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중얼거리기 6

국제고려학회 토론문(2026.6.20.)

국제고려학회 서울 지부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공동학술대회 토론문 해방과 거의 동시적으로 분단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해방 80년은 동시에 분단 80년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남쪽의 한국학과 북쪽의 조선학이 각자의 체계를 구축해 온 시간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학술 사상은 각자의 체제와 연동된 것이었기에 여전히 서로에게 불온한, 금지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대의 텍스트를 불허한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번역과 같은 매개 없이도) 즉각적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는 물론 서로의 ‘동질성’을 담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동질성’에의 과도한 집착이 오히려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잘 ..

별로 다르다? 별로 다양하다!

별로 다르다? 별로 다양하다! “우리 지내 늦은 거 아닙니까?”평양에서 공동회의를 할 때의 일입니다. 7~8개조로 나누어 남북 각 측이 집필해 온 원고를 하나하나 합의해 나가다 보면 서로 견해가 달라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얼굴이 붉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쉬는 시간을 갖는 것이 상책입니다. 잠시 쉬었다 하자는 저의 제안에 북측 참가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쑥 내뱉은 말이 바로 위의 말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네?”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고 돌아온 대답 역시 알쏭달쏭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허 참, 지내 늦다니까요.” 지내>라는 말에 대해 《조선말대사전》에서는 “너무 지나치게”라고 뜻풀이하고 있고,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너무>의 비규범어로 ..

돌상과 이름에 얽힌 추억, 말글과 나(1)

1. 나는 돌상에서 붓을 집어 들었다. 붓을 든 오른손을 사정없이 흔들어 대고 있는 만 한 살의 내 모습은 그야말로 우습다. 지가 붓이 뭔지나 알고 저러나 싶다. 분명 누군가가 아마 아버지나 어머니이었겠지만, 붓이나 공책을 제일 가까운 곳에 두었을 게다. 아니 아예 손에 쥐어 주었을 수도 있다. 물론 어머니는 여적 내가 붓을 덥석 집어 들었다고 흐뭇해하시지만. 하지만 내 이름 석자를 생각해 보면 돌상에서 붓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은 인위적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2. 내 돌림자는 병(炳)이다. 불화 변이다. 아버지는 식(植)자로 나무목 변을, 할아버지는 홍(洪)자로 물수 변을, 증조할아버지는 흠(欽)자로 쇠금 변을 쓰셨다. 내 아래 항렬은 배(培)자로 흙토 변을 써야 한다. 어느 ..

한글날 아침에...딸기와 깍두기, 그리고 한글과 우리말

한 육칠 년 전에 삐삐밴드라는, 요즘 말로 엽기적인 밴드가 있었습니다. 여성 보컬의 독특한 창법과 기발한 가사가 한동안 장안의 화제였지요. 그 밴드의 1집 앨범 '문화혁명'(!) 중에는 '딸기가 좋아 딸기가 좋아. 좋아좋아 좋아좋아…' 하고 소리를 지르는 건지 노래를 부르는 건지, 듣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저는 그 '딸기'라는 노래만 들으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한 가지 떠오르곤 합니다. 저희 집이 충북 제원군(현재는 제천시) 백운면에서 충주라는 실로 엄청난 대도시로 이사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니까 여섯 살 전후의 일인가 봅니다. 초여름의 햇볕이 빼뚜름히 내리 쬐는 어느 날 오후, 저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꼭 붙잡고 공설시장에 장을 보러 갔었습니다. ..

맞춤법에 대한 이해 2. 세목 1) 용법에 따른 구별

2. 맞춤법에 대한 이해1) 용법에 따라 구별해서 표기해야 하는 것여기에서 설명되는 것은 그 자체로는 틀린 것이 아니지만 어디에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잘못된 것이 될 수도, 옳은 것이 될 수도 있는 표기들이다. 까다로워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말 구조 등을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올바른 표기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돼’는 ‘되어’의 준말. 따라서 어미 ‘-어’가 어간 ‘되-’에 연결되어야 할 곳에서는 ‘돼’로,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되’로 써야 한다. 그런데 이 둘의 발음을 구별하기가 어렵고, 또 ‘돼’가 ‘되어’로 되돌아가기 어색할 정도로 굳어진 것들이 많아서 제대로 쓰기가 쉽지는 않다. 이럴 때는 다른 용언으로 대치시켜 보면 (‘하다’가 제일 적당한 듯) ‘-어’가 필요한지 그렇지 않은지 곧 알..

맞춤법에 대한 개괄적 이해를 위해 1. 총론

다음의 글은 제가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작성한 일종의 보고서입니다.몇 회에 걸쳐 나눠 싣겠습니다.----------------------------------------■ 맞춤법 규정에 대한 개괄적 이해를 위해1. 총론에 대한 이해 표준어는 여러 방언(사투리) 중에서 하나의 방언(우리는 서울 방언)을 선택해 표준으로 정한 것인 데 반해, 맞춤법 규정은 이 선택된 표준어를 어떻게 적을 것인가를 정한 규범이다. 따라서 표준어가 아닌 방언은 원칙적으로 표기법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러므로 아래의 두 표기 중 무엇이 맞춤법 규정에 맞는가 하는 고민은 불필요한 것이다. # 고마 해라. 마이 무가따 아이가. # 고만 해라. 만이 묵았다 아이가.한글은 소리글자이다. 따라서 그 표기법도 기본적으로 소리를 반영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