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

이미지의 문화사: 역사는 미술과 어떻게 만나는가, 피터버크 지음, 박광식 옮김, 심산문화

pourm 2005. 1. 14. 10:57

역사 서술은 주로 문서자료(그것도 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공적인)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기존의 역사 서술이 대부분 정치사, 경제사, 제도사 등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근래에는 이러한 관행에서 벗어나 심성, 일상, 물질문화, 육체 등과 같은 다양한 영역의 역사를 테마로 삼는 연구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역사 서술의 범위가 넓어지면 자연 채택되는 사료도 다양해지기 마련이다. <이미지의 문화사: 역사는 그림과 어떻게 만나는가>는 역사 서술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사료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도 물론 이미지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문자가 없었던 선사시대의 역사는 당연히 동굴벽화에서 영감을 얻을 수밖에 없었고, 초기 기독교사의 기술에서도 로마의 카타콤에 남아 있는 그림이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20세기 초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나 요한 호이징가 같은 이들은 라파엘로나 판 에이크의 작품에 기초해서 당시의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의 문화를 묘사해 낸 바 있다. 또한 필리프 아리에스는 유년의 역사와 죽음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이미지를 주요한 사료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들은 대개 문서자료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시각자료를 활용해야 했던 경우이거나, 문서자료를 토대로 기술한 내용을 보완?확증하는 역할을 이미지에 떠맡겼던 것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이미지는 문서의 단순한 보조 자료가 아니다. 사안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역사라는 재판정에 출두한 ‘증인’으로서 이미지는 문서보다 더욱 결정적인 ‘증언’을 하기도 한다. 당시의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또는 별로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판단해 문서로 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 주는 것이다. 특히 문자문화와 조우하기 어려웠던 소수자나 타자(여성사, 아동, 이방인 등)의 삶은 이미지를 통하지 않고는 온전히 복원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함부로 증언대에 세웠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이미지는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참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록사진이나 초상화마저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죽음의 순간은 연출되고(그림 4) 시체들마저 작가를 위해 포즈를 취한다(그림 5). 또한 왕의 주걱턱은 깎여 나가고(45쪽), 독재자는 ‘생뚱맞게’ 반바지 차림으로 뛰어 다닌다(그림 28). 이것이 바로 기록사진이고 공식 초상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지와 더불어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역사가들에게는 오히려 이 왜곡 자체가 역사 서술의 중요한 대상이 된다.

칼뱅파가 사용하던 교회에서 가톨릭 전례가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 그림은 실제 그런 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7세기 네덜란드 기독교에 겉보기와는 다르게 가톨릭을 되살리려는 문화적 노력이 끈질기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그림 47). 또 19세기 유럽인들이 그린 이슬람 후궁 그림은 이슬람 궁전의 사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유럽인들이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이 얼마

나, 그리고 어떤 식으로 왜곡되어 있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그림 66)

저자는 이렇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역사 기술에서의 이미지 활용 방법을 이론적으로 모색하는 데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우선 문서사료에 대한 원전 비평이 필요하듯 이미지를 둘러싼 여러 정황을 세밀히 검토해야 함이 지적된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기존의 도상학 및 도상해석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또한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 및 후기구조주의적 방법이 갖고 있는 장단점을 검토하여 최종적으로는 ‘제3의 길’이라는 나름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즉 이미지란 사회적 현실의 직접적 반영도 아니며 사회적 실제와 무관한 기호구조만도 아니어서, 이미지를 사료로 사용하는 사람은 환원주의자가 되어서도, 형식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