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설문해자(說文解字)』로 본 ‘言語’

pourm 2011. 3. 28. 10:43

1.
정조는 즉위하던 해인 1776년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규장각을 설치하고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을 등용했다. 이들은 모두 서얼 출신이면서 소품문(小品文)에 능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소품이 문체반정의 대상으로 지목당할 정도로 정조가 비판적으로 보았던 문장 양식이었다는 사실이다.


문장이라면 당송팔대가의 것과 같은 고문(古文)만을 생각하던 당시에 청나라로부터 들어온 이 소품은 상당히 새로운 것이었고 그만큼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을 터이다. 근래 여러 평자에 의해 이 소품이 새롭게 주목받은 바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중세적 사유의 뇌관을 터트릴 만한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다”거나 “상투성의 더께가 내려앉은 고문의 틀에서 벗어나 눈부신 생의 경계를 포착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즉 근대적 글쓰기의 면모가 보인다는 것인데, 소품이란 양식이 우리가 다루는 ‘근대’와 어느 정도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인지를 여기서 다룰 여유는 없거니와 앞서 언급한 이덕무의 소품 작품 가운데 ‘언어(言語)’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으니 그 말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한다.

2.
値會心時 逢會心友生 作會心言語 讀會心詩文 此至樂而何其稀也 一生凡幾許番 『蟬橘堂濃笑』
마음에 맞는 시절에 마음 맞는 벗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하며 마음에 맞는 시문을 읽으면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즐거움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찌 이다지도 그런 기회가 오기 드물단 말인가? 일생에 무릇 몇 번일 것이다. 『선귤당농소』

‘마음에 맞는 때에 마음에 맞는 친구와 만나 마음에 맞는 이야기를 하며 마음에 맞는 시문을 읽고 싶다’는 것인데, 이때 원문에 ‘言語’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 ‘언어’를 정민(2000)은 ‘말’이라 번역했는데, ‘이야기’라 해도 의미상의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言語’를 그냥 ‘언어’로 번역할 수는 없다. 이 구절의 서술어인 ‘作’을 염두에 둔다면 더더구나 그렇다. ‘언어를 지어낸다’는 표현은 최소한 현재의 감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덕무의 이 소품에 보이는 ‘言語’는 분명 현재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이자 개념어인 ‘언어’와는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일단 이것이 단어인지도 불분명하고, 더구나 그것이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의미연관과 경험연관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단어로 유입”된 개념어(코젤렉1979/1998: 135)인지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코젤렉이 개념사 연구가 전근대의 언어를 근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 것은 이러한 것을 두고 한 이야기일 것이다. 똑같은 언어적 요소로 이루어진 표현이라 할지라도 근대에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이덕무의 이 소품에 사용된 ‘言語’의 의미를 대강이라도 알기 위해, 우리는 후한의 허신이 지은『설문해자』와 이에 대한 청대의 단옥재 주를 참고하기로 하겠다. 이는 한자의 자의(字意)를 따질 때 『설문해자』만큼의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동아시아 문자학의 근원이라 할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진 언어학적 업적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허신은 『설문해자』는 ‘言’의 항목에서 다음과 같은 풀이를 하고 있다.

