait social)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게마인샤프트나 모어 파시즘과는 어찌 보면 정반대의 차원이기는 하지만 소쉬르와 뒤르케임 식의 사회라고 해서 언어가 호출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스야는 게마인샤프트와 같은 정서적 공동체에서의 언어 문제를 우려했지만, 홉스나 로크로 대변되는 계약에 근거한 사회의 언어 인식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일까?

 

4.4.

가령 무언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가 있는 화자는 사회적으로 미리 합의된 코드에 맞추어 메시지를 완성하고(encoding) 그것을 전달받은 청자는 앞서의 그 코드에 맞추어 화자가 발신한 메시지를 해독한다(decoding). ‘코드를 특정한 표현(기표)에 어떠한 가치(기의)를 부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체계라고 할 때, 의사소통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화자와 청자가 그리고 사회가 공유하는 이 코드다.

그런데 이 코드란 것은 원칙적으로 개별 화자나 청자, 구체적 맥락 등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근대 산문 문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구체적 장면과 무관하게 중립적으로 존재하는 언어가 실재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언어학이 관심을 기울이는 거의 유일한 것 역시 이 코드에 관한 사항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문제로 삼고 싶은 부분은 이러한 의사소통 모델에서 등가교환이라는, 근대 사회에 와서 일반화된 교환양식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의 당사자나 그 발화 상황, 맥락에 앞서 기호의 가치’(의미)를 결정하는 코드가 사전에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있다는 가정은, 등가교환에서 교환 대상(상품)가치’(가격)가 교환의 당사자나 그 상황, 절차 등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장에 의해 결정된다는 전제와 매우 유사한 면이 있다.

의사소통이든 등가교환이든 그것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기호나 교환 대상의 가치를 결정하는 특수한 장치인데, 그것은 어느 누구의 인위적 개입도 없이 사회를 통해 자연스럽게결정된다(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사회자연이 아니라 인위와 대립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는 것이다.

 

18세기 이후 사회에 대한 인식의 문제에서 시장과 같이 그 고유한 법칙과 역학을 갖는 경제적 영역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많은 이들에 의해 지적되어 온 바이다. 그리고 이때의 사회는 개인들이 자신의 본성에 충실할 때, 즉 다른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합리적으로 해나갈 때 자동적으로 조절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유방임주의 경제관에 입각하여 사회를 이해하는 관점을 비판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등가교환이라는 교환양식의 문제에 천착하여 사회의 구성 원리를 새롭게 모색하려 한 것은 역시 증여론으로 대표되는 마르셀 모스와 그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칼 폴라니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 증여와 답례라는 상호 의무에 기반하는 교환양식은 언어의 문제에 있어서도 큰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화자와 청자가 공유하는 코드에 의해 기호의 가치가 결정되는 의사소통 모델에서는 등가교환에서와 같이 해당 행위의 당사자와 상황이 완전히 주변화된다.

그러나 증여-답례의 교환양식에서는 사전에 공유해야 하는 코드 같은 것이 없어도 교환이 얼마든지 가능할 뿐만 아니라(오히려 교환을 통해 비로소 상대방의 코드를 확인하게 된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떠한 절차와 방법으로전달하느냐 하는 것 모두가 교환의 의미를 결정하는 데 관여한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이 증여-답례의 모델에서는 교환 행위를 통해 당사자들 간에 (상호 의무감에 기인하는) 일정한 관계가 생성되고 유지,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등가교환에서는 물론 원칙적으로 교환이 일회적인 것이어서 교환에 관여하는 사람들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 자체가 부차적이고 예외적인 일이다.

그러나 증여와 답례로 이루어지는 교환은 교환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애나 연대감 같은 것이 생겨나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정하게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거나 기왕의 관계가 안정적으로 관리되며 때로는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기도 하는데, 심지어 교환 자체보다 이러한 관계의 형성이나 유지가 교환 행위의 목적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등가교환에서는 물론 무엇인가가 교환되면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것 자체를 설명할 길이 없다.

 

 

4.5.

앞서 우리는 특정한 코드에 기대어 정보를 전달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의 의사소통 모델이 소쉬르나 뒤르케임 식의 사회를 가정한다고 했다. 물론 등가교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모델에서도 말을 주고받으면서 대화 참여자들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형성되거나, 기왕의 관계를 적절하게 유지 관리하기 위해서 (정보 소통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무의미한) 말들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어렵다. 말을 한다는 행위를 단지 정보 전달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말을 주고받으면서 대화 참여자들 사이의 관계가 형성/유지/변화된다는 것이 의사소통의 본질인지는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입장은 사회를 필수적으로 가정해야만 성립하는 관점이지만 정작 그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서는, ‘언어공동체와 시장에 대한 설명이 그렇듯이 인위적 개입없이 자연스럽게형성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실질적 설명도 제공하기 어렵다는 점만큼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또한 이 사회란 것이 등가교환에서는 시장을 매개로 해서, 그리고 의사소통 모델에서는 언어공동체을 매개로 해서 대개 근대의 민족국가에 귀착된다는 공통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증여와 답례의 교환양식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사회를 가정할 필요 자체가 없을뿐더러 반대로 이에 천착하면 실제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공동체/사회의 실상을 생생히 포착해낼 가능성이 있다. 증여와 답례를 통해 생성, 유지되는 행위자들 간의 일정한 관계가 공동체나 사회의 성립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언어공동체개념에 문제를 지적하며 제안했던 가스야의 대안(실제의 언어적 상호작용에 기반한 공동체)과도 부합하는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민주주의는 부정적 형태로만 그려져야 한다고 본 가스야의 입장에 선다면, 공동체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에 그친 그의 글에서 너무 멀리까지 온 것 같다. 그러나 근대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사회를 재검토하는 작업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덧붙여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회계약론이나 자유방임주의의 사회가 반드시 인간의 본질에서부터 출발하는 데 비해(리바이어던과 같은 괴물이 없으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게 되는, 또는 최대한 이기적이면서도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인간) 증여-답례의 교환에서는 인간에 대한 어떠한 규정이나 선이해도 불필요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증여-답례의 모델에 기대어 사회와 언어의 문제를 재검토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을 위한 자리를 전혀 가지지 않는 새로운 에피스테메를 구상하여 근대를 극복하고자 했던, 그리하여 촘스키와 같이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을 밝혀내려는 근대 특유의 편집증에 대하여 철학적 비웃음으로 일관했던 푸코의 입장과도 부합하는 면이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