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늦은 통일을 가장 멋진 통일로" - <겨레말큰사전>의 사회언어학적 의미에 대하여

밥벌이 2015. 11. 8. 04:18

 

1.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 작가 라신은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자신의 불어가 통하지 않는다며 ‘마치 모스크바 사람이 파리에 온 것처럼 통역이 필요하다’고 그 고통을 호소한 바 있다. 요강을 달라니 풍로를 가져다주고 못 200~300개를 이야기했더니 성냥 세 갑을 내밀더라는 것인데, 그로부터 1세기 뒤인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아서 2,500만의 프랑스 인구 가운데 ‘국어’(langue nationale)로 말하는 사람은 300만에 불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실 근대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현재의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가 사용되는 지역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고 속 라틴어에서 기원하는 이들 로만스 제어의 연속체가 넓게 분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적 현실과는 별개로 ‘균질적인 단일 언어 사회’를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이에 도달하려고 애쓴 국가와 민간의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도와 장치, 관습과 감각 등이 바로 ‘언어적 근대’를 이루는 것들이었다고 하겠다.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즉 ‘민족=국가=언어’라는 이 이상은 그러나 대단히 의식적인 실천이 개입되지 않고는 결코 달성될 수 없는 것이거니와(국가가 강력한 정책으로 추진한 예로는 프랑스가, 민간이 열정적인 운동의 형태로 전개한 예로는 독일이 대표적이다), 그 실천의 결과 역시 매우 불완전하다. 예컨대 스페인에서는 스페인어(카스티야어) 외에도 여전히 카탈루냐어와 갈리시아어라는 같은 계통의 소수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전혀 계통이 다른 바스크어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랑스 역시 지역에 따라 프로방스어(오크어), 브르타뉴어, 바스크어, 알자스어(알레만어) 등의 소수어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스코트어 외에도 영어와는 계통이 전혀 다른 게일어, 콘월어, 웨일스어 등과 같은 켈트어 계통의 소수어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

‘단일 언어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다른 나라의 이런 사례들이 신기할 수 있지만, 그러나 오히려 하나의 국가가 ‘단일 언어 사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적 근대’는 어찌 보면 유례없이 손쉽고 간단히 달성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19세기말 드디어 ‘국문’으로 격상된 우리 글은 자주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이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으로 보였고 유길준, 지석영, 주시경, 최남선과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은 ‘국문’의 올바른 사용법과 새로운 문체에 대해 고민했다. 1907~1909년에 활동한 국문연구소의 연구보고서 ‘국문연구의정안’은 개화기 이래의 여러 고뇌가 모여 거둔 중요한 결과였다. 물론 정서법의 통일, 문법과 사전의 완성이 ‘언어적 근대’를 이루는 최소한의 기본 요건이라면 아직 갈 길은 멀었다. 그러나 주시경의 <국어문법>이 1910년에 출판되었고, 결국은 빛을 보지 못했지만 주시경과 최남선이 의기투합하여 벌인 조선광문회에서의 ‘국어사전 프로젝트’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역사의 시간표는 야속하기만 하다.

 

식민지 시기 내내 ‘비국민’의 신분으로서 우리가 강요당한 ‘국어’는 ‘조선어’가 아니라 ‘일본어’였으며 ‘조선어’는 그 ‘국어’의 지방어였을 뿐이다. 그러나 30년대 후반 이후 이른바 ‘조선어 말살 정책’이 진행되기 전까지 총독부는 ‘조선어’를 근대적인 눈으로 관리해왔다. 총독부가 설립되자마자 시행했던 정책 가운데 하나가 ‘구관제도조사사업’이었고 그 결과물로 나온 것 중에는 <조선어사전>도 있었다. 같은 시기 광문회에서 작업하던 <말모이>라는 우리 사전이 원고 뭉치로만 이리저리 전전하고 이후 조선어학회의 <큰사전>으로도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어의 표기법을 먼저 정비한 것도 총독부였다. 1912년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제정한 이래 1921년과 1930년 두 차례 개정하게 되는데, 1930년의 ‘언문철자법’은 조선어학회 인사들도 개정 과정에 다수 참여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표기법에 상당히 근접하게 된다. ‘언어적 근대’의 문제에도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 개입될 여지가 생기는 대목이다.

 

물론 20년대 후반과 30년대에는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한 조선어사전편찬 운동, 그리고 맞춤법통일 운동이 대단한 호응 속에서 전개된다. 그 결과 1933년에 ‘맞춤법 통일안’이 발표되고 그에 맞춘 사전편찬 작업도 착착 진행된다. 그러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인해 관련 인사들이 대거 투옥된 데다 그 사전 원고마저 압수를 당하게 되어 해방 이후에야 출판이 되는데, 이 <큰사전>이 완간된 것은 남과 북이 분단된 뒤인 1957년이다. 그리고 북에서는 1962년 <조선말사전>을 펴낸다. 물론 이때는 이미 서로의 표기법이 달라진 뒤였다. 조선광문회의 <말모이> 작업이 실패한 이후 이 땅의 전 지역을 포괄하는 ‘국어사전’은 따라서 여전히 미완인 셈이다. 표기법의 통일 문제 역시 그렇다. 근대가 여전히 성취의 대상인지, 이제는 극복의 대상인지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민족국가 수립이 근대를 구성하는 요건 가운데 하나라면 여전히 우리에게 근대가 미완의 과제인 것처럼, ‘언어적 근대’라는 숙제 역시 우리는 온전히 풀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남과 북의 언어를 이야기하면 으레 등장하는 것이 언어 이질화 문제이다. 물론 남에서 쓰는 말과 북에서 쓰는 말은 다르다. 그러나 서울말과 부산말이 다르고 1910년대의 말과 2010년대의 말이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이를 두고 우리는 ‘이질화’ 운운하지 않는다. ‘남북의 언어 이질화’라는 표현은 현상을 무덤덤하게 기술하기보다는 대개 이를 하루빨리 해소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주장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이러한 다름이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다름의 책임을 다른 한쪽(일당 독재의 봉건 세습 왕조, 또는 친미 예속의 저질 자본주의)에 일방적으로 전가시키려고 하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서울말과 부산말의 차이, 그리고 100년 전의 말과 지금의 말이 다른 것이 사회와 제도의 문제를 떠난 완전히 ‘자연적’인 현상인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남북의 언어 차이를 유독 사회와 제도, 체제에서 비롯된 것으로만 돌려야 하는지 역시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방언적인 차이와 세월의 흐름에 의한 언어 변화를 제외한다면 남북이 채택한 체제의 문제는 의외로 ‘이질화’의 큰 요인이 못 되는 것일 수 있다.

