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상과 이름에 얽힌 추억, 말글과 나(1)
1.
나는 돌상에서 붓을 집어 들었다. 붓을 든 오른손을 사정없이 흔들어 대고 있는 만 한 살의 내 모습은 그야말로 우습다. 지가 붓이 뭔지나 알고 저러나 싶다. 분명 누군가가 아마 아버지나 어머니이었겠지만, 붓이나 공책을 제일 가까운 곳에 두었을 게다. 아니 아예 손에 쥐어 주었을 수도 있다. 물론 어머니는 여적 내가 붓을 덥석 집어 들었다고 흐뭇해하시지만. 하지만 내 이름 석자를 생각해 보면 돌상에서 붓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은 인위적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2.
내 돌림자는 병(炳)이다. 불화 변이다. 아버지는 식(植)자로 나무목 변을, 할아버지는 홍(洪)자로 물수 변을, 증조할아버지는 흠(欽)자로 쇠금 변을 쓰셨다. 내 아래 항렬은 배(培)자로 흙토 변을 써야 한다. 어느 집안의 돌림자나 마찬가지겠지만, ‘목화토금수’의 오행을 따르고 있다. 성이 집안을, 돌림자가 항렬을 뜻한다면 나머지 한 자가 이름에서는 가장 개인적인 것일 터인데, 나는 나머지 한 자마저 사촌과 그 의미를 나누어가졌다.
한학을 하셨다는 할아버지는 아버지께 ‘문무주공’이라는 네 자를 ‘내려’ 주셨고, 이는 아들을 넷을 낳아 돌림자 옆에 하나씩 붙이라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허나 두 남매만을 두셨고 결국 나는 이 네 자를 사촌들이랑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글월을 밝게 빛낸다는 뜻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돌상에서 붓을 들고 흔들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터.
3.
그러나 허망하게도, 혹은 부모님의 그런 기대와 바람이 무색하게시리 나는 보통의 아이들보다 글을 일년 정도는 늦게 깨쳤다. 국가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게 되는 첫 단계, 그러니까 초등학교 입학 이전에는 대개 한글을 떼기 마련이지만, 나는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꽉꽉 언 학교 운동장에 섰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플라타너스의 우왁스런 매미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도 글이라는 것과 화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보는 받아쓰기 시험은 두세 개라도 맞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얼마 전 유치원도 아닌 어린이집을 졸업한(요즘 아이들은 유치원 이전에도 몇 년씩 양질!의 사교육을 받는단다) 고종사촌 동생이 천자문을 줄줄 읽는 것을 보고 기함을 했다(심술궂게도 몇 구절의 뜻을 물어 보았으나 역시 그건 무리였다. 그러나 옥이 여수에서 나고 금이 곤강에서 난다는, 또 복희와 신농에 얽힌 중국 설화나 신화가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무에 필요할꼬). 한글은 물론이고 영어도, 산수도, 게다가 한자가 이제는 기본인 게다.
가끔 내가 글자를 배울 때를 매우 재밌어하며 회상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다른 애들은 글자를 다 아는데 나만 모른다며 큰일 났다고 호들갑을 떨었다고 한다. (의미심장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세계에서 자기만 소외되어 있다는 느낌은 어린 마음에도 조급증을 불러일으켰을 게다. 지금도 뭔 일이 생기면 남 탓을 하곤 하지만, 그때도 부모님탓을 했다고 한다. 나를 안 가르쳐서 그렇다고 말이다. 그러나 중등학교에서 국어과로 교편생활을 하시던 아버지가 그냥 자식을 마냥 방치했을 리 만무다.
당시로는 최신식 시각자료를 동원했으니, 카세트테이프가 구비된 세계명작동화집이 그것이었다. 지금도 <요셉우화>, <알리바바와 사십인의 도적>, <소공자> 등등을 읽어 주던 성우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다.
그러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어느 날 저도 모르게 (물론 주위 사람들도 모르게) 그냥 글을 깨쳤다고 한다. 어깨너머로 배운 두 살 터울의 동생도(거의 나와 동시에) 한글을 줄줄 읽게 되었고. 하지만 그때 공정상의 몇 부분을 빼먹고 글자 수업을 마쳤는지, 나는 그 후로도 아주 오랜 동안 맞춤법에 맞지 않는 표기를 예사로 했다. 물론 그건 지금도 그렇다. 국문과를 나와 출판사에서 남의 글에 빨간 볼펜으로 볼썽사나운 흔적을 남기는 지금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