直言曰言 論難曰語

직언(直言)하는 것, 즉 단순하게 막 바로 말하는 것을 일러 ‘언(言)’이라 하고 논란(論難)하는 것, 즉 복잡하게 의론하고 논박하는 것을 일러 ‘어(語)’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단옥재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大雅毛傳曰 直言曰言 論難曰語 論正義作荅 鄭注大司樂曰 發端曰言 荅難曰語 注襍記曰 言言己事 爲人說爲語 按三注 大略相同 下文語論也 論議也 議語也 則詩傳當從定本集注矣
『시경』「대아」의 모전에 이르기를 “단순하게 말하는 것을 ‘언(言)’이라 하고, 논란하는 것을 ‘어(語)’라고 한다.”고 했다. ‘논(論)’은 『오경정의』에는 ‘답(荅)’으로 되어 있다. 『주례』「대사악」의 정현 주(注)에 이르기를 “단서를 내놓는 것을 일러 ‘언(言)’이라 하고, 답하고 논란하는 것을 일러 ‘어(語)’라고 한다”고 했다. 또 『예기』「잡기」의 정현 주에 이르기를 “‘언(言)’은 자기의 일을 말하는 것이고 남을 위해 말하는 것을 ‘어(語)’라 한다”고 했다. 이 세 주를 살펴보니 대략 서로 비슷하다. 아래 항목에서 ‘어(語)’는 ‘논(論)’과 같고, ‘논(論)’은 ‘의(議)’와 같고, ‘의(議)’는 ‘어(語)’와 같다고 하였으니, 모전은 마땅히 정본 집주를 따라야 할 것이다.

즉, ‘언(言)’은 ‘단순함(直), 나(己), 시작(發端)’ 등과 관련이 있다면, ‘어(語)’는 ‘논란(論難), 대답(荅難), 타인(人)’과 관련이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언(言)’ 항목에서 언급된 것이지만, ‘어(語)’에 대한 항목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語, 論, 議’가 서로 순환적으로 기술되고 있다는 것(語論也 論議也 議語也)은 이미 위의 단옥재 주에서 언급한 바와 같는데 , ‘어(語)는 논(論)과 같다’는 허신의 설명에 대해 단옥재는 다음과 같은 주를 달고 있다.

此卽毛鄭說也 語者禦也 如毛說 一人辯論是非謂之語 如鄭說與人相荅問辯難謂之語
이는 모형과 정현의 설이다. 어(語)라는 것은 어(禦)이다. 모형의 설을 예로 들면 “한 사람이 옳고 그름을 논변하는 것을 일러 ‘어(語)’라고 한다”라고 했고, 정현의 설을 예로 들면 “다른 사람과 더불어 문답하고 변론하는 것을 일러 ‘어(語)’라고 한다”고 했다.

이 역시 위의 ‘언(言)’ 항목에서 풀이한 것과 차이는 없다. 즉 옳고 그름을 가리거나, 서로 문답하고 토론하는 것이 바로 ‘어(語)’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토대로 하면 앞서 이덕무의 소품문에 등장하는 ‘언어’가 어떤 의미인지는 분명해진다.

4.
물론 이와 같이 굳이 『설문해자』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이 문장은 어렵지 않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인데,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언어’로는 번역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언어’를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라고 풀이하고 있다. 결국 ‘체계화된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것인데, 이 정의와 『설문해자』에서 다루어진 ‘언, 어’에 대한 설명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앞의 ‘언어’에 대한 현대적 정의에는 발화자나 발화상황 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임에 비해서, 『설문해자』에서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발화의 상황이나 목적, 발화자 등에 대한 설명이 필수적이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후한의 허신과 청대의 단옥재는 모두 ‘언(言)’과 ‘어(語)’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사람이 왜 이야기하고(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서인가 상대의 말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인지), 어떤 상황에서 이야기하는 것인가(단순한 의사표현인지, 시비를 가리고 따지는 것인지)를 중요한 요소로 꼽고 있다. 그러나 현대적 정의에서 ‘언어’는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체계화된 상태로 이미 어딘가에 마련되어 있는 ‘도구’이다.

5.
『설문해자』의 ‘언(言)’과 ‘어(語)’에 대한 설명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글자의 뜻을 고구(考究)하는 과정에서 주로 고전에서 사용된 용례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허신이나 단옥재나 모두 마찬가지인데, 허신이 『시경』의 시 구절을 설명하는 ‘모전’의 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면 단옥재는 여기에다 『주례』와 『예기』에 대한 정현의 설을 더하여 풀이하고 있다.

