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대 촘스키, 촘스키 대 푸코
1.
푸코 대 촘스키, 촘스키 대 푸코.
생각만 해도 흥미로운 이 두 사람의 대결을 상상해 보았던 것이 언제인가?
아마도 그것은 촘스키의 Cartesian Linguistics를 읽었을 때였을 것이다.
데카르트와 훔볼트를 자기 이론의 철학적 배경으로 내세운 촘스키는
행동주의 문법을 ‘혁파’하면서 내세운 심층문법의 구체적 선례로 뽀르루와얄의 문법을 제시했다.
바게트 빵처럼 팔렸다는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설명하기 위해 ‘부/자연/언어’ 관련 문헌들을 분석하면서, 언어 담론의 대표적 사례로 뽀르루와얄을 꼽았다.
그러나 둘의 핀트는 완전히 어긋나 있다.
촘스키가 뽀르-루와얄 문법을 들먹인 것은 인간 이성에 기반한 문법을 주창하기 위한 것이었고,
푸코는 인간의 지성/학문/담론은 시대적인 규제/규범/틀(에피스테메)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뽀르-루와얄 문법을 불러냈던 것이다.
뽀르루와얄 문법을 매개로 둘을 비교하는 논문을 쓰려고 마음 먹은 지가 한참이지만, 물론 아직이다.
생각해 보니, 그런 논문을 받아줄 언어학 관련 학회지가 있을까 싶다.
2.
몇 주 전 이대에 놀러 갔다가, 학교 안에 자리 잡은 교보문고에서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얄팍한 기획 의도가 훤히 보인다 싶어 심드렁하게 몇 장 넘겼는데, 한 90페이지 정도가 실제로 1971년도 네덜란드의 한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둘이 대담한 것을 옮긴 것이었다.
촘스키는 영어로, 푸코는 불어로.
인간의 본성에 관한이 대담은 그러나 아주 불공정했다.
한쪽은 인간의 본성이 이성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인간의 ‘놀라운’ 언어 능력에서 찾고자 전력하고 있는 반면,
다른 한쪽은 그런 것은 애당초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푸코에게 고정 불변의 인간성이라는 것은 일종의 넌센스다.
그래서 대담은 겉돈다. 그리고 푸코는 불성실해 보이기까지 하다. 대개의 질문에 답을 회피하고, 또는 동문서답한다.
그러나 정치 영역에 들어가자 대담은 논쟁이 되고,
둘의 입장은 판이하게 갈린다. 촘스키는 상식적인 시민이, 푸코는 ‘똘아이’가 된다.
촘스키는 정부에 대한 투쟁은 더 나은 정의를 위해서라고 한다.
푸코는 정의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일 뿐.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지 정의롭기 때문에 싸우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계급투쟁만이 있을 뿐이란다.
촘스키의 한마디가 이 대담의 곤란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진정한 정의의 개념은 인간성의 바탕에 깔려 있다.”
맙소사, “정의, 인간성” 두 개념 모두를 받아들일 수 없는데, ‘인간성’ 안에 ‘정의’가 들어 있다니.
푸코는 침묵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3.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맑스는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역사를 초월한 어떤 추상적인 본질로서 인간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역사적 관계 속에서만 인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윈의 식탁>에서 촘스키는 새로운 이론에 둔감한 꼰대 취급을 당한다.
60년대 이래 엄청나게 발전한 진화론(물론 이는 유전자 중심의 진화론인데, 사실 이것이 더 위험한게 아닌가 싶다)에 귀 막은 채 자기 주장만 늘어놓는 구닥다리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는 기본적으로 촘스키가 언어능력을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언어능력이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인 한, 그것은 진화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인간이 아닌 동물에게는 언어능력 비슷한 것이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반면,
(그러나 인간의 언어유전자로 알려진 FOXP2는 쥐에게서도 발견된다)
인간이 ‘발생’한 이래로 모든 인간의 언어능력은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본성이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언어학에 역사와 사회가 있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정치학 역시 언어학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역사와 사회를 초월한 인간 본성으로서의 ‘정의’를 추구하는 한, 그의 정치투쟁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단 한치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언어학이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