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책읽기 외
지지난주 후배 결혼식에 가다가 교보에 들러 [근대의 책읽기, 천정환, 푸른역사], [연애의 시대, 권보드레, 현실문화연구], [갑골문이야기, 김경일, 바다]를 샀다.
[근대의 책읽기]를 약 삼분의 이 정도 읽었다. 일주일 내내 조금만 더 읽으려고 했으나 왠지 손이 가지 않는다. 정전이 정착하고, 전문가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그래서 제법 낙수거리가 많을 부분만 남았는데 손이 가지 않는다.
'묵독이 이단을 낳는다'는 구절이 머릿속에 계속 남는다. 소리내어 읽는, 그리하여 공동체적 독서가 가능했던 전근대의 읽기와, 혼자 내면을 만들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생성해야 하는 근대의 읽기는 정말 다르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말과 글에 대한 인식 자체가 전환되어야 한다.
또 연애편지가 새로운 유행을 형성하던 20-30년대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나는 왜 말과 글에 대한 인식/담론의 전환 과정에서 쓰기 역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는 점을 생각지 못했던 것일까. 읽기 못지않게 쓰기 역시 말과 글에 대한 관념이 변화하는 징표를 보여주는 것이자 그 자체 변화의 중요한 동인이었으리라. 더군다나 내면이 형성되는 글쓰기로써의 문학과 그 세속화(? 대중화?)로써의 편지 쓰기. 또 편지 읽기. 연애편지 만큼 깊이 있게 분석되는 텍스트가 어디에 있을까.
그런 면에서 권보드레의 연애의 시대는 기대가 된다. [한국근대소설의 기원]을 감명(!) 깊게 읽은바 있어 기대가 더 크다.
김경일의 갑골문이야기는 몇 부분 읽지는 않았으나 몇 가지 이유에서 탐탁치가 않다. 책을 억지로 만들었다는 티가 난다. 약간 냉소적인 문체에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툭툭 건드리고만 넘어가는 심사가 궁금하다. 그러나 더 읽어 보아야 할 터.
지난 주말에는 나희덕의 [보랏빛은 어디서 어는가?, 창비]를 샀다.
보랏빛이 보라빛이 아니라는 걸 안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이다. 창작과비평사가 창비로 바뀌고 처음 사는 창비의 책이다. 문학소녀 취향의, 라고 하면 문학소녀들을 너무 깔보는 게 되고 아무튼 그보다 훨씬 문학소녀 취향의 표지다.
문익환 목사의 시를 이야기하는 부분을 들춰 보다가, 주저하던 맘을 얼른 덮고 뭐에 쫓긴 듯 샀다. 그러나 문익환은 면피용이고 아마도 '보랏빛'이라는 제목의 한 단어 때문에 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은 대...실망이다. 서문에서 말하기를 보랏빛은 파랑과 빨강이 만나 이루는 색이란다. 자기의 시는 양 극단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의 결과란다. 그저 심상한 언사려니 생각했는데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두 꼭지를 읽었으나, 하나는 문익환과 서정주, 또 하나는 백석과 서정주다. 무슨 균형일까. 이것이.
그가 시힘의 동인이라는 것을 알고 내심 안심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으나 두 꼭지를 일고 나서는 그가 시힘의 동인이라는 것이 내심 실망스러워지는 건 아직 내가 뭣도 모르는 풋내기일 때문일 터.
(2003.11.21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