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pourm 2004. 9. 4. 15:09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케네스 포메란츠·스티븐 토픽 지음, 박광식 옮김)


‘유럽 중심주의’를 거부한다 -교역사로 본 세계사

우리는 유럽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럽 중심의 역사관을 갖고 있다. 세계사를 은연중에 서양사와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산업화는 자체 동력으로 완성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그들의 자본주의가 전세계로 퍼져나가 현제의 세계경제(Global Economy)를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 책에서 이러한 유럽중심의를 여지없이 혁파한다. 유럽이 세계 경제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일 뿐이고, 그 훨씬 이전부터 중국이나 인도,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의 상업망이 유럽 경제 못지않게, 또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럽인들은 이 네트워크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났던 사람들에 불과하고…….


뿐만 아니라 저자들은 요즘 운위되고 있는 세계화가 그렇게 새삼스러운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이전에는 독자적이고 고립되어 있던 여러 사회가 유럽의 산업혁명을 계기로 비로소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여러 개의 중심을 가진 복잡한 문화간 네트워크가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최소한 1400년대부터는 세계체제가 작동하고 있었고, 이 속에서 각 문화권들이 서로 협력하고 갈등했으며, 혹은 폭력으로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기도 했다(주로 유럽인들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세계사를 바라보는 이 책의 기본 입장이 세계체제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저자들 스스로의 언급(17쪽)을 굳이 지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위에 소개한 저자들의 관점으로부터 최근에 번역 출간된 ?리오리엔트?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리오리엔트?의 저자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이 책(?커피, 설탕, 그리고 폭력?)의 저자 중 한 사람인 포메란츠의 연구를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인용하고 있으며 대체로 그와 입장을 공유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리오리엔트?가 대체로 이론적인 면에 치우쳐 있다면 이 책은 76가지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예화들로 세계경제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크의 책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이민자와 상인, 무역업자와 수액 채취인, 해적과 사략선(약탈을 합법적 허가받은 배) 선장, 발명가와 생산업자, 뱃사람과 노예, 기업가와 기술자, 모험가와 광고주, 가우초(팜파스의 목동)와 구아노(칠레 해안에 쌓여 있던 새들의 배설물) 선적인 등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세계경제라는 무대에서 각자의 배역을 매력적으로 소화하고 있다. 이들에 의해서 거래되는 품목 역시 설탕과 커피, 차, 담배, 코코아, 면화, 감자, 땅콩, 쌀, 비단, 은, 금, 연지벌레, 노예, 무기 등등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지만 모두 세계경제의 일면을 보여주는 데에 빠질 수 없는 중요 소품들이다.

일테면 루이 14가 귀족들과 커피를 마시는 궁정 연회에서도 세계경제는 여지없이 드러난다. 커피는 예멘의 주요한 항구 도시 모카에서 사온 것이고, 여기에 치는 설탕은 아프리카의 상투메 섬이나 남미의 브라질에서 운영되는 노예 플랜테이션에서 생산된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가톨릭 국가의 왕궁에서 음미되던 이 무슬림들의 음료가 중국 도자기에 담아져 있었으니, 세계경제는 이미 일정한 단계에 진입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는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했던, 교역과 관련된 새로운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지금 사용되는 철도 궤간이 왜 로마 시대의 도로 폭과 같게 되었는지, 깡통이 만들어지고 나서 깡통따개가 만들어지기까지 왜 60년이나 되는 긴 시간이 필요했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최초의 주식회사가 사실은 해적질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 표준시가 정해지는 험난한 과정, 타자기 자판이 일부러 느리게 쳐지도록 고안된 사정들도 알려준다.


이와 같이 이 책은 기존의 세계사 서술이 안고 있던 유럽중심주의의 한계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고 명징한 사례들로 세계경제의 형성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대중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 중심의 세계경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폭력을 강조함으로써 현금의 세계화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성찰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