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미답`의 길, 이른바 ‘인문언어’에 대한 잡감

삶읽기 2010. 11. 1. 14:25

1.

최근 ‘특임’ 장관으로 임명된 모 의원의 그 ‘특별한 임무’가 무엇인지, 그것은 아마도 그와 그를 임명한 임명권자만이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 ‘특임’ 중 하나가 개헌이란다. 개헌은 헌법의 일부를 고치는 일이다. 전임 대통령 때에도 권력 구조 개편과 관련하여 개헌 논란이 있었는데, 그때와 같은 소위 ‘원포인트’ 개헌이냐 아니면 차제에 ‘87년 체제’ 자체를 손질하는 수준의 개헌이냐 하는 것 등이 아마도 이번 역시 시빗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아무리 대대적으로 손을 본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이것은 개헌이지, 제헌은 아니다. 기존에 있던 헙법적 질서를 인정하고 이를 수정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라든가, 시장경제라든가, 대의제라든가 하는 점은 아마도 전혀 문제시 되지 않을 것이다. 80년대 중반 학생 운동권의 한 분파 중 ‘제헌의회파’가 있었거니와, 이때의 ‘제헌’이란 것은 삶의 방법과 태도를 결정짓는 모든 사회 시스템을 새로이 합의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배치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꿈을 뜻한다.

2010년 7월 2일(금) 연세대학교 학술정보관 장기원 국제회의실에서는 연세대학교 언어정보연구원 HK 사업단의 주체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복합지식 창출을 위한 인문 자료 구축과 활용의 제 문제”가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였다. 이것만 놓고 보아서는 학술대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다. “복합지식”이나 “인문자료”와 같은 새로운 ‘개념어’들이 나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김하수 원장의 개회사는 자못 의미심장하고 심지어 비장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이번 학술대회를 기점으로 언어정보연구원은 ‘인문언어’라는 개념을 가지고 ‘전인미답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전철(前轍)’을 밟아나가고, 지난날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정보연구원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앞에는 아무 길도 안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온 뒤쪽에는 길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2.

사실 언어학은 그동안 인문학과 소원했다. 인간의 언어를 다루는 학문이 인문적이지 않았다는 말이 매우 이상스레 들릴 수도 있지만, “음 법칙에 예외 없음”이라는 테제로 근대언어학을 연 소장문법학파 이래로 언어학은 인간을 배재해 왔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한 말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언어학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러한 언어 외적 요소와 무관한 언어의 내적 법칙이었다.

예컨대 소쉬르는 그의 ‘일반언어학강의’에서 실제 발화와 관련되는 파롤적인 것을 (일반)언어학의 대상에서 제외하고자 무진 노력하고 있다. 그가 언어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발화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추상적인 수준의 체계(system), 즉 랑그였다. 이 랑그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계급적인, 성적인, 지역적인 변이들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규칙, 즉 언어의 내적 법칙인 것이다. 따라서 언어학은 그리고 그 언어학이 다루는 대상인 언어는, 처음부터 ‘인간의 무늬’[人文]와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인간의 무늬’가 제거된 순수 언어만이 논의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문언어학”이라니! 근대 언어학의 기본 토대를 꼼꼼히 따져 본다면 이 말은 분명 형용 모순에 가깝다. 언어학이라는 근대적 학문을 건설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던 작업이 바로 언어 외적인 것, 언어에 들러붙은 온갖 잡스러운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면, ‘인문언어학’은 오히려 언어와 뒤섞여 있던 지저분하고 통제 불능의 그 무엇인가들을 다시 꺼내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하수 원장의 ‘전인미답’이란 표현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눈앞에는 어떠한 길도 없다. 뿐만 아니라, 출입금지의 팻말까지 걸려 있다. 근대 언어학이 금지의 영역으로 금줄을 쳐놨던 곳, 거기로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언어를 설명하기 위해 상식처럼 통용되던 각종 개념이나 방법론을 재검토하겠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새로운 담론을 형성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담론을 생산, 유포하던 각종 물질적 장치, 특히 대학 제도와 갈등을 잃으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소장문법학파가 그들의 선배인 문헌학과의 대결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학문적 태도와 방법 및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배치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는 쉽지 않은 일이다.

비유하자면, 개헌이 아니라, 제헌적 상황인 것이다.

3.

물론 언어정보원의 이러한 포부가 어느 정도까지 실현될는지는 알 수 없다. 이날 학술대회의 발표들에서도 ‘전인미답’의 길을 어떻게 걸어가겠다는 것인지 그 계획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고,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는 데 치중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예컨대 “한국어교육학 연구의 최신 동향 및 전망”(강현화, 연세대), “사회언어학과 담화 연구 방법론의 이해”(박용한, 해군사관학교), “구어와 문어 문법 연구의 현황과 전망”(장경현, 서울대) 등은 모두 기존의 언어학 테두리에서 다루어지던 것들의 정리이다. “풍속 문화론적 개념어 연구의 현황과 과제”(김지영, 한림대), “개량적 텍스트 분석의 현황과 과제”(이재윤, 경기대) 정도가 기존의 언어 연구에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제 첫걸음이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에서의 첫걸음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인문언어학’이라는 구호가, 단지 국가의 눈먼 돈을 노린 하고 많은 프로젝트의 보고서 제목으로 남을지, 아니면 김하수 원장이 지난 <한국어+> 4호의 ‘여는말’에서 언급한 ‘잃어버린 가치’를 찾는 하나의 시발점이 될는지는 향후 10년간 지속될 언어정보연구원의 여러 연구 성과를 통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연세대 언어정보연구원 웹진 <한국어+>5호

http://web.yonsei.ac.kr/ilis/webzine/ebook_05/ebook10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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