 

필자가 속해 있는 겨레말큰사전편찬사업회의 일로 평양에서 회의를 할 때의 일이다. 사회과학원 소속의 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것을 듣고 “아, 장용남 선생님이시라구요.” 했더니 상대는 “아니요, 장용남입니다.” 한다. 그래서 “아, 네. 장용남 선생님이요.” 하니 다시 “아닙니다. 장. 용. 남. 입니다.” 한다. 이 웃지 못 할 해프닝은 결국 그가 연필로 자신의 이름을 ‘장영남’이라고 적어주고서야 끝이 났다. 평양말은 ‘어’와 ‘오’의 간격이 서울말보다 가까워 우리로서는 잘 구별이 되지는 않는다. 필자가 매우 무안해하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일 없습니다. 개성 사람들도 선생과 꼭같이 잘 못 알아듣습니다.” 한다. 개성은 방언 구획상 서울, 충청, 강원 등과 더불어 중부 방원권에 속하는 지역이다. 북은 ‘미 제국주의에 오염된 잡탕말’ 서울말 대신 평양말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문화어’를 제정해 보급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말은 ‘잡탕말’인 서울말과 같은 음운 체계를 견지하고 있는 셈이다. 남에서 역시 서울말 중심의 ‘표준어’을 보급한 지 한참이지만 동남(경상도) 방언 화자들은 여전히 ‘으’와 ‘어’를 구별해 발음하는 데 힘들어 하고 서남(전라도) 방언 화자들 역시 ‘민주주의의 의의’를 발음할 때면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음운과 문법의 체계는 강고해 어지간해서는 체제의 간섭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4.

물론 문제는 어휘이다. 그러나 어휘상의 차이 역시 분단 이전부터 있던, 즉 분단과 무관한 지역적 차이가 꽤 있다. 예컨대 남의 <표준국어대사전>은 ‘게사니’라는 올림말에 대해 ‘거위의 북한어’라고 풀이하고 있다. 즉 북에서는 우리가 ‘거위’라고 일컫는 것을 ‘게사니’라고 하는데 이는 물론 단순한 방언적 차이일 뿐이다 ‘도루래’와 ‘땅강아지’, ‘망돌’과 ‘맷돌’도 그런 유이다. 우리가 ‘오징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이 ‘낙지’라고 한다는 사실이나 북에서는 ‘나비’와 ‘나방’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나비’라고 한다는 것도 체제와는 무관한 방언적인 차이일 뿐이다. 남쪽에서도 지역에 따라 ‘솔’과 ‘정구지’, ‘부추’란 말을 쓰듯이, 그리고 서울에서 ‘고구마’라고 하는 것을 남부 지역에서는 ‘감자, 감저’라고 하듯이 말이다. 물론 분단 이후에 생긴 차이들도 꽤 많기는 하다. 예컨대 남측에서는 ‘극장’에서 영화도 연극도 관람이 가능하지만 북측에서는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고 ‘극장’에서는 연극이나 가극 같은 것만을 관람하다. 또 우리가 ‘조연출’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저쪽에서는 ‘부연출’이라고 하는 듯하다. ‘대상, 대상자’란 말에 ‘결혼할 사람’이라는 새로운 뜻이 생긴 것도 흥미롭다.(“저는 외국에 가 대상을 찾고 가정을 이루어 편히 살겠어요!”) 그러나 이러한 어휘적 차이 역시 체제의 차이와는 무관하다. 어느 한쪽에서 인위적으로 말에 손을 대서 생긴 변화도 아니다.

 

그러나 예컨대 콜라나 사이다 같은 ‘청량음료’를 ‘단물’로, ‘분유’를 ‘가루젖’으로 다듬은 것은 경우가 다르다. 이런 예는 분명히 인위적인 노력의 결과인데, 특히 북의 ‘말다듬기’는 60년대 후반 이후의 정치적 상황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나온 사전을 보면 기존의 ‘다듬은말’들을 다시 외래어로 되돌린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얼음보숭이’가 사라지고 ‘아이스크림’이 다시 사전에 오른 게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 다듬기’는 북에서만 한 게 아니라 남에서도 꽤 열심히 그리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 작업이다. 예컨대 예전에 ‘제형(梯形)’으로 쓰던 말을 우리는 ‘사다리꼴’로 ‘순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북은 아직도 ‘제형’이다. ‘분유’를 ‘가루젖’으로 다듬어 생긴 이질화 책임을 북에 돌린다면, ‘제형’을 ‘사디리꼴’로 순화해 생긴 이질화 책임은 남이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휘상의 차이 역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물론 분단의 상황이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 서로 ‘다른 언어’가 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상호 교류가 이어지고, 한쪽의 어휘들을 ‘박멸’의 대상으로 삼는 대신 짝을 이루는 어휘들을 동의어 또는 유의어로 인정한다면, 오히려 우리말의 어휘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긍정적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들 양쪽 어휘에 공식적으로 모두 시민권을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전이다.

