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량화혁명, 앨프리드 크로스비, 김병화 옮김
중세까지만 해도 이슬람이나 동아시아 문명에 비해 별 볼일 없던 서구 유럽이 어떻게 근대 이후 전세계를 압도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 근본 원인을 탐사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에 대한 교과서적인 대답, 즉 ‘과학혁명'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어떤 특정한 망탈리테의 형성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 특정한 망탈리테란 세계를 균질적인 단위의 집합체로 설명하려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통해 세계는 마일, 각도, 시간, 분, 음표, 굴덴 등으로 분절되고, 이는 음악 보표, 세계지도, 군대의 대형, 회계장부의 항목, 행성의 궤도 등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로 배열된다. 서구는 이런 것들을 통해 세계를 효율적으로 설명하고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인들이 열광했던 것들
푸코가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설명하기 위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로부터 <말과 사물>을 시작하듯, 크로스비는 16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브뢰헬이 그린 <절제>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에 근대인들이 열광했던 것들이 매우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달과 별 사이의 각거리를 재는 천문학자와 온갖 측량 도구를 동원해 무언가에 열중인 기술자들, 성서로 보이는 커다란 책을 둘러싸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 저마다 계산에 열중인 상인?회계사?농민, 원근법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악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합창단 따위가 등장한다. 그리고 절제를 상징하는 여성이 그림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녀의 머리에는 시계가 얹혀 있다.
화가는 당대인들이 환호할 만한 모습들을 이 판화에 담은 것일 터인데, 일견 잡다하기만 해 보이는 이 다양한 행동들에 사실은 중세를 넘어선 근대 서구의 핵심이라 할 그 무엇이 관통해 있다. 세계를 균질적 단위의 집합체로 설명하려는 사고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맹아적 형태가 1250년에서 1350년 사이의 서유럽에서 나타났다고 보는데, 이는 시계와 항해도, 정량적 기보법, 원근법, 복식부기 등에 대한 폭넓은 고찰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고전적 세계관 - 유서 깊은 모델
그리스 로마적인 것이든 아니면 기독교적인 것이든 고전적 세계관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질적으로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주는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어져 있고, 달 아래의 세계가 가변적인 그래서 불완전한 곳이었던 데 비해 제5원소를 갖는 그 바깥 공간은 질적으로 완벽한 곳이었다. 지구 위의 공간 역시 모두 질적으로 구분된다. 예컨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지상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모든 곳은 이로부터 상대적인 위치를 할당받는다. 시간 역시 그저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으로, 예수의 십자가형 이전과 이후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결국 고전적 세계관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어떠한 단위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금과 아까는, 이곳과 저곳은 고상하든 저속하든 저마다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가 살던 시대의 한 시간이나 지금의 한 시간이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량화/시각화라는 세계관의 혁명
수천 년 지속되던 고전적 세계관은 14세기 무렵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시계의 발명으로 인해 시간이 무수히 작은 단위로 나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무심히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모든 시간의 질적 차이를 집어삼켜 버린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 영향 받은 유럽인들은 경도와 위도라는 그물망을 지구 위에 덮어씌워 모든 공간을 단순히 좌표값을 가지는 균질적 공간으로 정리했다. 또한 인도-아리비아 숫자의 도입, 연산 기호의 사용 등으로 대수학이 가능해져 모든 사고의 수식화가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균질적 단위의 수량화는 세계의 시각화라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는데 정량적 기보법, 원근법, 복식부기 기법 등이 그러한 사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음의 높낮이와 길이가 일정치 않은 데다 사람의 기억력에 전적으로 의지하던 단성률 그레고리안 성가는, 기보법의 발명으로 인해 하나의 음표가 어떤 높이와 지속 시간을 갖는지 (눈으로) 확인이 가능해져 복잡한 폴리포니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중요도에 따라 대상의 크기와 위치가 결정되던 이전의 회화 양식은 투시도법을 활용해 어느 한 순간에 포착된 3차원적 세계를 2차원적 평면에 사실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게 된다. 대차대조표에 의한 복식부기 역시 복잡한 자본의 흐름을 특정 시점에서 간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근대성, 그 근원을 탐사하다
시간과 공간을 선험적 객관형식으로 지목한 칸트의 논의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시공간은 우리의 의식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이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어느 순간에 변화했고 그것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면 이는 근대를 설명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시공간 인식의 변화를 예술과 사상, 자연과학 및 과학기술, 상업 활동 등 여러 분야를 통해 다룬 이 책이야말로 근대성 논의에 깊이 있는 시사점을 던져 준다고 하겠다.
또한 스콜라 철학의 사상사?문화사적 역할, 인쇄술로 인한 읽기 문화의 변화,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고 좌절하는 예술가들의 생애 등이 발랄한 문체로 그려져 있어 읽는 재미 역시 남다르다.
p.s.
나의 객적은 실수로 엊저녁 최 실장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약간은 상기된 어투로, 모 출판평론가가 <수량화혁명>을 대단히 상찬했다는, 그리고 <이미지의 문화사>와 더불어 이 책을 통해 심산출판사을 주목하게 되었다는, 우리가 아직 심산에 남아 있었다면꽤 반가웠을 이야기를 전했다.
아마도 내가작성한 마지막 보도자료가 될 듯한이 쑥스러운 글은, 모든 문장이 다 그렇지만, 쓸 때는 그럴 듯해 보였으나 지금와서 보니 뻑뻑하기 그지 없다.잘 읽히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