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장치란 무엇인가?>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

책일기 2024. 3. 2. 18:52

1. 
2월부터 읽고 있는 책들
녹색평론 184호, 2023년 겨울호
김덕영,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 길, 2007
조르조 아감멘, 장치란 무엇인가, 난장, 2010
민태기,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위즈덤하우스, 2023
최정운, 한국인의 탄생, 미지북스, 2013
장기영, 보란듯한 몸, 초과되는 말들: 베리어컨셔스 공연, 이안재, 2023

2.
<녹색평론>을 다시, 읽다.
김종철 선생의 돌아간 뒤에 왠지 <녹색평론>을 잘 읽지 않게 되었다. 
걸려 오는 전화에 응원의 말들을 엊어드리기는 했으나, 왠지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가끔씩 펼쳐 들어도, 오히려 김종철 선생이 만들던 때와 너무 똑같아, 예컨대 권두언의 문체마저 그대로라서 책장을 덮었던 적도 있다.
마음 먹고 다 늦은 겨울호를, 그렇다 이제 계간지가 된 <녹색평론> 겨울호를 펴들었다.
여전히 내 삶을 아프게 돌아보게 하는 글들과 현 정세를 넓은 안목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글, 
그리고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대한 성찰을 담은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 새로운 삶의 형태와 공존의 모습을 구체적인 일상으로 그리는 문장에 눈길을 멈추었다. 
마지막 광고란에서, 원주지역 독자모임을 제안합니다, 라는 문구를 읽고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설렜다. 

3.
조르조 아감멘의 <장치란 무엇인가?>.  
김진해 선생의 글을 읽다가 만난 책. 푸코의 담론 형성체 개념을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다. 
<말과 사물>에서 담론 외적 요소를 완전히 도외시 했던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비담론적 요소를 도입한다. 그리고 <감시와 처벌>에서부터  규율 사회, 지식과 권력이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게 된다.
예컨대 근대적인 형법학이라는 담론은 감옥이라는 비담론적 요소와 결합하여 근대적인 죄-처벌의 개념을 형성하고 또 근대적인 의미의 수감자, 죄인을 생산한다.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정신의학이라는 담론은 정신병원이라는 비담론적 요소와 결합하여 근대적인 정신병의 개념(의학적 치료의 대상인 병증으로서의 광기)을 형성하고 또 근대적인 의미의 정신질환자를 생산한다.
장치로서의 한국어학, 한국학이 결합하는 것은 어떤 비담론적 요소이며, 그렇게 해서 작동하게 되는 장치는 어떤 근대적 개념과 주체를 생산하는가?
무언가 생각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4.
김덕영의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
김덕영의 글은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계발되는 바가 크다.
특히 이 책에서는 게오르그 짐멜과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이들을 통해 짐멜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니체(노예의 도덕=근대 비판)와 베버(탈주술화, 과학, 합리성으로서의 근대)의 사이에 있다는 짐멜의 위치가 흥미로웠고,
자연과학적 요소가 강한 칸트의 철학을 상징체계에 적용한 카시러 등의 신칸트학파와의 대조를 통해서도 새롭게 알게된 바가 많았다.
다만, 짐멜의 가치이론을 한계효용학파의 그것에 가깝다고 하면서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본 고전경제학과 대조한 것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상대주의(한계효용학파)와 절대주의(아담 스미스, 맑스)의 대립 구도를 세운 것인데,
맑스의 정치경제학에서 '가치'는 단순히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도 아니다. 
노동도 상품의 가치도 모두 사회=시장에서의 교환에 의해서 비로소 결정되는 것이다. 소쉬르의 랑그가 그렇듯이. 사용가치와 구체노동, 그리고 파롤이 아니라, 시장에서의 교환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가치, 즉 교환가치와 추상노동, 그리고 랑그만이 정치경제학/일반언어학의 진정한 대상이 될 수 있는 것. 가라타지 고진은 정치경제학의 이런 특성에 대해 쇼펜하우어를 빗대어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정치경제학, 인류학, 언어학에서의 가치 이론. 맑스와 마르셀 모스(혹은 칼 폴라니), 그리고 소쉬르. 이들의 상관관계는 내게 여전히 해명의 대상이다. 
(2024.03.29)

조국은 나의 사표

삶읽기 2024. 2. 3. 19:17

조국은 나의 사표(師表)!
사람들은 조국 전 장관, 수석, 교수를 사법개혁의 화신이라고도 하고
천하의 인간 쓰레기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는 평험한 시민이었다. 우리의 평균적 욕망이 투여된.
명백한 불법이나 사기가 아니라면 수익율 좋은 투자처에다가 돈을 굴려서 강남에 건물을 사고 싶었다. 너나 없이 그렇듯이.
어떻게든 내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좋은 직장에 보내고 싶은 아버지였다. 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거기다가 사회의식이 넘쳐나서 보수꼴통들의 몹쓸짓을 언제나 준엄하게 심판하는 민주인사였다. 게다가 그는 이름도 무시무시한 '사노맹'의 맹원이었다지 않은가.

