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격물치지

pourm 2010. 3. 4. 15:43


새해가 밝고 한동안 아침저녁으로 두 권의 책을 읽으며 설렜다.

그 중의 하나가 김용옥의 <대학·학기 한글 역주>

단순히 주자가 예기의 <대학>편을 독립시켜 사서의 하나로 만들었다는 정도밖에는 모르고 있었으나, 대학에 대한 논의는 한유로까지 소급되고 주자는 이정의 대학 편차에 상당한 변개를 가했을 뿐만 아니라 억지로 경-전 체제로 만들었다는 것이 도올의 설명.

특유의 장광설이 펼쳐지기는 했으나, 큰 틀에서 대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론은 역시 격물치지.

格物이 物에 나아가는 것(주희)이냐, 아니면 物을 바로 잡는 것(왕양명)이냐.

사물에 나아가서 그에 대한 지식을 얻을 것이냐, 아니면 사물을 바로 잡아서 양지에 도달할 것이냐.

사물에 나아가 얻는 이치는 자연과학적 인식과 멀리 있지 않을 터. 도올이 주희를 데카르트에 유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주희가 데카르트가 되지 못한 것은 수학이 없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마루야마 마사오가 언급했던 것처럼 주희에게는 작위의 개념이 없었다. 사물/우주의 이치와 인간 사회의 도리/원리에 하등의 단절이 없었고, 모두 스스로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 물론 이것을 수학, 즉 양적 인식의 부재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마루야마의 입론이 옳다면, 오규 소라이는 수학 없이 ‘작위’의 개념을 발견/발명하지 않았는가.

사실 格의 자연스러운 해석은 ‘바로잡다’나 오히려 ‘멀리하다’에 가깝다.

이렇게 보면 왕양명의 설이 타당해진다. 그러나 나아간다 식의 해석은 주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한유로부터 시작된 나름 다수설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왕양명이 대학의 논지를 ‘양지’로 몰아가기 위해 격물을 억지로 해석한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

재밌는 것은 얼핏 언급하고 넘어간 도올의 설인데(물론 이것이 정말 도올의 설인지는 알 수 없다), 格을 格子의 그 격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어떠한 격자 없이 사물을 해석하고 이해하거나 표현할 수 없을 터. 그 이후에 발견되는 것이 지식. 곧 格物致知.

그리고 담론이라는 게바로 그 격자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