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읽기

남해금산, 그리고 버클리풍의 사랑노래(2004.11.3)

pourm 2004. 11. 9. 11:30

버클리풍의 사랑노래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없이.



몇 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를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와 헷갈려,
[뒹구는 돌]을 황동규의 시집이라고 우기다가 낭패를 본일이 있다.
전혀 다른 느낌의 시집이고 시인인데, 아마 /뒹굴다/와 /구르다/의 유사한 이미지 때문이었나 보다.

나중에 나는 이렇게 둘러댔다. '둘은 꽤 헛갈리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둘 다 문지파이고 둘다 서울대 불문과 출신이다(이 말은 거의 동어반복인 셈이라고 중얼거렸다). 둘다 교수고 둘다 사랑에 관한 절창을 갖고 있다.(/남해금산/과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를 떠올렸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시실 둘은 전혀 다르다.
이성복은 말을 다루는 데 잔인하고, 황동규는 자신을 다루는 데 너그럽지 않(았)다.
그리고 이성복의 시는 꺼끌꺼끌하고 황동규의 시는 스산하다.
(나중의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맙소사, 황동규는 불문과가 아니라, 영문과다. 최근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를 다시 들었다가 아차, 했다...)

제일 친한 대학 때 친구 셋,
그 중 하나는 말을 공부한답시고 케임브리지로 떠났고,
또 하나는 정치를 공부한다더니 매우 비정치적인 낯빛으로 연구실에 처박혀 지낸다.
나머지 한 놈은 남해 농협에서 돈다발을 세고 있다.

우리는 대학 때 대개 [남해금산]식의 사랑에 휘둘렸고

또 약간은 그렇게 과장된 감정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
남해금산 보리암에 올라[버클리풍의 사랑노래]를부르고 싶다.
(서울로 올라올때는 농협에 들러 쌀이라도 한 닷말쯤 사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