 

5.

사실 남과 북의 말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표기법의 차이 때문일지 모른다. 북의 ‘로동’을 우리는 ‘노동’으로 적는다. 북에서는 ‘시내가, 나무잎’이라고 쓰지만, 남에서는 물론 ‘시냇가, 나뭇잎’이다. 북의 ‘나무군’과 남의 ‘나무꾼’도 그렇다. 무엇이 옳은가, 또는 무엇으로 통일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논하기 전에 왜 이러한 차이가 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우리는 ‘읽는다, 앞문, 학교’ 등으로 적지만 실제 발음은 ‘잉는다, 암문, 학꾜’로 한다. 그렇다면 왜 ‘잉는다, 암문, 학꾜’로 소리내면서 ‘읽는다, 앞문, 학교’라고 적는 것일까? 이는 ‘잉는다, 익꼬, 일거’와 같이 소리에 따라 제각각 적는 것보다는 원래의 형태(‘읽-’)를 고정시켜 주는 것이 글을 읽는데(특히 눈으로 읽는 묵독의 경우) 여러모로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컨대 ‘묻다[問]’와 같은 경우에는 ‘길을 물어 보다’에서와 같이 원래의 형태 ‘묻-’을 고정시키지 않고 받침을 ‘ㄹ’으로 바꾸어 적는다.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앞의 ‘읽는다-잉는다’와 같은 예는 그러한 환경이 되면(받침 ‘ㄱ’ 뒤에 ‘ㄴ’이 오면) 언제나 똑같은 음운현상(‘ㄱ’이 ‘ㅇ’으로 변함: 자음동화)이 일어나는 데 비해, ‘묻다-물어’는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받침 ‘ㄷ’ 뒤에 ‘-어’가 오는 똑같은 환경에서도 ‘길을 물어 보다’와 같이 ‘ㄹ’로 변하는 경우와 ‘항아리를 묻어 두다’와 같이 그런 변화가 없이 그대로 ‘ㄷ’인 경우가 있으므로 일정한 음운현상으로 규칙화할 수가 없다) 이런 방식의 표기법은 주시경이 이론화하여 주장한 것인데, 1933년 ‘한글마춤법통일안’ 이래 남과 북이 모두 채택하는 근본 원칙이다.

 

그렇다면 이 원칙을 따를 때 ‘노동/로동’은 어떻게 될까? 남측에서 이를 ‘노동’으로 적는 것은 두음법칙에 따른 것이다. ‘勞’는 ‘근로’에서와 같이 두번째 음절 이하에서는 원래의 음 ‘로’로 소리 나지만, 단어의 첫음절에 오게 되면 ‘노’가 된다. 즉 ‘ㄹ’이 어두에 오면 언제나 ‘ㄴ’으로 소리난다는 것인데, 이는 ‘읽는다-잉는다’와 같이 매우 규칙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두음법칙을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규칙으로 인정한다면, ‘로동’으로 적는 것이 우리 말 표기의 근본원칙에 더 부합하는 것일 수 있다. 분단 뒤 나온 북측의 첫 언어학적 발언이 바로 이 두음법칙 문제였는데, 경성제대와 동경제대를 거친 일급의 언어학자 김수경은 <로동신문>에 발표한 논문에서 1933년 맞춤법의 취지대로라면 ‘노동’이 아니라 ‘로동’으로 적어야 함을 논리정연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남에서는 분명 두음법칙이 인정되지만, 북측은 표기만이 아니라 실제 발음도 ‘로동’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남에서라면 두음법칙이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규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물론 남측에서도 외래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남과 북을 아우르게 되면 이 규칙이 보편적이지도 필수적이지도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 ‘읽는다-잉는다’와는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묻다-물어, 묻다-묻어’와도 다른데 굳이 비교하자면, ‘덥-+-어’를 어디에서는 ‘더워’로 어디에서는 ‘더버’로 소리내는 상황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때는 표기 이전에 발음의 통일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물론 발음은 복수로 두고 표기만 통일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그러면 상황이 좀 더 복잡해질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일단 ‘로동’으로 적(고 [노동]으로 발음하)는 것이 남측이 따르는 원칙에서 보더라도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만 지적해 두고자 한다. ‘시내가/시냇가, 나무잎/나뭇잎’은 상황이 다르다. 이른바 ‘사이시옷’ 문제인데, 앞의 두음법칙과 달리 ‘사잇소리 현상’은 일정한 음운 규칙으로 일반화가 되지 않는다. 즉 동일한 환경이더라도 사잇소리가 덧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고무줄]-[빨래쭐], [회수](回收)-[회쑤](回數)’와 같은 예가 그렇다. 따라서 이 사이시옷 문제는 ‘읽는다-잉는다’가 아니라 ‘묻다-물어, 묻다-묻어’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결국 소리의 변화를 표기에 반영하는 남측의 방식이 한글맞춤법의 원칙에 좀더 부합하다고 할 수 있겠다.

 

6.

남과 북이 함께 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위에서 제시한 어휘나 표기의 차이를 해소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는 ‘게사니/거위’의 짝 중 하나만 살리고 나머지는 쓰지 말아야 할 비규범어로 보는 방법일 수도 있지만, 이 둘 모두에 공식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어휘도 그렇지만, 특히 표기가 통일되지 않은 사전이란 상상할 수 없다. 그 목적과 의도가 어떻든 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해당 어휘의 형태와 의미, 그리고 그 문법적 특성을 일관된 기준과 방법론으로 기술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거기에 올라갈 어휘에, 그리고 표기에 남과 북의 차이가 있다면 이를 어떤 식으로든 해소하지 않고는 사전은 단 한 페이지도 만들어질 수가 없다.

