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변유, 사유, 정경, 그리고 녹색평론

pourm 2008. 8. 3. 22:27

1.

평택을 들러 오산을 거쳐 양재동에서 내렸다.

평택에서 기차로 출퇴근 하는 후배가 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기에 문병을 다녀오다가

오산에서 밥벌이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 저녁을 얻어먹었다.

양재동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리다가 문뜩,

생각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 친구들을 멀게 느꼈는가.


휴가 삼아 미국으로 가족 여행을 한다는, 애가 크는 동안에 그럴 기회가 없을 거 같아 크로아티아의 휴양지를 다녀올 생각이라는, 아버지 칠순기념 가족여행에 일천만 원하고도 몇 백만 원을 썼다는 찬구들의 말에 나는 동생네와 2년째 다달이 오만 원씩 붓고 있는데, 그것 가지고는 어디 가지도 못 하겠구나, 볼 멘 소리를 했다. 괜한 짓이었다.


2.

대학 1학년. 은근한 선배의 권유에 책을 읽었고, 토론을 했다.

나는 여러 출판사에서 합법적으로 나온 소련 교과서를 읽을 수 있는 세대였다.


<변증법적 유물론>(변유)과 <사적 유물론>(사유)을 읽고 김수행의 <정치경제학>(정경)을 거쳐 <제국주의론>(레닌의 것은 아니고, 일본에서 나온 해설서를 읽은 것 같다)까지 오면 얼추 1년하고도 한 학기쯤이 지난다.

그리곤 그람시나 알튀세 따위를 <이론> 같은 잡지에서 복사해서 나눠 읽었다.


정운영, 특히 그의 <노동가치이론연구>에 빠졌고(사실은 <광대의 경제학>이라든가 <저낮은 경제학을 향하여>와 같은 좀더 대중적인 책의 열혈팬이었다. 아 그의 화려한 문장에 나는 얼마나 황홀해 했던가), 윤소영이 번역한 소련제 정치경제학에 밤을 샜다. 또 이론과실천사의 <자본론> 2,3권을 번역한 강신준의 <자본의 이해>라는 책 역시 기억에 남는다.

교환이 추상노동을 전제하고, 추상노동은 또 교환을 전제한다는 기이한 가치법칙을 ‘발견’한 것은 1학년 세미나에 간사로 들어갈 2학년들과 사전 세미나를 하면서였다. 3학년 겨울방학.

<자본론>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그 후였다.


3학년 봄 무렵에는, 산업사회연구회에서 펴낸 <탈현대사회사상의 궤적>인가 하는 책을 통해, 알튀세의 이름에 딸려 소문으로만 듣던 라캉, 푸코, 데리다 등등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서사연 팀이 쓴 <탈주의 철학>을 (밑줄 쳐 가며) 열심히 읽었더랬다.


변유와 사유, 그리고 정치경제학을 읽으며, 무어라고 할까, 거창하게, 바슐라르의 말을 빌어, 인식론적 단절을 겪었다, 고 하면 우스운 소리가 되겠지만, 어쨌든.... 나는 최소한 머릿속만큼은 이 사회의 주류적 가치에서 크게 일탈했다.

사실 대학원은 그 대안이었고, 학술운동이라는 미끈한 말장난은 참으로 쉬운 타협안이 되어 주었다.


어쨌든 변유와 사유, 그리고 정치경제학은 내게 ‘다른 삶’에 대해 이야기했고(후기구조주의 역시 나는 이 배치 속에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짐짓 그로 인해, 그 이전에 만난 친구들과 스스로를 구별하기도 했다. 어처구니없게 시리.

그 구별의 느낌은 지금처럼 서글프지는 않았다.


3.

요즘, 변유와 사유, 정체경제학을 읽으며 느꼈던 그 때의 단절감을 다시 느낀다.

<녹색평론>을 읽으면서.


변유와 사유, 정치경제학을 함께 읽은 한 친구와, 꽤나 명성이 자자한 진보적 정치학자를 사사하는 이 ‘변절한’ 좌파와(운동은 제도 정치에서 소화해야 한다는 이 친구를 좌파라고 부르기가 영 어색하다), 학생운동 판을 기웃거리던 시절 제일 오랜 시간 격렬하게 논쟁한, 그리하여 가장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는 이 과거의 ‘동지’와 나는 ‘촛불집회’뒤의 어느 술자리에서 꽤 심한 거리감을 느꼈다.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이해한 이 친구와의 그 술자리는 그것으로 간단히, 맥없이 끝나버렸다.


