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쓰는 국문론집성』 해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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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중반 이후의 각종 신문과 잡지에는 ‘국문’과 관련된 글들이 제법 눈에 띈다.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조선 사람들이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들겠다’는 『독립신문』의 그 유명한 창간사에서부터 ‘기자(箕子)가 전해준 한문뿐만 아니라, 우리 성왕이 창제하신 국문도 함께 사용하겠다’는 『황성신문』 창간호까지 국문에 대한 논의가 백출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그 내용은 한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 그 때문에 더 빨리 지식을 습득하여 ‘실상사업’에 나갈 수 있는 ‘국문’을 써야 한다는 것이 주이고, 이와 더불어 이 ‘국문’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전해졌는지 그 ‘연원’을 따지는 글, 그리고 그 사용 방법에 대한 의견(띄어쓰기를 해야 한다, 동음이의어 구별을 위해 방점으로 장단을 구별해야 한다) 등이 제시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국문’에 관한 이러한 다양한 논의 속에서 ‘국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조사로는 1906년 이전에는 ‘국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일상적인 대화, 심지어 매체에 실린 글에서도 ‘한글’과 ‘국어’를 혼동하여 쓰는 일이 흔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는 ‘국어’라는 말을 안 쓴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한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다시 말해 ‘국어’에 해당하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만약 그렇다면 ‘국어’로 표현되는 개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물론 일본으로부터의 유입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國語’라는 말은 이미 1860년대부터 각종 문헌에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었으며, 1890년대 중반부터는 국가 의식이 강하게 투사된 ‘國語’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1881년의 신사유람단 이래 수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을 왕래하며 여러 지식과 문물을 받아들인 것을 고려한다면, ‘국문’을 논하던 이들이 1905년까지 ‘국어’라는 말 자체를 몰랐다고 가정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가 동아시아의 전통적 담론 체계에서는 논의의 대상으로 다루어져 본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중국언어학사』의 저자 왕력이 ‘5·4운동 이전에는 중국에 언어학이 없었다’라고 언급한 것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인데, 흔히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언어학이라 불리는 소학(小學)은 천리(天理)를 담은 경전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학문이었기 때문에 한자가 주된 논의의 대상이었고, 성운학과 같이 소리의 체계를 다룬다고 해도 이때의 소리는 어디까지나 한자의 소리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의 전통적 담론 체계에서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언어’라는 대상 자체를 인식할 여지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언어’를 문자로부터 분리해 내고 마침내 문자는 언어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담론 체계 없이 ‘국문’으로부터 ‘국어’로의 비약은 불가능했었다는 말이다.
특정 시기의 담론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담론이 의미 있는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개념어라는 것은 바로 이 대상의 존재를 언어적으로 표현하고 설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무엇이 존재한다고 보는가, 그리고 그것의 존재 방식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것은 서로 다른 담론을 구별하는 가장 큰 기준이거니와 이러한 양태는 개념어들에 의해서 드러나게 된다. 예컨대 동아시아의 전통적 의학 담론에서는 ‘기, 음양, 오행’ 등이 중요한 대상으로 다루어지거니와 서구적인 근대 의학 담론에서는 이와 같은 것의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따라서 1890년대 그 많은 ‘국문론’ 속에서도 ‘국어’가 쉽게 발견될 수 없었던 것은 단순히 특정 개념어의 문제가 아니라 그 개념어와 관계 맺을 대상을 인식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담론 체계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특정한 담론의 구조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또한 주체의 분석이라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각 담론이 일정하게 전제하는 주체의 상이 있다고 보기 때문인데, 예컨대 자본주의 담론은 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한 인간 유형을 설정하고, 성리학에서는 사단칠정을 기반으로 하는 나름의 인간형을 제시한다. ‘국어’를 의미 있는 대상으로 설정하는 담론 역시 ‘국민’이라는 특정한 주체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다른 나라 말을 쓰면 우리 국민의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식의 과격한 언사로도 나타날 수 있지만, 일견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주시경은 1906년에서 1907년까지 『가정잡지』에 수많은 글들을 기고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 ‘국토의 지리와 역사’에 관계되는 글은 물론이고 ‘조혼을 하지 말라, 낭비하지 말라, 도박하지 말라, 미신을 버리라, 말을 공손히 하라, 생업을 가지라, 머리를 때리지 말라, 물독을 자주 씻어라, 아이를 업어 키우지 말라, 좋은 놀이를 하라, 노래로 일과의 피로를 풀라’ 등과 같이 어찌 보면 자질구레하고 별 의미 없는 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위에서 언급한 ‘주체의 문제’로 놓고 보면, 모두가 ‘국어’를 말하는 (또는 말해야 하는) ‘국민’이 어떠해야 하는지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계급/계층적 구별과 지역적 편차 등을 무시해도 좋은 일반적인 의미의 ‘국민’이라는 근대적 주체(일반적 화자)를 ‘국어’는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역의 관계도 성립한다. 다시 말해 ‘국민’은 서로가 공유한다고 가정하는, 더 나아가 지역적 계층적 변이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균질하다고 여겨지는 ‘국어’의 존재를 필요로 했다.
이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층위의 주체를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이 주체는 그 담론 안에 있는 주체가 아니라, 담론 밖에 있는 주체로서 그 담론을 통해 권위를 행사는 주체다. 의학 담론에서라면 의사, 의학자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근대기에 ‘국문’과 ‘국어’에 관한 사회적 발언을 하던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지석영, 유길준, 서재필, 이능화 등과 같이 초기 ‘개화’ 세대이면서 사회의 각 방면에서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다. 이들은 신문 잡지 등을 통해 ‘국문’의 사용을 역설했으며 직접 문법서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1910년대가 되면 이들과 여러 모로 구별되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앞 세대가 사회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위 ‘개회인사’라면 이들은 국어, 국문에 일정한 전문성을 인정받은 사람들이었다.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과 최남선, 이광수 같은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이 세대와 앞 세대를 잇는 인물이 바로 주시경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연배 차이로 보나 실제 관계로 보나 지석영, 서재필 등은 주시경의 선생으로 보아도 무방하고, 김두봉 등은 주시경의 제자였다. 조선광문회 등을 통해 주시경이 최남선과 교류했던 사실 역시 익히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