 

<겨레말큰사전> 사업은 1989년 방북한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에게 ‘통일국어대서전’을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005년 2월 ‘남북공동편찬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그 뒤로 매년 네 차례 정기적으로 공동회의를 개최하여 사전 편찬과 관련한 여러 가지 기초 작업을 하였다. 마침내 2009년에는 실제 원고 집필에 들어갔으나 2010년부터 남북관계가 단절되어 4년 이상 사전 작업이 중단되었다. 다행히 2014년 7월 다시 편찬회의가 재개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경색된 남북관계로 인해 안정적인 회의 개최가 어려운 상황이다. 2007년 남에서 제정된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법’은 2013년 개정되어 편찬 사업 기간을 2019년 4월로 5년 연장한 바 있다.

 

이 글의 초반에 밝힌 바와 같이 ‘언어적 근대’는 단일 언어 사회라는 이상을 자국어 문법서와 사전 같은 것들을 통해 구현하려는 일종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념의 시대’가 지나간 지는 이미 오래다. 더구나 ‘단일 언어 사회’를 이상적으로 보는 관점 역시 이른바 ‘세계화’라는 시대적 흐름에 비추어 보면 일종의 넌센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근대의 극복’ 역시 바로 그 ‘근대’라는 문제의식의 재검토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언제나 허공에 대고 내지르는 공허한 몸짓이 되고 말 공산이 크다. 아직도 ‘언어적 근대’의 문제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겨레는 우리 말고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늦어지고 지체되었으므로 오히려 ‘근대’가 만들어낸 수많은 문제점까지 함께 고민하며 작업해 나갈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는 있다. 따라서 <겨레말큰사전>은 미뤄두었던 숙제를 비로소 꺼내어 어떻게든 마무리하려는 뒤늦은 노력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전망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는 작업이다. 그런 노력들이 모여 결실을 거둘 때만이 ‘가장 늦은 통일’은 말 그대로 ‘가장 멋진 통일로’ 우리에게 다가 오리라고 믿는다.

(계간 <통일코리아> 2015년 가을호)

 

 

영화 “행복한 사전”을 보고 - ‘왼쪽’과 ‘오른쪽’ 사이에서 길을 잃다

밥벌이 2014. 5. 15. 16:56

 

 

 

 

얼마 전 사전 편찬 과정을 담은 일본 영화 “행복한 사전”을 직장 동료들과 함께 보았다. “배를 엮다(船を編む)”라는 제목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사전을 소재로 한 소설과 영화가 성공할 수 있다는, 아니 쓰여지고 제작될 수 있다는 문화적 풍토에 놀랐다. 일본 사정에 밝은 어느 연극 연출가로부터 국어사전 편찬에 관한 연극도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었는데, 역시 일본은 사전을 잘도 만들 뿐 아니라 사전 작업의 의미를 사회적으로도 꽤 인정해 준다는 생각이 든다. 단기간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척, 하고 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문화와는 분명 다른 데가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이 ‘성실’을 뜻하는 ‘마지메’라는 것은 사전 작업의 고단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텐데, 이런 영화나 연극 같은 것이 사전 편찬자들의 수고로움을 사회적으로 인정해 준다는 표현인 것 같아 부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뭔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선 현실과 달리 사전 편찬 작업이 너무나 아름답게‘만’ 묘사되고 있다. 물론 작가의 취재가 치밀했던 듯 표제어 선정에서부터 뜻풀이 문제까지 꼼꼼히 묘사했고, 더 나아가 종이의 촉감까지 섬세하게 고려하는 장면들은 실제 사전 편찬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과정에서 작업자들 간의 갈등이나 긴장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이 말을 표제어로 올릴지 말지, 그 말의 뜻풀이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모든 문제에 관해 현실의 집필자, 교정자들은 제각각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하는 그 다양한 의견들을 하나로 모아가는 작업이 바로 사전 편찬의 일일 텐데, 이 영화에서는 누군가 의견을 제시하면 도무지 이견이란 게 없고 모두가 흔쾌히 동의하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사전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성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개 고집스럽기도 하다.

 

