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통신

원주통신: 제2신

pourm 2020. 7. 17. 16:58

민주제와 열린사회의 적들을 다시 생각한다

1.
작년 11월 정태춘의 <날자, 오리배> 원주 공연이 있었다. 여름쯤 그 소식을 들었던 것 같은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티켓 구입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10월부터는 공연을 관람할 수 없는 어떤 불가피한 일을 만들고만 싶어졌다. 다행히도(?) 어머니가 잡은 김장 날이 공교롭게도 바로 공연이 있었던 날이었고, 그날 우리 가족은 충주에서 저녁까지 먹고 밤늦게 원주로 돌아왔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공연장에서는 정태춘의 노래를 들은 적이 없었다. 아마 처음은 93년 가을 경희대 농민대회였고, 마지막은 2002년 대선 분위기가 한창 달아오르던 가을께 연대 노천에서였던 것 같다. 정태춘의 노래를 객석에 앉아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그 공연 며칠 후에 난 원주 기독병원에 7일간 입원을 해야 했다.

알고 보니, 오랜 동안 정태춘은 원주의 부론에 주말이면 내려와 지냈다고 한다. 그런 원주에서의 생활을 바로 작년에 정리했다고 하니, 역시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지만, 왠지 엇갈리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나와 그 사이에. 더군다나 작년 참으로 오랜만에 낸 앨범에는 그가 연남동 근처를 거닐며 만든 노래가 있다. 얼마 전까지 내가 살던 그곳을 그는 지금 아침저녁으로 산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왜 나는 그의 원주 공연을 극구 피했을까. 언젠가는 짤막한 정태춘론을 쓰겠다는 다짐은 점점 자신이 없어지지만, 2019년의 앨범에서 다시 88년의 <무진 새노래>, 그러니까 <아 대한민국>과, <92년 종로 장마>의 전혀 새로운 정태춘을 불러낸 그 전주곡 같은 것을 새 앨범에서도 발견했다며 흥분한 게 지난해 봄이 아니던가.


 바람아 너는 어딨니 / 내 연을 날려줘 / 저 들가에  저 들가에 눈 내리기 전에 / 그 외딴 집 굴뚝 위로 / 흰 연기 오르니 / 바람아 내 연을 날려줘 / 그 아이네 집 하늘로

 바람아 너는 어딨니 / 내 연을 날려줘 / 저 먼 산에 저 먼산에 달 떠오르기 전에 / 아이는 자전거 타고 / 산 쪽으로 가는데 / 바람아 내 연을 날려줘 / 저 어스름 동산으로 (정태춘, <들 가운데서> 중)

 
물론 새 앨범은 다시 2집, 3집, 5집으로 되돌아간 것이긴 하지만, 90년대와 2000년대를 겪은 그의 음악은 그저 과거의 음악으로 되돌아갈 수만은 없다. 어린 시절, <북한강에서>를 엘피로 사서 전축에다 얹어 놓고 목소리 높여 따라 부르던 때는 알 수 없었던 <들 가운데서>가 이제사 내 귀에 들어오는 것처럼.
"바람아 너는 어딨니 내 연을 날려줘."


 2.
올 4월 15일. 웨딩홀 마당에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줄을 서서 투표 순서를 기다리면서도 나는 내내 어떻게 투표를 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집에서부터 이미 원내의 이른바 진보정당은 나의 선택지 밖에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조국 사태'에서의 실망감이 컸기 때문.

결국 기표소에 들어갈 때까지도 두 당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김종철과 홍세화를 떠올리고는 어렵사리 한 곳에 투표할 수 있었다. 나중에 결과를 보니, 두 당의 득표율은 0.12%와 0.21%.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가 전 국민의 0.33%, 무려 10만에 육박한는 사실에 아주 잠시 뿌듯했고 곧 씁쓸했다.

지난 해 가을 민정수석이었던 조국이 죽창가 등을 언급하며 반일의 선봉에 섰을 때만 해도 그저 총선을 친일 반일의 프레임으로 치른다더니 과연 그렇군, 하고 그냥 넘겼다. 그런데 여기에 세련된 논객들이 하나둘 조국을 응원하고 나설 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급기야 그 조국이 법무부 장관에 지명되어 벌어진 혼란 속에서, 그 역시 기득권에 안착한 입바른 386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에 서글펐고, 내가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이들이 온갖 논리로 조국을 옹호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최서원과 박근혜에게 했던 대로 똑같은 '짓'을 하던 윤석열과 손석희가 공적이 되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가 없었고,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오히려 내가 최서원과 박근혜에 대해 판단했던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재판도 하기 전에 탄핵당했다는 저 태극기 부대의 억울함에 대해서도.

 그리하여 민주제를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민회에서의 활동을 거부한, 소크라테스를 다시 생각했다. 당대의 귀족파와 민주파의 갈등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싸움이었고, 의회와 재판정에서의 논리 싸움과 '민주적' 투표는 삶과 죽음을 갈랐다. 지금의 진영 논리는 인류사의 찬란한 자랑인 저 그리스 민주주의가 원조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 귀족파와 민주파의 갈등 사이에서 소크라테스 역시 죽임을 당했다. 그는 물론 귀족파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민주파도 아니었다. 당시 그리스의 대외 관계에서 귀족파는 오히려 스파르타와의 협상을 원하는 쪽이었고, 호전적인 것은 민주파였다. 소크라테스의 사형 역시 민주파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나는 호전적 민주파를 오늘 이 땅에서 다시 본다.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그들 앞에서 그저 입을 다물 뿐이다. 말 그대로 대화가 불가능하다.  의회에서의 공적 활동은 그리스인에게 특권이자 의무였지만, 소크라테스는 의회에서의 활동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가 공적 활동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연설의 방식으로 데마고그들이 장악한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변증술이라는 전혀 다른 대화의 방식으로 공적 활동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설과 민주주의가 장악한 의회가 아니라 변증술/대화가 가능한 광장에서였다. 소크라테스의 고민을 오늘 다시 되살리고자 하는 이유이다.

