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 송준의 영화이야기 2000~2004]
송준,심산문화
저널리즘 비평을 위한 변명
모두가 아는 이야기 하나. ‘한국 영화는 중흥기에 있다.’ 올 한 해만 해도 천만 관객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고, 세계 3대 영화제의 감독상을 모조리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투자처를 잃은 자금이 영화판을 기웃거리고 영화 관련 각종 펀드가 조성되고 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 둘. ‘한국 영화는 위기다.’ 영화판은 몇몇 메이저 배급사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고 게다가 이들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분쟁의 와중에 있다. 천만 관객이라는 과실을 따 먹은 건 몇몇 영화에 한정되어 있고, 비주류 저예산 영화는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게다가 스태프들은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대개가 아는 이야기 하나.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와 때맞춰 영화 관련 저널리즘도 전성기를 맞고 있다.’ 모든 일간지가 주말 즈음에 영화 관련 섹션을 마련해 놓고 엄청난 양의 영화 정보들을 쏟아 내고 있으며 영화 전문 잡지도 여러 개가 활황 중이다. 영화 기사와 영화 비평의 경계가 불분명해졌고, 영화 기자가 곧 영화 평론가로 대우받고 있다. 물론 공중파 역시 신작을 중심으로 각종 영화를 분석하고 비교하고 해설해 준다.
대개가 아는 이야기 둘. ‘한국의 영화 비평과 영화 저널리즘은 죽었다.’ 몇몇 비평가들이 고정 칼럼을 맡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영화 비평은 영화 기자들에 의해서 수행된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에 별 차이가 없는, 게다가 기사인지 홍보 문구인지 구분이 안 되는 글들을 관객은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급기야 각종 인터넷 영화 사이트에다 관객들이 직접 올린 솔직한 감상문이 영화를 선택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두가 묻지만 모두가 난감해하는 질문. ‘한국 영화 문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 송준의 영화이야기 2000~2004]는 그러한 질문에 나름의 의견을 제시한다. 건강한 영화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 10여 년 영화 담당 기자로 일했고 현재에도 왕성한 비평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저자의 제언이다. 지금 영화에 쏟아지는 언어들은 대개 경제적 이윤과 물리적 규모라는 상업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으며 거대한 영화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다시피 하다. 때문에 영화 비평이 자본의 논리, 시스템의 논리와는 별개의 ‘독자적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하며, 그것을 획득할 때만이 건강한 영화 담론이 가능하다는 게 이 책의 입장이다.
그리고 저자에게 그 독자적 관점이란 바로 ‘작은 영화, 변방의 이야기, 아웃사이더적 삶’에 대한 옹호이다.
비루한 것들에 대한 옹호
‘선택과 옹호.’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이 추구하고 있는 비평은 결국 이 ‘선택과 옹호’로 요약될 수 있다. ‘어떤 영화를 선택하는가, 그리고 그 영화의 어떤 점을 옹호하는가.’ 이 점을 명확히 할 때만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주례사 비평’을 넘어설 수 있고, 그런 영화 비평이 영화 담론의 주류를 이룰 때만이 ‘다른’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선택하는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또 그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 옹호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저자는 ‘작은 영화’들을 주목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영화들은 대부분 내놓고 흥행을 노래하지 않은 영화들이다. 이렇게 흥행에 목을 매지 않으려니 부득이 저예산 체제로 제작된 것이 많다. 상업적 굴레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바탕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감독 득의의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영화적 표현과 영상 언어들도 검증되지 않은 신선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저자는 ‘변방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인다. 여기서의 변방은 물론 영화적 변방, 즉 비할리우드 영화를 뜻한다. 스페인 영화(<그녀에게>)와 멕시코 영화(<프리다>)를 앞장세운 영화평은, 에스키모인들(<이타나주아>)과 이란의 쿠르드족 사람들이 만든 영화(<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를 거쳐, 영국(<블러디 선데이>, <오! 그레이스>), 프랑스(<아멜리에>, <8명의 여인들>), 호주(<토끼 울타리>), 일본(<자토이치>, <간장선생>, 중국(<투게더>), 그리고 한국 영화(<오아시스>, <와이키키 브라더스>, <올드보이>) 등등과 같은 변방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이렇게 ‘작은 영화’로 만들어진 ‘변방의 이야기’ 속에서 저자는 ‘아웃사이더’들의 삶을 발견하고 그들의 삶에 적극적 연대의 시선을, 떨리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하여 이란/이라크/터키 접경지대에서의 고단한 삶을 녹이기 위해 말에게 술을 먹여야만 했던 어린 쿠르드족 이야기, ‘야만스런’ 원주민들 속에 ‘고결한’ 백인의 피가 섞인 혼혈아를 버려 둘 수 없다는 인종주의자들의 살뜰한 ‘배려’ 덕분에 토끼울타리를 하염없이 걸어야 했던 어느 소녀의 이야기,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을 개선하라는 평화 집회에 참석했다가 난데없이 ‘피의 일요일’을 경험해야 했던 북아일랜드인들의 가슴 아픔 기억, 구걸을 멈추고 단결할 때만이 장미를 얻을 수 있다고 외치는 어느 노동자의 좌충우돌 노조 결성담 …… 등등이 더 이상 우리 삶의 주변에서 서성이거나 배회하지 않고 합당한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를 담은 변방의 작은 영화들. 이 스크린 위의 몸짓과 소리들은 저자의 풍요로운 문체 속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때로는 간결하고 격한 호흡으로, 때로는 나지막하고 기름진 문장으로 자신이 선택한 영화를 옹호하는 38꼭지의 비평은, 저자가 상찬해 마지않는 그 38편의 영화들이 거둔 미학적 성취를 비평 쪽에서 이룬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비평이 어엿한 예술의 한 장르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