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1, [일반언어학강의]
1.
지난 며칠 <자본> 1-1권을 다시 읽고 있다. 상품의 분석, 그 가치의 해명이 <자본> 1-1권의 주요한 대상이다. 사실 소련식 맑스주의에 기대고 있던 과거의 학생 좌파들은 자본을 직접 읽기보다는 언제부턴가, 정치경제학을 단숨에 읽음으로써 자본 읽기를 대신했다. 90년대 초반, 이미 소련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다 해서 서너권 정도 되었던 것 같다)도 나와 있었던 터고, 특히 김수행 선생의 <정치경제학원론>은 좌파 운동권의 필독서였다.'잉여가치의 경향적 저하 법칙' 부분을 읽으며무슨 환희 비슷한 걸 느낀 건 1학년 겨울 방학 쯤이었고, 그게 자본 3권에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대학을 졸업할 때 쯤이었던 것 같다.
여하튼, 1권은 상품의 가치를 해명한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각각 구체노동 및추상노동과 연관된다. 이때 등가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구체노동이 아니라 추상노동이다. 그러나 이 추상노동은 교환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지 교환 이전에 생산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교환을 통해 하나의 생산물은 추상노동을 가치로 담지한 상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교환은 동일한 양의 추상노동으로 인해 등가 관계가 성립하는생산물 간에 이루어진다. 즉 교환은 추상노동을 전제하고 추상노동은 교환을 전제한다.
2.
(맑스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가실제의 사용가치 및 구체노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듯이,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의 가치는 실제 대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다. 상품의 가치와 기호의 가치는 교환을 통해서만 성립한다. 교환은 이 둘을전제하는 것이고. 맑스(의 상품 분석)와 소쉬르(의 기호 분석)는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구체노동-사용가치는 파롤과, 추상노동-가치는 랑그와 너무나도 잘 들어맞는다. 그리고 그 가치를 외적 대상에서 찾지 않고 각자의 체계(교환체계)에서 찾는다는 데서 이 둘의유사점을 단지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임노동 관계에 기초하지 않은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런 (자본주의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근대적 언어 사용/인식에서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화용/화행은? 요즘의 고민이다.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일반언어학강의>를 다시금 떠들쳐 보면서 10년 전에 읽을 때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이 자꾸 보인다는 점이다. 그 중 하나는 언어학과 경제학의 비교이다. 특히 가치를 논하는 부분에서는 그 두 학문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대응시킨다. "이들 두 과학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상이한 질서에 속하는 두 사물 사이의 등가 체계이다. 즉 후자에 있어서는 노동과 임금, 전자에 있어서는 기의와 기표이다." (최승언 역, 99쪽) 하지만 기의-기표, 노동-임금이 어떻게 대응되는지는 좀더 고민을 해보야 하겠다. 그리고 이 부분이 공시-통시를 구분하는 부분에서 나왔는데, 이것도 맥락상 어색하다. 내가 이해를 못하는 것인지, 이 책의 편집자들이 경제학과 언어학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 끼워 맞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3.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는 음성중심주의를 비판한다. 플라톤 이래 서양에서는 좀더 본질적인 것에 이물질이 끼어 들어 타락된, 대체물 또는 대응물을 백안시하고 이들에 선행하는 순수 질료/형상을 찾아 헤맸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쉬르 역시 <일반언어학강의>에서 문자를 언어 연구의 대상에서 제외하면서 그런 논리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플라톤 이래의 음성중심주의와 다를 게 없다는 게 데리다의 생각이다. 즉, 문자는 순수한 언어에 분칠하고 가발을 씌운, 지워버려야 할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루소도 마찬가지였으니, 인간의 본능적 감각과 감성이 언어에 의해 퇴색되고 타락했는데, 그 중 소리는 가장 육체와 가까운 것이므로 이상적인 것의 현전으로서 기능할 수 있지만, 문자는 언어를 가장 비자연적인 것으로 밀고 나갔다는 점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진은 소쉬르가 문자를 언어학의 영역에서 내쫓은 것은 문자가 가치 없는 것이라서가아니라고 핏대를 세운다. 소쉬르가 문자를 백안시한 것은 근대적 에크리튀르로 인해 발생하는, 문자=민족=국가라는 식의 (역사언어학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소쉬르는 분명 생물학, 해부학, 물리학, 생리학에 심대한 영향을 받아 (예외없는) 음법칙에 집착한 소장문법학파의 일원이었고, 그의문자 배제 역시 이런 역사언어학의 진전과 분리해서 바라볼 수는 없다. 물론 그의 문자 배체 테제가 역사언어학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효과를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을 의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소쉬르는 과학으로서의 언어학이 문자를 대상으로 할 수는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언어와 문자는 서로 다른 것이고 따라서 언어를 설명하는 데 있어, 다시 말해 언어학을 하는 데 있어 문자를 끄집어 들일 수는 없던 것이다.
그런데 이는 언어 내적 법칙 찾기라는 근대언어학의 주요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 설정이었고, 또 그 첫 발을 대딛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즉 언어 외부를 배제하는 근대적 언어 의식의 출발점이다. 언어는 그 자체로 자족적인 것이어서 외부적 사실과는 무관하게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이서 투명하고 균질적이며 중성적/중립적이다. 따라서 근대적 언어는 내부로 침잠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고진이 언급한) '내적 고백으로서의 언문일치'가 대두된 이유일 것이다.
4.
임노동 관계에 기초하지 않은 노동은 (자본주의적, 따라서 근대적인가치체계에서)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내적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은 화행은 (근대적, 따라서 자본주의적인 언어인식에서)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아직은 억지이다.
그러나 맑스-소쉬르-비트겐슈타인의 동맹, 그리고 여기에 괴델-주시경-연암-인상파 등이연대할 이 동맹은 도처에서,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중이다.
오래된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