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쥐/ 등

pourm 2007. 6. 29. 07:18

대학원 들어와서 여기다가 학기별로 한 번씩 쓰는 것 같다.

일기를 통 쓰지를 못한다. 머리도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학기를 마쳤는데도 전혀 긴장이 풀리지 않고 신경이 곤두서 있다.

<쥐>라는 만화책을 보았다. 1,2권.아트 슈피겔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유태인 이야기이다. 생존기 자체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고 하면 '아우슈비츠 이후'에 살고 있는 자가 할 소리가 아니겠지만, 어쨌든 많이 보아오던 이야기이지만, 그 방식이 재밌다. 인종/종족을 동물로 묘사한 것(유태인은 쥐, 독일인은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 미국인은 개... 뭐 이런 식이다)도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 과정에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서술자를 또 다른 등장인물로 만들고있고, 만화/만화가에 대한 고민과 언급이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게 내내 흥미로웠다. 다중의 겹이다. 2차대전 당시의 블라덱, 그때를 회상하는 현재의 구두쇠 블라덱, 그 이야기를 녹음하는 아트, 그 과정을 만화화 하면서 고민하는 만화가(2권에는 1권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그리고 실제 작가.이들은 당연히 수시로 섞이고 넘나든다. 80년대에 나온 책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형식이었을 터이다. 사실 서술자가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것은 '미숙'한 서사형태였다. 그러나 이제 바로 그것이 새로운 느낌을 준다. 그것은 단순한 미적 쾌감인가. 아니면 자기언급과 반성을 통해 무한 순환을 반복하는 인간 그 자체(의 은유)인가.



서경석의 <디아스포라기행>을 읽고 있다.글쓰는 사람이 얼마나 까탈스러워야 하는지 보여준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편집증적으로 고민한다. 분명히 디아스포라의 경우, 개인과 그것을 폭력적으로 규정하는(그러나 대부분 의식하지 못한 채진행되는) 여러 범주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중언어 사용에 대한 고민은 디아스포라 문제로부터 시작하지는 않더라도, 이 문제를 회피하고는매끄럽게 풀리지 않을 것 같다.

고전음악과 미술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 그리고 여행을 '일삼는' 그의 삶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디아스포라의 삶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임을 생각하면 (분명히 생각만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그 긴장과 고투가 벌써 피곤해진다. 그의 글을 읽으며 런던에 있는 맑스의 묘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공산당 선언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내 나이 이전에 썼다는 걸 새삼 깨닫고, 그걸 다시 봐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도한 현창은 항상 뒷맛이 개운치 않다. 또벌써부터 생각했던 일이지만, 브레겔의 그림을 보러 벨기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아마 조만간에는 그럴 기회가 없을 것 같지만.



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1,2권)을 읽고 있다. 한창 잡지 <문화과학>이 나올 때, 는 아니고 나오기는 나오나 그에 대한 관심도가 많이 떨어졌을 때, 그 잡지를 만들던 같은 이름의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92년 <문화과학>2호는 '언어, 현실, 변혁'이라는 특집 주제를 가지고 비트겐슈타인을 엄청나게 띄웠다. 그러나 나는 도통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알튀세와 비트겐슈타인의 결합. 그럴듯하고 멋져 보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들도 나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아마 그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2권은 청색과 갈색 톤의 표지로 감싸여 있는데, 이는 당연히 <논고>와 <탐구> 사이의 청갈색 책을 연상케한다. 비트겐슈타인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면 누구하 이야기하는 책이었으나 한번도 떠들쳐볼 생각을않다가, 저자의 다른 글을 읽다가 흠찟 놀라 주문했다.

(내가 읽은 부분까지는) 아직 1차대전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지적으로 결별한 상태이고 무어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학사학위 논문의 형식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그의 전언에 (번지수를 잘못 찾은) 욕을 해댔던 거다. 나의 불만은 당시의 지적 사회적 흐름이나 배경이랄까 그런 것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 세기말의 비엔나> 같은 책은 그런 부분을 필요이상으로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재미있는 점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 모두 과학(수학, 논리학)과 그외의 것을 분명히 구분하고 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당연히 과학에 몰두하는데, 그들 모두 천재성, 영감 등등에 매우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을 천재-광인의 범주에 넣고 있는 것이다.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 자신이나. (비트겐슈타인이) 병에 걸려일찍 죽거나 끝내 자실하고 말 것이라고생각했다는 것또한 그렇다. 이는 예술가-공예가, 예술-공예/기예가 구별되면서부터, 생긴 관념과 일치한다. 예술품은 실생활이나 그 작자와 관련을 맺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나의 작품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시간과 공간이나 사회적 배경과 무관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 이는 서사에서 (초월적) 서술자를 사라지게 했(으며, 문장에서는 언문일치체로 가는 핵심적 과정이기도 하)다. <쥐>류의 등장인물-서술자-실제작가가 뒤섞이는 이야기 구성에 지적 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이 근대적 서사 문법을 의도적으로 뒤트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언제나처럼, 무언가 결정을 해야할 때가 가까워 온다.그리고 그 과정을 점점더 힘들고 피곤하다.

2007.6.29. KB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