물론 어느 출판사에도 더 이상 사전을 전담하는 부서가 없다는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면, ‘사전 만들기’를 아름답게만 그렸다고 시비를 건다는 게 공연한 트집잡기인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그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뭔가 나를 불편하게 했던 건 영화에서 언급되는 한 단어의 뜻풀이 문제였다. 새로운 편집자가 필요했던 사전팀은 영업부의 ‘괴짜’ 마지메를 붙잡고 ‘오른쪽’이라는 단어를 풀이해보라고 즉석 질문을 던진다. 당황한 표정으로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쳐다보며 들었다 놨다 허둥대던 마지메는 “서쪽을 바라보고 섰을 때... 북쪽에 해당하는 쪽?”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언어학을 전공했다는 주인공은 이로써 사전팀에 합류할 수 있게 되는데, ‘大渡海’라는 이름이 붙은 새 사전의 편찬 과정에서도 ‘오른쪽’의 뜻풀이가 다시 한 번 거론된다. ‘이 사전을 펼쳤을 때 짝수 페이지가 있는 쪽’이라고 한 사전도 있다는 등의 이야기가 오고가다가 원로 편집자가 제안한 ‘10을 썼을 때 0이 있는 쪽’이라는 안이 모두의 탄성과 함께 받아들여진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 누군가는 영어권의 한 사전에서는 ‘심장이 뛰는 쪽’을 왼쪽 오른쪽의 기준으로 삼았다고도 했는데, 그러나 딴에는 말석에서나마 사전 만드는 일을 거들고 있는 내 입장에서 볼 때 그런 뜻풀이들이 뭔가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다. 책상에 앉자마자 우리 국어사전들을 들춰보았다. 이럴 수가! 『표준국어대사전』(이하 『표대』)과 『우리말큰사전』, 『금성국어대사전』,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물론이고 북에서 나온 『조선말대사전』에 이르기까지 괴짜 신입부원 미지메 군과 같은 식으로 ‘오른쪽’을 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현상의 사소한 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네 사전은 모두 “북쪽을 향했을 때 동쪽과 같은 쪽”이라고 하고 있었다. 『동아새국어사전』과 『연세한국어사전』은 ‘동쪽’을 바라보고 섰을 때 ‘남쪽’에 해당한다고 해서 기준이 바뀌었을 뿐 역시 같은 방식으로 풀이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저작권’을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일본의 가장 유명한 국어사전 『広辞苑』에서도 “남을 향했을 때 서에 해당하는 방향”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대한제국의 국문연구소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했던 이능화가 1906년 「국문일정법의견서(國文一定法意見書)」에서 일본의 『言泉』을 본받아 우리도 국어사전을 만들자고 했던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왼족, 오른쪽’이라는 낱말의 뜻풀이에 느닷없이 동서남북의 방위가 등장하는 이런 식의 뜻풀이에 과연 문제는 없는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오른쪽’이라는 말을 ‘북쪽을 향해 섰을 때 동쪽에 해당하는 방향’과 같은 의미로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어’라는 낱말을 ‘한 나라의 국민이 쓰는 말’(『표대』)이라고 풀이했을 때, 뜻풀이에 사용된 ‘나라, 국민, 쓰다, 말’과 같은 단어들은 ‘국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것들이고 거꾸로 그러한 낱말들의 의미가 모여 ‘국어’라는 단어의 의미가 구성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라는 낱말을 ‘어떤 기준보다 높은 쪽’(『표대』)이라고 풀이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른쪽’과 ‘북쪽을 향했을 때 동쪽과 같은 쪽’은 그런 관계가 아니다. ‘북쪽, 향하다, 때, 동쪽’이라는 낱말들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여기서 ‘오른쪽’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챌 수는 없다. 다만 북쪽을 보고 실제로 (또는 가상으로) 서서 동쪽이 어디인지 나침판 같은 것으로 확인해 본다면, 다시 말해 마치 매뉴얼처럼 적용해서 실행해 본다면 오른쪽이 어디인지는 알 수 있다. ‘사전을 펼쳤을 때 짝수 페이지가 있는 쪽’, ‘10을 썼을 때 0이 있는 쪽’과 같은 따위도 모두 그렇다. 사전의 일반적인 뜻풀이가 어떤 어휘를 다른 말들의 의미를 가지고 풀이하는 것인 데 비해, 이런 것들은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해보거나 관련된 다른 지식을 동원하도록 요구하는 것으로 마치 말을 설명하기 위해 말 밖으로 뛰쳐나가는 형국이라고 하겠다. 어떠한 개념이나 사물을 정의하거나 규정하는 것과 낱말을 ‘뜻풀이’하는 것은 같은 듯하지만 실은 구별되는 일이다.

 

영화에서 ‘오른쪽’을 뜻풀이해 보려고 애썼던 이들은 대개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또 들었다 놨다 한다. 우리가 ‘오른쪽, 왼쪽’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연상되는 가장 가까운 말은 아마 ‘오른손 왼손’일 것이다. 그러나 순환적인 뜻풀이를 배제한다는 근대 사전 편찬의 대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른쪽’의 풀이에 ‘오른손’이라는 말을 쓸 수는 없다. 여러 사전들에서 난데없이 북쪽 혹은 동쪽을 바라보고 일단 한번 서보라고 제안 아닌 제안을 하고 있는 것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말이 아니라 글자를 풀이하는 것이긴 하나,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순환적 뜻풀이로 일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골이 해독되기 전까지 근 2000년 동안 한자의 뜻풀이에서 『설문해자』의 권위가 의심된 적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오른쪽’은 ‘오른손’으로, ‘오른손’은 ‘오른쪽’으로 뜻풀이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자에게 뜬금없이 북쪽이나 동쪽에 서 보라고 권하는 식의 풀이 방식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 사이로 『言泉』, 『言海』, 『広辞苑』, 『大辞林』 같은 일본 유수의 사전들이 배경처럼 등장한다. 한결같이 ‘○○사전’이라는 이름뿐인 우리와 달리 말이 샘솟아 마침내 바다를 이룬다는, 그리고 급기야는 그 말의 바다를 건넌다는 은유(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사전의 이름은 ‘大渡海’다), 또는 말의 큰 정원이나 숲이라는 은유가 멋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말의 바다에서 혹은 숲에서 왼쪽과 오른쪽도 분간 못하고 헤매는 조난자가 된 기분이다. 잔잔하고 편안한 영화 “행복한 사전”을 본 이래 아직까지 마음이 불편하고 개운치 않은 것은 그래서이다.

 