 3.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상대에게 길게 말하지 말고 짧은 대화로 논의를 진행하자는 제안을 반복한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플라톤이 장광설을 늘어놓는 경우가 후기 텍스트로 갈수록 많아지지만,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서로 주고받는 대화로 구성된다. 결론이 난 건지 아닌지도 애매한 마무리 역시 많다.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단 하나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전제가 실은 그리 튼튼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 특정한 목표를 향해 상대를 설득해 나가거나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게 하려는 의도는 애초부터 소크라테스에게 없었다. 당신이 그토록 신념해 마지않는 것이 사실은 헛된 망상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으라. 상대와의 대화는 비로소 그때 가능해질 터.

플라톤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소피스트와 수사학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적대감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의회의 연설을 통한 '민주적' 방식으로 스승 소크라테스는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다수에 의해 지배되는 민주주의도, 다수에 의한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장치인 의회와 재판정에서의 연설, 그리고 그 연설 방법을 가르치는 교과(수사학)와 선생(소피스트)이 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의 스승은 바로 소피스트라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가.

선생을 소피스트라는 누명에서 구출하고 소피스트를 거짓을 파는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일이 사실은 하나의 과제였던 것이다. 그는 소피스트와 철학자를 대비한다. 그리고 감각적인 적인 것과 진리, 이데아를 대비한다. 이 이분법이 물론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이분법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닐까?

 가라타니 고진은 소크라테스가 비록 무의식적인 형태이긴 했지만, 이오니아의 이소노미아를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실현해 보고자 했다고 해석한다. 즉 공과 사,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이분법에 기초한 아테네의 민주정이 다수에 의한 지배라면, 자연철학을 가능하게 했던 이오니아의 이소노미아는 그러한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 무지배의 상태였다는 것.

플라톤이 민주정/수사학을 거부하고 철인왕에 의해 통치되는 정치를 꿈꾸며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다면, 정작 소크라테스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민주정/수사학을 전복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진영 논리에 짓눌린 한국의 '민주주의'에 회의하며 오늘 소크라테스를 생각한다.

 4.
아뿔싸! 기표소에 들어선 나는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당 투표에만 골몰해 왔었지, 지역구 후보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 생경한 이름들이 나열된 투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기표를 포기하고 투표용지를 그냥 반으로 접었다. 투표용지 맨 윗줄에는 왕년에 어떤 분의 오른팔이었다든가 왼팔이었다든가 하는 이의 이름이 있었건만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일지 않았다, 당선만 되면 단숨에 대권후보의 반열에 오르리라던 그는 영 무소식이다.

원주에 민주당 계열의 국회의원이 처음 나온 것은 아마도 이창복 전국연합 의장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지금은 무려 갑, 을 두개의 선거구이고 두 곳 모두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시장 역시 민주당 출신. 원주는 이제 지학순, 장일순 시절의 야성을 회복한 것인가? 그러나 혁신도시와 기업도시, 그리고 남원주역 개발과 부동산 시세의 상관관계를 들뜬 마음으로 따져 보는 원주는 작은 서울일 뿐이고 아직 '환멸의 90년대'에 머물러 있다.

다음 정거장은 어디오 / 이 버스는 지금 어디로 가오 / 저 무너지는 교각들 하나 둘 건너 / 천박한 한 시대를 지나간다 / 명랑한 노랫소리 귀에 아직 가물거리오 / 컬러 신문지들이 눈에 아직 어른거리오 / 국산 자동차들이 앞 뒤로 꼬리를 물고 / 아, 노쇠한 한강을 건너간다 / 휘청거리는 사람들 가득 태우고 / 이 고단한 세기를 지나간다 (정태춘, <건너간다> 중)


 5.
누군가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문체/글쓰기와 함께 온다고 했다. 새로운 문체는 새로운 수사학이 그 배경이 될 터. 칼 포퍼는 플라톤을 열린사회의 적이라고 몰아 부치며 그가 표음문자로 인해 비롯된 탈부족사회에 극구 저항한 이라고 했다. 그러나 패권주의와 식민주의에 기반한 그리스의 민주정 역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 아니다. 어쩌면 그 민주정은 이미 여기에 충분히 실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예와 식민지의 피눈물 없이는 유지될 수 없었던 민주주의.

 플라톤의 <국가>는 민주적으로 소크라테스를 살해한 그리스의 정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게 나라인가?’ 라고. 그러나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철인왕'이라는 아이디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위당, 민주집중제, 수령의 개념과 유사하다. 칼 포퍼가 현대사회의 열린사회의 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을 지목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플라톤의 대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아닐까. ‘도대체 이게 제대로 된 나라인가?’

 소피스트와 그들의 수사학/연설과는 다른 길을 찾고자 했던 플라톤의 문제의식은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플라톤보다는 소피스트에 더 가까웠다. 그는 희극의 풍자 대상이 될 정도로 당대에 유명 인사였고 대중들은 그를 소피스트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물론 소피스트들과는 사뭇 달랐다. 소피스트는 의회에서 대중을 선동/설득할 연설 기법을 가르쳤으나, 그는 의회에서의 활동 자체를 거부했다.

플라톤이 보여주지 않은 소크라테스에게 새로운 시대에 대한 힌트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힌트는 새로운 수사학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