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앨런 제닉 외, 석기용 옮김, 이제이북스
1.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하나는 그 책을 쓰고 나서 비트겐슈타인이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언했다는 사실과(이 얼마나 어이없는 소리인가), 러셀이 써준 서문이 자신의 저술 의도와 전혀 관계가 없는 헛소리라며 출판 자체를 거부하는 소동을 벌였다는 이야기(사실 <논리철학논고>는 비트겐슈타인의 박사논문이었고 그 논문을 지도한 이가 바로 러셀이었다)가 나머지 하나이다.
2.
<빈, 비트겐슈타인,그 세기말의 풍경>(이제이북스)는 지금까지 있었던 영미권의 비트겐슈타인 이해가 완전히 그릇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 언어철학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윤리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윤리와 도덕을 이야기하고 있는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그러나 이 책이 얼마나 비트겐슈타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저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이 자란 세기말의빈을 보여주기 위해서 당시의 정치 및 사회 상황, 그리고 음악 건축 문예 등의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겉치장이 심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이 팽배하던 분위기를 지루하게 설명한다. 그러고는 칸트와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등의 철학에 의해서 벌어진 당시 빈의 인신론 관련 논쟁을 이야기한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와 러셀을 만나기 전부터 논리학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문제의 <논리철학논고>. 500페이지쯤 되는 책의 2/3를 읽고도 나는 아직도 이 책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4.
‘사실과 가치의 창조적 분리’, 그리고 ‘내용과 형식의 일치’ ― 이 책에서 힘을 주어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
‘사실과 부합하는 수학적 명제는 그림/표상/모델의 일부분이다’(?) ‘윤리적, 도덕적인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 그러나 이 부분은 기왕의 비트겐슈타인 이해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내가 기존의 편견에 너무 얽매어 있어 이런 식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5.
십여 년 전 계간지 <문화과학>에서 언어관련 특집호(2호, ‘언어 현실 변혁’)를 낸 바 있다. 당시에는그 잡지의 편집위원대부분이 알튀세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글들로 가득 채워졌었으나 거기서도 비트겐슈타인이 논의되었다. 아마 지금 그런 특집을 마련한다면 들뢰즈/가타리 얘기로 넘쳐 나겠지만(게다가 들뢰즈/가타리는 알튀세보다 더 직접적으로 언어에 관한 언급을 남겼다. <천의 고원>이 그렇고 <의미의 논리>나 <기계적 무의식>이 그렇다.) 그러나 그럼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여전히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놀라운 계발성 때문인가. 아니면 그의 난해함 때문인가. 어떤 입장에 서든 그로부터는 빼먹을 게 무궁무진하다? 아니면 어려워서 여기저기서 ‘그가이꺼 대충’ 들춰진다?
(그때의 특집에는 정약용의 <아언각비>가 유초하에 의해 다루어졌다. 그러나 이 <아언각비>는 정약용이 왜 박지원과 표현의 문제에 있어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2005.9.26.화
(뱀발蛇足: 아뿔사!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옆에 꽂혀 있는 고진의 <탐구1>을 별생각없이 집어들었는데, 여기에 이미 이 책이 언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진은 칸트에서 키에르케고르로로의 전환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철학적 탐구>로의 이동에 비길 수 있다고 쓰고 있다.칸트-쇼펜하우어-케에르케고르의 계열이 모두 <철학적 논고>와 관련되어 있다는 이 책의 생각과는 달라 보인다.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건 칸토어로 비롯된수학의 위기가 러셀을 괴롭히고 그의 노력으로 간신히 복구된 수학이 괴델에 의해 완전히 좌초된저간의 사정이 바로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언어 게임과 관련해서 '무한(론)의 타자'가 언급된다. '무한의 파라독스'와 언어학을 연결시켰던 나의 대책없는 공상을고진에게서도 보니 반가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