자본의 사이클을 파괴하는 일은 대단히 극적이고 스펙터클하여 가슴을 저릿하게 하지만, 지극히 몽상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꺼림칙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예컨대 누천년 이어온 민족이란 것을 상상하고, 균질적인 ‘국어’를 상상하는 것 같은 종류의 특수한 배치에서나 필요한, 다분히 종교적 냄새가 풀풀 풍기는 그러한 정신적 노동이 필요하다. 시실 혁명과 민족/국가는 애초에 동일한 상상력의 소산일 터. (부르주아 혁명과 근대 민족국가는 완전히 겹쳐지는 시뮬라르크 아닌가)


자본의 사이클에서 벗어나는 삶은, 그런 극적이고 스펙터클한 상상력을 요하지 않는다. 따라서 흥미진진하기는커녕 너무 진부해 쉰내가 날 정도이다. 자본의 사이클 그 어느 지점엔가 속해 있지 않고서는 아무런 ‘가치’도 생산해 낼 수 없는 이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사이클로부터 한발 벗어나는 일은, 따라서 내 삶에서 자본의 궤적을 조금이나마 옅어지게 할 수 있는 길은 바로 내가 먹을 최소한의 것을 내 스스로 가꾸는 데서 시작된다. (또는 그 행위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

맙소사! 그러나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 자본의 사이클에 종속되어 있다면, 나는 영원히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육골분을 (간접적으로) 먹은 소의 살코기나 유전자 변형식품을입에다 우겨넣을수밖에 없는 것은 오히려대단치 않은 문제다. 그것이나마 먹기 위해 나는 직접 자본의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4.

물론 아직은 잘 모르겠다. 또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자본이란 것이 타격하고 거부해야 할 대상만도 아니다. 다만 그 자본의 사이클 밖에서는 어떠한 것도 ‘가치’를 생산해 낼 수 없는, 자본 위주의 삶이 문제인 것이다. 가치를 생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자본의 시스템 밖은 천길 낭떠러지라, 한 발짝도 옮길 수 없고, 그 밖에서는 아무 짓도 할 수가 없다. 인류 사회가 전체가 이처럼 거대한 시스템에 목줄이 메여 있었던 적은 없다. 스스로의 삶을 결정한다는 이데올로기는 얼마나 허망한가.

생산력 중심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던 기존 사회주의 국가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동일한 지반을 가지고 있었음은 불문가지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론은 오히려 의심의 대상이 된다. 시골장터를 돌아다니며 서커스 공연 사이사이에 ‘강매’되는 약의 효능 역시 만병통치약가 아니던가.

그런데 <녹색평론>이 이야기하는 ‘소규모 자급농 위주의 사회’는 현대 사회의 문제를 상당한 정도로 해결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예컨대 촛불집회에서 운위되는 여러 문제들은, 우리가 소규모 자급농 위주의 사회였다면 애초에 제기될 까닭이 없는 것들이다. 아니 그것이 아니고는 근본적인 해결 자체가 가능할 성 싶지 않다. 이는 물론 과학기술로는 ‘당면한 파국’을 막아낼 재간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성립 가능한 명제이다.(‘파국.’익숙한 말이다. 다만 이때의 ‘파국’은 자본-사회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생태-사회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더 가공할 속도로 더 집약적 방법으로 지구를 파먹고 있을 뿐이다. 지속가능한 사회는 여전히 우리 앞에 없다.


(심지어, 내 관심사인, 근대 민족국가와 궤를 같이 하는, ‘언어적 근대’에 관한 여러 문제도 이 틀에서 바라보게 될 것 같으면, 예컨대, 민족/국가와 언어(하나의, 혹은 하나이어야 할)가 끈적끈적하게 뒤엉켜 벌어지는 온갖 스캔들을 아마도 소리 없이 재울 수 있을 묘수가 떠오를 것만도 같다.)


5.

국가의 관점에서는, ‘국어’와 ‘국사’의 관점에서는 지금의 문제를 그 어느 것 하나 풀어 낼 재간이 없다.

인간의 눈으로는 보이지조차 않는다. 그렇다, 해삼의 눈. (몇 년 전 읽은 일본의 어느 인류학자가 생각난다. 폴리네시아에서 함경도에 이르는 길을 그는 해삼의 눈으로 더듬고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소통은 그제서야 드러난다.)


소규모 자급농은, 그러므로, 고립적일 수 없다. 전지구적 아니 전우주적 관점으로 사고해야 하고 자연과 소통해야 한다. 전지구적 소통의 물질적 조건은 이미-도처에 마련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