수량화혁명, 앨프리드 크로스비, 김병화 옮김

밥벌이 2005. 9. 16. 14:54

중세까지만 해도 이슬람이나 동아시아 문명에 비해 별 볼일 없던 서구 유럽이 어떻게 근대 이후 전세계를 압도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 근본 원인을 탐사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에 대한 교과서적인 대답, 즉 ‘과학혁명'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어떤 특정한 망탈리테의 형성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 특정한 망탈리테란 세계를 균질적인 단위의 집합체로 설명하려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통해 세계는 마일, 각도, 시간, 분, 음표, 굴덴 등으로 분절되고, 이는 음악 보표, 세계지도, 군대의 대형, 회계장부의 항목, 행성의 궤도 등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로 배열된다. 서구는 이런 것들을 통해 세계를 효율적으로 설명하고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인들이 열광했던 것들
푸코가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설명하기 위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로부터 <말과 사물>을 시작하듯, 크로스비는 16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브뢰헬이 그린 <절제>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에 근대인들이 열광했던 것들이 매우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달과 별 사이의 각거리를 재는 천문학자와 온갖 측량 도구를 동원해 무언가에 열중인 기술자들, 성서로 보이는 커다란 책을 둘러싸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 저마다 계산에 열중인 상인?회계사?농민, 원근법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악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합창단 따위가 등장한다. 그리고 절제를 상징하는 여성이 그림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녀의 머리에는 시계가 얹혀 있다.
화가는 당대인들이 환호할 만한 모습들을 이 판화에 담은 것일 터인데, 일견 잡다하기만 해 보이는 이 다양한 행동들에 사실은 중세를 넘어선 근대 서구의 핵심이라 할 그 무엇이 관통해 있다. 세계를 균질적 단위의 집합체로 설명하려는 사고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맹아적 형태가 1250년에서 1350년 사이의 서유럽에서 나타났다고 보는데, 이는 시계와 항해도, 정량적 기보법, 원근법, 복식부기 등에 대한 폭넓은 고찰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고전적 세계관 - 유서 깊은 모델
그리스 로마적인 것이든 아니면 기독교적인 것이든 고전적 세계관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질적으로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주는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어져 있고, 달 아래의 세계가 가변적인 그래서 불완전한 곳이었던 데 비해 제5원소를 갖는 그 바깥 공간은 질적으로 완벽한 곳이었다. 지구 위의 공간 역시 모두 질적으로 구분된다. 예컨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지상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모든 곳은 이로부터 상대적인 위치를 할당받는다. 시간 역시 그저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으로, 예수의 십자가형 이전과 이후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결국 고전적 세계관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어떠한 단위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금과 아까는, 이곳과 저곳은 고상하든 저속하든 저마다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가 살던 시대의 한 시간이나 지금의 한 시간이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량화/시각화라는 세계관의 혁명
수천 년 지속되던 고전적 세계관은 14세기 무렵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시계의 발명으로 인해 시간이 무수히 작은 단위로 나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무심히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모든 시간의 질적 차이를 집어삼켜 버린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 영향 받은 유럽인들은 경도와 위도라는 그물망을 지구 위에 덮어씌워 모든 공간을 단순히 좌표값을 가지는 균질적 공간으로 정리했다. 또한 인도-아리비아 숫자의 도입, 연산 기호의 사용 등으로 대수학이 가능해져 모든 사고의 수식화가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균질적 단위의 수량화는 세계의 시각화라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는데 정량적 기보법, 원근법, 복식부기 기법 등이 그러한 사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음의 높낮이와 길이가 일정치 않은 데다 사람의 기억력에 전적으로 의지하던 단성률 그레고리안 성가는, 기보법의 발명으로 인해 하나의 음표가 어떤 높이와 지속 시간을 갖는지 (눈으로) 확인이 가능해져 복잡한 폴리포니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중요도에 따라 대상의 크기와 위치가 결정되던 이전의 회화 양식은 투시도법을 활용해 어느 한 순간에 포착된 3차원적 세계를 2차원적 평면에 사실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게 된다. 대차대조표에 의한 복식부기 역시 복잡한 자본의 흐름을 특정 시점에서 간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근대성, 그 근원을 탐사하다
시간과 공간을 선험적 객관형식으로 지목한 칸트의 논의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시공간은 우리의 의식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이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어느 순간에 변화했고 그것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면 이는 근대를 설명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시공간 인식의 변화를 예술과 사상, 자연과학 및 과학기술, 상업 활동 등 여러 분야를 통해 다룬 이 책이야말로 근대성 논의에 깊이 있는 시사점을 던져 준다고 하겠다.
또한 스콜라 철학의 사상사?문화사적 역할, 인쇄술로 인한 읽기 문화의 변화,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고 좌절하는 예술가들의 생애 등이 발랄한 문체로 그려져 있어 읽는 재미 역시 남다르다.

p.s.

나의 객적은 실수로 엊저녁 최 실장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약간은 상기된 어투로, 모 출판평론가가 <수량화혁명>을 대단히 상찬했다는, 그리고 <이미지의 문화사>와 더불어 이 책을 통해 심산출판사을 주목하게 되었다는, 우리가 아직 심산에 남아 있었다면꽤 반가웠을 이야기를 전했다.

아마도 내가작성한 마지막 보도자료가 될 듯한이 쑥스러운 글은, 모든 문장이 다 그렇지만, 쓸 때는 그럴 듯해 보였으나 지금와서 보니 뻑뻑하기 그지 없다.잘 읽히지가 않는다.