경전에 입각한 문자에 대한 설명은 물론 『설문해자』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진 전통적 문자학에 공통된 사항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동아시아에서 이른바 소학(小學)이라 불렸던 언어학적 업적은 모두 경전 해석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한자의 형(形), 음(音), 의(意)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설문해자』가 그 대표적인 예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후한서』「유림전」에 실린 허신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許愼字叔中 汝南召陵人也 性淳篤 小博學經籍 馬融常推敬之 時人爲之語曰 五經無雙許叔中 …… 初愼以五經傳說臧否不同 於是撰爲五經異議 又作說文解字十四篇 皆傳於世
허신의 자는 중숙으로 여남 소릉 사람이다. 성품이 순박하고 돈독하며, 젊어서부터 경서를 두루 공부하여 마융이 늘 그를 공경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두고 말하길 “오경에 있어서는 허신과 쌍벽을 이룰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 처음에 허신은 오경의 전과 설의 잘되고 못 됨이 같지 않음을 보고 이에 『오경이의』를 펴내고 또 『설문해자』 14편을 지었는데 모두 세상에 전한다.

이 기사는 허신과 그가 지은 『설문해자』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허신은 어려서부터 경서를 두루 공부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일러 ‘오경에 있어서는 허신에 대적할 만한 이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오경이란 『시』『서』『예』『춘추』『역』의 다섯 경전을 이르는 것으로 당시 학문의 기본이 되는 서적이다. 허신은 이 오경을 공부하면서 이에 대한 해설서라 할 수 있는 여러 ‘전’과 ‘설’이 잘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오경이의』를 편찬하여 옳은 것을 드러냈던 것이다.

사실 허신이 활동했던 시대는 바야흐로 금고문 논쟁이 정리되어 가던 시점이었다. 예서(隸書)로 된 금문(今文) 텍스트를 기본 경전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전서(篆書) 등의 고문(古文) 텍스트를 택할 것이냐는 단순한 텍스트 선별의 문제가 아니라 유교가 국가적 이데올로기화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정치적 문제였거니와 허신은 기본적으로 고문 경학의 입장에 서서 이를 정리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업적이 『오경이의』였으며, 이러한 실증적 연구를 토대로 한자 하나 하나의 자형과 자의, 자음을 구명한 저작이 바로 『설문해자』였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소학이 처음부터 경전 해석학의 일부로 출발했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6.
그런데 이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에 활동한 단옥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언’과 ‘어’에 대한 단옥재 주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는 허신이 찾아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용례를 경서에서 찾아내서 한자의 본의를 구명하고자 했는데, 이뿐만이 아니라 그는 경서에 쓰였던 원래의 한자음을 재구하기 위한 작업에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남북조 이래의 운서, 예컨대 수나라 육법언의 『절운』이나 송나라의 『광운』 등은 모두 6-7세기의 중고음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서, 선진시대의 『시경』이나 한대에 지어진 시의 압운과는 맞지 않았다.

명말 청초의 학자 고염무는 이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상고음을 체계적으로 다룬 『움학오서(音學五書)』를 펴냈는데, 단옥재는 여기에 영향을 받아 상고음을 17개의 부(部)로 정리한 『육서음운표(育書音韻表)』를 지었다. 이것은 『설문해자주』에서 한자의 음을 설명하는 데 주요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거니와, 시경과 같은 고대의 경서에 사용된 한자들의 압운을 조사하여 그 당시의 음을 정확히 밝혀내고자 한 것이다.

요컨대 그는 한자의 뜻과 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경전을 정밀히 조사하였던 것인데, 이는 결국 한자의 음과 뜻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동아시아의 소학이 경전과의 관계에서만 그 의미를 지닐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후한 때의 허신이 취했던 관점이 청나라 후기의 단옥재에 이르러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7.
이와 같이 경전, 즉 ‘성스러운 텍스트’에 사용된 언어 표현의 음과 뜻을 정확히 밝혀내는 것을 근본 목표로 삼았던 것이 동아시아 전통의 ‘소학’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대중의 상식과 일상적인 언어 사용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언어학의 방법론이 결코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근대적 개념어나 표현이 전통 문헌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이들을 같은 층위에서 다룰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