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읽기

탈진

pourm 2011. 5. 24. 17:59

1.

딱 일 년 간격으로 같은 병원 같은 침상에 누워서 수액을 맞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작년도 그랬고, 올해도 그랬고 봄을 맞아 바야흐로 따뜻한 기운을 자곡차곡 그러모아야 하는 시기, 나는 용을 쓰고 기운을 소진했던 모양이다. 물론 작년은 식중독, 올해는 감기몸살이었지만 고열로 맥없이 나가 떨어진 것은 매한가지였다.

2.

월요일 아침부터 동내 내과 침대에 누워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수액을 속절 없이 쳐다보다가, 띁금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역시 여자는 강한 종속이구나.' 작년 2월부터 시작한 고향집 공사는 뜻밖에도 송사에 걸려 면사무소와 시청을 쫓아다니는 등 이만저만 속을 썩은 게 아니다. 게다가 서울집 수리도 간단치가 않았던 데다, 막판 결혼 준비로 거의 녹다운이 다 되었던 것 같다. 결국 신혼여행 1주일 후. 식중독으로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3.

작년 7월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고 올 2월까지는 예상보다 편안한 일상이었다. 10월에는 여행도 다녀오고, 연애 때만큼은 아니어도, 동네에서 맛집 기행을 일삼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가 임신중독 판정을 받아 세브란스 응급실로 들어가고, 급기야 안아 보지도 못한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의지해야 한다는 말에 아찔했다. 퇴원한 후에도 아내의 혈압은 190을 오르내렸고,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아이는 MRI 검사를 위해 금식과 마취를 견뎌내야 했다. 아이는 밤마다 잠을 자지 못하고 한두 시간씩 찢어지는 울음으로 제 어미를 힘들게 했다. 물론 내가 한 일은 거의 없다, 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논문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3월 이후로는 거의 개점 휴업상태.

4.

작년, 올해. 탈진 상태에 처할 만큼 힘겨웠던 이들은 어머니와 아내였다. 그러나 버스 정류장 앞 동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수액을 지루하게 바라보다가 작년에는 아내 역시 내 침대 옆에 누워 수액을 맞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래, 그땐 아내도 아직은 어머니가 아니었지. 어미로서 자식에게 자신을 내어준 것은 아니었지. (물론 그때도 나는 이틀이나 병원 신세를 졌지만, 아내는 하루 만에 거뜬했다.)

5.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루했던 수액도 다 떨어지고,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나의 부실함과 대책없음에 마음이 갑갑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나의 아내와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을까.
또 어머니와 아버지께 죄스럽지 않을까.
여름 날씨라는데도 마음은 서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