아마 누군가 이명박을 꿈꾸었다면, 나는 조국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말도 할 수 없이, 너무나도 멋진.
그리하여 그는 나의 사표다.

이름하야 '조국 사태' 뒤에,
나는 먼저 입바른 소리를 삼가기로 했다.
그 무슨 민주인사라도 되는양 사회 문제에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싶을 땐, 조국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내 자식을 통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되돌아 본다.
아마 아비로서의 바람이나 욕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그때마다 조국은 나의 사표가 되어줄 것이다.
은행잔고와 아파트 전세가의 등락에 여전히 전전긍긍할 터이지만, 전단지에 실려오는 교외의 목좋은 부동산 소식에 흔들릴 때면 조국을 되돌아보리라.

법과 원치, 정의의 화신 윤석열은 도무지 내 삶과는 무관한 이다.
우주 끝까지 쫓아가 악당을 무찌르는 그는 방금 만화영화를 찣고 우리 앞에 나선 정의의 용사이다.
그가 물리친 박근혜와 이명박, 그리고 이제 그가 거꾸러트리기로 작정한 문재인의 구별은 그에게 무의미하다. (미완)
(2020.12.8)

<하이데거 극장>, <휘어진 시대>

책일기 2024. 2. 3. 16:25

1.
한달에 한번 정도 "책일기 삶읽기"를 쓰도록 한다.

지난 연말부터 새벽 시간이나 잠자기 전 짬을 내 세 종의 책을 읽고 있다.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1,2, 한길사, 2023
남영, <휘어진 시대>1,2,3, 궁리, 2023
박희병, <한국고전문학사 강의>1,2,3, 돌베개, 2023

연말 연초 대학원생들과 세미나에서 읽은 책
개리 거팅, <미셸 푸꼬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 훙은영 박상우 옮김, 백의, 1999

주시경의 저작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채로 <주시경전서> 3권에 수록된 <고등국어문전>의 정체를 (비로소 이제야!) 파악하기 위해 1908~1910년 사이에 발표된, <국어문전음학>, <국문연구>, <국어문법>의 내용과 교차 검토 중. 


2.
<하이데거 극장>을 시작한 것은 12월 초인 듯.
자브란스키의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를 읽다가 그의 장광설에 질려 버린 경험에 반신반의. 
한겨레 신문에서 읽던 고명섭의 글은 언제나 미적지극한 느낌이었기에 역시 반신반의.
그러나 하이데거의 거의 전 저작을 차례로 읽어주는 그의 진중함과 성실함에 감탄함.
후설 현상학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딜타이의 해석학, 신학생 시절의 신학에 이르까지 그의 사상에 녹아든 당대의 지적 흐름을 상세히 설명.
야스퍼스와의 관계, 한나 아렌트와의 밀회, 카시러와의 다보스 결투 등도 흥미있게 펼쳐진다.
물론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 취임과 더불어 시작되는 독일국가사회주의당과의 관계, 유대인에 대한 그의 발언 역시 가감없이 복원한다. 하이데거를 변호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좀 안쓰럽기는 하지만.
2권 중반 정도까지 읽다가 한쪽으로 치워놓은 상태. 
제2차 세계대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치와 결별한 하이데거는, 그러나 여전히 독일민족을 근대가 망쳐놓은 세계사를 구원할 현존재로 굳게 믿고 있다.

3.
하이데거 극장>과 함께 사 두었던 <휘어진 시대>를 읽기 시작한 것은 부산출장을 앞두고서이다.
이거라도 읽으면 1박 2일 출장이 마냥 헛되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 가기전에 1권을 마치고 2권을 기찻간에서 읽으려 했으나, 출장길에 겨우 1권을 다 읽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부의 '과학혁명'을 다룬다. 물론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원자폭탄이 주요 주제.
그러나 전제적인 얼개로 보았을 때 주인공은 양자역학. 1권은 양자역학이 나오기 위한 이론적 배경, 2권은 양자역학의 탄생, 3권은 양자역학과 전쟁,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비극적 결말.
유럽 각국의 물리학자, 수학자, 화학자들을 종횡무진 탐사하는 저자의 이야기 솜씨에 혀를 내두름.
영국의 톰슨/레더퍼드, 독일의 막스 프랑크/아인슈타인(베르린)과 힐베르트(괴팅겐), 프랑스의 퀴리 부부과 랑주뱅(이상은 1권의 주요 인물), 그리고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슈레딩거....
현대 물리학의 혁명적 변화를 내 초보적인 과학 지식으로는 따라가기 버거웠지만, 치열한 토론과 경쟁, 연대감으로 형성되는 과학자들의 공동체, 그리고 양차 대전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상세한 묘사/설명은 당시의 분위기를 어려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게 한다.     
진리를 찾아가는 그들의 뜨거운 의지, 연대의식이 전쟁 앞에서 여지없이 조국애로 수렴되어 갈갈이 찢겨 나가는 모습은 그런 면에서 더욱 씁쓸하다. 
2권 중반부를 읽고 있음.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세상에 내놓을 찰라.