이미지의 문화사: 역사는 미술과 어떻게 만나는가, 피터버크 지음, 박광식 옮김, 심산문화

밥벌이 2005. 1. 14. 10:57

역사 서술은 주로 문서자료(그것도 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공적인)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기존의 역사 서술이 대부분 정치사, 경제사, 제도사 등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근래에는 이러한 관행에서 벗어나 심성, 일상, 물질문화, 육체 등과 같은 다양한 영역의 역사를 테마로 삼는 연구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역사 서술의 범위가 넓어지면 자연 채택되는 사료도 다양해지기 마련이다. <이미지의 문화사: 역사는 그림과 어떻게 만나는가>는 역사 서술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사료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도 물론 이미지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문자가 없었던 선사시대의 역사는 당연히 동굴벽화에서 영감을 얻을 수밖에 없었고, 초기 기독교사의 기술에서도 로마의 카타콤에 남아 있는 그림이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20세기 초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나 요한 호이징가 같은 이들은 라파엘로나 판 에이크의 작품에 기초해서 당시의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의 문화를 묘사해 낸 바 있다. 또한 필리프 아리에스는 유년의 역사와 죽음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이미지를 주요한 사료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들은 대개 문서자료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시각자료를 활용해야 했던 경우이거나, 문서자료를 토대로 기술한 내용을 보완?확증하는 역할을 이미지에 떠맡겼던 것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이미지는 문서의 단순한 보조 자료가 아니다. 사안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역사라는 재판정에 출두한 ‘증인’으로서 이미지는 문서보다 더욱 결정적인 ‘증언’을 하기도 한다. 당시의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또는 별로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판단해 문서로 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 주는 것이다. 특히 문자문화와 조우하기 어려웠던 소수자나 타자(여성사, 아동, 이방인 등)의 삶은 이미지를 통하지 않고는 온전히 복원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함부로 증언대에 세웠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이미지는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참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록사진이나 초상화마저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죽음의 순간은 연출되고(그림 4) 시체들마저 작가를 위해 포즈를 취한다(그림 5). 또한 왕의 주걱턱은 깎여 나가고(45쪽), 독재자는 ‘생뚱맞게’ 반바지 차림으로 뛰어 다닌다(그림 28). 이것이 바로 기록사진이고 공식 초상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지와 더불어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역사가들에게는 오히려 이 왜곡 자체가 역사 서술의 중요한 대상이 된다.

칼뱅파가 사용하던 교회에서 가톨릭 전례가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 그림은 실제 그런 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7세기 네덜란드 기독교에 겉보기와는 다르게 가톨릭을 되살리려는 문화적 노력이 끈질기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그림 47). 또 19세기 유럽인들이 그린 이슬람 후궁 그림은 이슬람 궁전의 사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유럽인들이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이 얼마

나, 그리고 어떤 식으로 왜곡되어 있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그림 66)

저자는 이렇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역사 기술에서의 이미지 활용 방법을 이론적으로 모색하는 데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우선 문서사료에 대한 원전 비평이 필요하듯 이미지를 둘러싼 여러 정황을 세밀히 검토해야 함이 지적된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기존의 도상학 및 도상해석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또한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 및 후기구조주의적 방법이 갖고 있는 장단점을 검토하여 최종적으로는 ‘제3의 길’이라는 나름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즉 이미지란 사회적 현실의 직접적 반영도 아니며 사회적 실제와 무관한 기호구조만도 아니어서, 이미지를 사료로 사용하는 사람은 환원주의자가 되어서도, 형식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피라미드: 그 영원의 시공간을 탐사한다]

밥벌이 2004. 11. 4. 10:14

[피라미드: 그 영원의 시공간을 탐사한다]

미로슬라프 베르너 지음, 박희상 옮김, 심산문화


보통 이집트 피라미드 하면 사막에서 쓸쓸히 모래바람을 맞고 있는 사각뿔 모양의 구조물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여러 면에서 사실과 다르다. 우선 피라미드의 형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각뿔 모양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그것은 단독 건축물이 아니라 여러 건축물로 이루어진 전체 묘역의 일부분일 뿐이다. 게다가 피라미드는 죽은 자를 위한 쓸쓸한 공간이 아니라 일년 내내 축제로 떠들썩했던 활발한 삶의 장소였던 것이다.

나일 강변 문화와 델타 문화의 통합이라 할 수 있는 상(上)/하(下)이집트의 통일은 중앙집권을 통해 일대 국력의 신장을 가져왔고, 이는 거대한 건축 사업의 정치경제적 배경이 되었다. 또한 유목 문화와 농경 문화의 결합이라 할 이 상/하이집트의 통합은 세계관, 종교관, 내세관의 상호 틈입을 의미했고, 자연스레 아비도스 형과 사카라 형으로 대별되는 두 개의 무덤 형태는 점차 통합되어 갔다. 이런 과정에서 제3왕조의 2대왕 조세르가 그의 명재상 임호텝에게 자신의 무덤을 짓게 했으니, 이것이 바로 이전부터 내려오던 마스타바를 확대 변형시킨 계단 모양의 피라미드였다.

그 후 한동안 이 ‘계단형 피라미드’가 만들어졌으나 제4왕조 중기에 건설된 스네페루의 피라미드에서 그 형태가 혁명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꺾인 피라미드’라 불리는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피라미드의 모양과 유사한데, 특이한 점은 55도로 매끈하게 올라가던 경사면의 각도가 지상 45미터 높이에서 43도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축조상의 문제가 발생해서 처음의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종교관 등의 이유 때문에 애초부터 설계를 그렇게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스네페루는 또 하나의 피라미드, 일명 붉은 피라미드를 건설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형태의 피라미드로는 최초의 것이다.

이와 같이 형태의 변모를 거듭해 온 피라미드는 또한 다른 여러 건축물과 함께 하나의 커다란 묘역을 구성하고 있다. 물론 피리미드 자체가 이 복합체의 가장 중요한 건조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것과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신전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피라미드는 대체로 나일 강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사실은 이 나일강 서안에서부터 묘역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하안 신전이 그곳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은 ‘죽은’ 왕이 ‘살고’ 있는 사후 궁전의 입구인 셈인데, 커다란 인공 운하가 파여 있어 나일 강과 연결되는 선착장 구실을 했다. 이 하안 신전으로부터 서쪽으로 오르막길 즉 참도(參道)가 이어지는데, 이 길은 장제 신전에 가 닿는다. 이 장제 신전은 입구에 마련된 커다란 홀, 제물을 바치는 널찍한 마당, 왕과 신들의 조각상을 모신 공간, 제수 용품과 제물을 보관하는 저장소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 밖에도 피라미드에 따라서는 다른 용도의 신전들이 더 지어지는 경우가 있었고, 심지어는 작은 규모의 또 다른 피라미드가 딸려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피라미드 모역에서 발견된 파피루스를 최근 정밀히 해독한 결과, 하안 신전의 주변에는 피라미드 관리를 책임지는 행정 기관 및 관리들의 숙소, 세탁소, 빵집, 정육점, 시장터들이 모여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또 매일 아침저녁으로 정성스레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매달, 특히 나일 강 범람 후에는 대단히 흥겨운 축제를 벌였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피라미드 묘역과 그 주변 지역은 뜨거운 모래바람이나 부는 사막의 죽은 도시가 결코 아니었다. 이곳은 활달한 삶의 현장이었고, 늘 제사와 축제가 열리는 시끌벅적한 장소였다.

