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학과 언어학 - `가치`의 문제에 관하여
1.
『일반언어학강의』에서 소쉬르는 기본적으로 경제학 용어라고 할 수 있는 ‘가치’라는 단어를 주요한 개념어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그는 통시언어학과 공시언어학이라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두 연구 분야를 설명하기 위해 경제사와 경제학의 관계를 예로 드는 등 경제학에 대한 관심을 『일반언어학강의』 곳곳에서 표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 ‘가치’라는 개념은 그의 ‘일반언어학’을 성립시키는 결정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하나의 언어적 단위가 어떤 ‘가치’를 갖는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을 볼 것이 아니라, 다른 단위들과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소쉬르의 주장이고 이것이 바로 구조주의의 핵심 명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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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가치’라는 개념, 정확히는 ‘가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는 18세기 이래 경제학이 관심을 기울여 온 주요한 테마이기도 하다. 즉 가치의 증식이 교역에서 오는가, 아니면 농업에서 오는가 하는 논쟁이 있었고, 그에 따라 중상주의, 중농중의 등의 학파가 성립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애덤 스미스나, 리카르도 등에 이르면 가치의 근원이 노동에 있다는 노동가치설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 노동가치설을 더욱 치밀하게 밀고 나간 것이 바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맑스의 ‘노동가치이론’에서는 ‘가치’의 근원인 노동도, 또 노동이 생산해 내는 ‘가치’도 모두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된 추상적인 것인데, 소쉬르가 설정한 언어적 단위의 ‘가치’ 역시 구체적인 발화(파롤)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된 추상적인 것(랑그)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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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맑스에 의하면 노동에는 구체노동과 추상노동이 있는데,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마다, 작업 환경마다 천차만별인 구체노동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평균화된, 다시 말해 추상화되고 일반회된 추상노동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특정 상품은 숙련도에 차이가 나는 개인들이나 생산수단에 따라 생산성이 서로 다른 수많은 공장에서 만들어지지만, 그 상품의 가치는 개개인이나 개별 공장의 생산성에 따라 달리 매겨지는 것이 아니다. 질적으로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개별 노동이 아닌, 사회적으로 합의된 평균적인 추상노동이 존재하고 그것에 따라 상품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똑같은 물건을 만드는 데 어떤 사람은 3시간이 걸리고, 어떤 사람은 6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앞의 사람이 만든 상품이 뒷사람의 상품보다 1/2의 가치를 가지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된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상품에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있는데, 사용가치는 그것을 누가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에 대한 개별적인 만족도(가치)가 달라지는 것을 뜻하는 반면, 교환가치는 그런 구체적인 사용 환경과 관계없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그 상품의 가치이다. 따라서 경제학적으로 의미 있는 가치는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임은 말할 필요 없이 당연한 일이다. 교환가치를 줄여서 그냥 ‘가치’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사실 맑스가 해명하려고 했던 것은 화폐와 그것의 축척이었는데, 이 화폐가 등가교환의 매개였기 때문에 ‘가치’의 문제를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적인 거래에서는 두 상품이 서로 똑같은 가치를 가질 때에만이 교환된다. 그렇다면 그 가치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 등가라고 판단되는 가치의 기원은 무엇인가? 에덤 스미스, 리카르도 이래 그것은 노동이었다. 그런데 그 노동은 구체노동이 아니라 추상노동이라는 것이다. 구체노동으로 인해 사용가치가 생겨난다면, 추상노동으로 인해서는 교환가치, 즉 경제학에서 유의미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바로 그 가치가 드디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4.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소쉬르 역시 이 ‘가치’라는 개념을 사용했는바, 이때의 ‘가치’는 놀라우리만치 맑스가 설정한 구체노동-추상노동, 사용가치-(교환)가치의 맥락과 일치한다. 소쉬르가 설정한 언어적 단위의 ‘가치’는 실제의 발화상황, 즉 어떤 사람이 누가에게 어떠한 상황에서 무슨 목적으로 말했는가 따위와는 무관한 ‘랑그’와 관계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노동이나 사용가치로는 상품의 가치 체계를 논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이들 대신 추상노동과 교환가치가 경제학의 새로운 개념으로 제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또 말할 때마다 매번 달리 발음되고 이해되는 구체적 발화는 도저히 학문적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랑그라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추상적 실체가 제기된다는 논리의 전개 과정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일치하는 점이 많다. 소쉬르가 『일반언어학강의』의 전반부에서 그토록 공을 들여 주장하고 있는 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발화, 파롤을 일반언어학에서 배재하려고 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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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소쉬르가 어떤 경제학자의 영향을 받았느니 하는 따위의 것은 아니다. 물론 특정 경제학자를 지목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분명 소쉬르는 일반언어학을 강의하면서 여러 곳에서 경제학의 경우를 예로 들었고, 그에 대한 상당한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히 어떤 특정한 경제학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소쉬르가 언어학에 가치의 문제를 도입했고, 그때의 가치라는 것은 구체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미리 합의된 일정한 체계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경제학과 언어학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근대에 들어 새로이 나타난 사회적 현상이나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려는 공통된 방법론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아도큰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