4.
일반 상대성 이론은 물론이거니와 방사선의 발견으로부터 시작하여 원자론을 거쳐 양자역학의 성립에 이르는 길은 말할 것도 없이 고전 물리학의 붕괴를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이론은 뉴턴 역학을 완전히 대체한다. 질량을 가진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는 가정 대신, 질량을 가진 물체의 주위가 휘어져 버린다는 아이디어를 통해 우주의 운행을 설명한다는 것의 의미. 행성은 인력 때문에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직선 운동하고 있지만, 태양의 중력장 안에서 공간이 휘어져 있기 때문에 회전하는 것일 뿐이다. 
중력장은 물론 자기장과 전기장에서 받은 영감에 의한 것이다. 무질서하게 놓여 있던 쇳가루가 자석의 주위로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는 놀라운 이미지를 우리는 모두 갖고 있다. 부르디외를 비롯한 사회과학의 장 이론 역시 중력장이라는 개념과 무관치 않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사회적) 힘에 의해 형성된 중력장 안에서 그 중력장이 허락한 형태로 말하고 행동할 뿐이라는 것
무엇보다 특수상대성 이론과 일반상대성 이론은 뉴턴의 시공간 개념, 따라서 칸트의 철학적 세계관, 유크리드 기하학을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조건 하에서만 실현되는 제한적인 것으로 보게 다. 
아인슈타인은 끝내 인정하지 않았지만,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제출된 양자역학은 더욱 근본적이다. 추체에 의한 관찰 대상의 간섭. 관찰자의 관찰과 무관하게 대상은 거기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거기에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확률상으로 계산해 낼 수 있을 뿐, 전자의 명확한 위치와 운동량(질량*속도)은 알 수 없다. 운동량을 알려하면 위치가 모호해지고 정확한 위치를 알려면 운동량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 기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불확실성 원리의 기본 가정이다. 
관찰 행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바로 이러한 양자역학의 세계관을 비판하기 위해 제기된 유명한 사고 실험이다.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상자를 열러 보는 관찰자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바로 그 시대에 유사한 공간에서 제출된 하이데거의 철학은 어떠한가?
그가 추구한 존재의 진리는 '세계-내-존재'인 현존재에서 비로소 개시(開示), 즉 열려 보여진다.
여기서 주체와 대상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진리란 대상과의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의 진리론은 전형적인 주체 철학인 것이 아닐까?
현존재, 즉 인간에게 존재의 진리가 드러나는 사태는, 예컨대 죽음이라는 현사실성 앞에선 현존재의 결단, 기투에 의해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현재를 살아가는 세인의 공공성에서 벗어나는 순간 역시 바로 그때이다.
더구나 1930년대 현존재가 개인에서 도약하여 (게르만) 민족으로 화하는 장면을 읽는 것은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는 비슷한 시기 식민지 조선의 지식이 정인보가 기본적으로 개인이라는 단위에서 논의될 수 있는 '양지(良知)'를 겨레의 '얼'이라는 개념으로 도약하는 장면과 겹친다. 이런 과정은 사실 신채호와 박은식이 국수, 국혼이라는 개념을 제출하는 것과 근본적으로는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양지가 그렇듯이 혼백의 혼은 당연히 개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양지와, 혼, 그리고 현존재가 네이션과 결합하는 대목은 징후적인 현상으로 읽힌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물론 근대 극복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합리, 이성, 과학, 탈주술화에 대한 그의 비판 자체가 18세기 낭만주의에 젖줄을 대고 있는, 근대성의 또 다른 면모는 아닐까. 근대의 극복을 논하는 과정에서 동원되는 하이데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후기 하이데거가 거듭 다루는 훨덜린을 빼놓고 18세기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지젝은 하이데거의 철학을 나치즘에 바로 연결시키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내재한 어떤 점이 나치즘과 친연관계에 있었는가 하는 분석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철학적 과제일 터.
이는 교토학파의 근대초극론을 검토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사항일 것.


5.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한 일은 결국 근대 비판일지도 모른다.
그는 근대철학이 주체의 경험과 선험, 코기토와 비사유, 존재의 근원으로의 회귀와 되돌아옴을 진자처럼 반복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가 반과학이라고 보았던 탈주체의 정신분석과 문화인류학이 과연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얼마나 온전히 정초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서 보았을 때 하이데거의 철학이 근대의 에피스테메 안에 놓여 있는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푸코가 바랐던 것처럼 근대의 에피스테메를 넘어서기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분명할 터. 다만 언어에 대한 그 새로운 이론은 더 이상 언어학이 어닐 것이다. 그것은 '의미'와 '사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룰줄 아는 새로운 담론일 것이다.

(202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