이 책 [피라미드: 그 영원의 시공간을 탐사한다]는 이와 같은 기본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발굴된 거의 모든 피라미드를 그 구조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피라미드의 지하 구조는 어떠했는지, 묘실은 어디에 마련되었는지, 도굴 방지용 시설물은 어떻게 설치되었는지, 전체 묘역의 구성은 어떠했는지, 또 그 거대한 건조물을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쌓았으며, 그 자재는 어디서 어떻게 운반해 왔는지 등등을 저자의 발굴 경험을 토대로, 또 앞선 연구자들의 기록을 근거로 하나하나 짚어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피라미드에 관심을 가졌던 앞 세대들이 남긴 탐사 일화도 마치 논픽션 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여기에는 ‘람세스’의 이름을 토대로 로제타 석판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해석해 낸 샹폴리옹의 감격적인 순간도 있고, 세켐케트 피라미드 발굴 과정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동료학자들의 몰이해와 오해로 인해 나일 강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고네임의 비극도 있다. 또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쿠푸의 대피라미드 꼭대기에 자국 국기를 꼽고 “프로이센이여 고결하라!”고 외친 프로이센 탐사대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으며, 개 몇 마리의 싸움이 카이로에 모여 있던 고고학자들의 패싸움으로 번진 서글픈 이야기도 있다.

피라미드 한 기의 측량자료만 모아 놓아도 새로운 피라미드가 생길 정도라고 한다. 그만큼 모든 피라미드를 개괄적으로 정리하기가 어렵다는 말일 터이다. 그러나 이 책 [피라미드: 그 영원한 시공간을 탐사한다]는 긴박감 넘치는 발굴의 역사를 기대하는 독자도, 또 나름의 안목을 갖추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려는 전문가도 두루 만족시킬 것이다. 이는 수십 년간 탐사대를 이끌고 직접 발굴 작업에 참여해 온 저자의 강한 집념, 그리고 당시의 축조 상황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 미술의 특수 기법 등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많은 도판을 담고 있는 피라미드 연구의 결정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

밥벌이 2004. 9. 21. 13:18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 송준의 영화이야기 2000~2004]

송준,심산문화




저널리즘 비평을 위한 변명


모두가 아는 이야기 하나. ‘한국 영화는 중흥기에 있다.’ 올 한 해만 해도 천만 관객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고, 세계 3대 영화제의 감독상을 모조리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투자처를 잃은 자금이 영화판을 기웃거리고 영화 관련 각종 펀드가 조성되고 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 둘. ‘한국 영화는 위기다.’ 영화판은 몇몇 메이저 배급사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고 게다가 이들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분쟁의 와중에 있다. 천만 관객이라는 과실을 따 먹은 건 몇몇 영화에 한정되어 있고, 비주류 저예산 영화는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게다가 스태프들은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대개가 아는 이야기 하나.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와 때맞춰 영화 관련 저널리즘도 전성기를 맞고 있다.’ 모든 일간지가 주말 즈음에 영화 관련 섹션을 마련해 놓고 엄청난 양의 영화 정보들을 쏟아 내고 있으며 영화 전문 잡지도 여러 개가 활황 중이다. 영화 기사와 영화 비평의 경계가 불분명해졌고, 영화 기자가 곧 영화 평론가로 대우받고 있다. 물론 공중파 역시 신작을 중심으로 각종 영화를 분석하고 비교하고 해설해 준다.

대개가 아는 이야기 둘. ‘한국의 영화 비평과 영화 저널리즘은 죽었다.’ 몇몇 비평가들이 고정 칼럼을 맡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영화 비평은 영화 기자들에 의해서 수행된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에 별 차이가 없는, 게다가 기사인지 홍보 문구인지 구분이 안 되는 글들을 관객은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급기야 각종 인터넷 영화 사이트에다 관객들이 직접 올린 솔직한 감상문이 영화를 선택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두가 묻지만 모두가 난감해하는 질문. ‘한국 영화 문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 송준의 영화이야기 2000~2004]는 그러한 질문에 나름의 의견을 제시한다. 건강한 영화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 10여 년 영화 담당 기자로 일했고 현재에도 왕성한 비평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저자의 제언이다. 지금 영화에 쏟아지는 언어들은 대개 경제적 이윤과 물리적 규모라는 상업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으며 거대한 영화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다시피 하다. 때문에 영화 비평이 자본의 논리, 시스템의 논리와는 별개의 ‘독자적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하며, 그것을 획득할 때만이 건강한 영화 담론이 가능하다는 게 이 책의 입장이다.

그리고 저자에게 그 독자적 관점이란 바로 ‘작은 영화, 변방의 이야기, 아웃사이더적 삶’에 대한 옹호이다.



비루한 것들에 대한 옹호


‘선택과 옹호.’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이 추구하고 있는 비평은 결국 이 ‘선택과 옹호’로 요약될 수 있다. ‘어떤 영화를 선택하는가, 그리고 그 영화의 어떤 점을 옹호하는가.’ 이 점을 명확히 할 때만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주례사 비평’을 넘어설 수 있고, 그런 영화 비평이 영화 담론의 주류를 이룰 때만이 ‘다른’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선택하는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또 그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 옹호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저자는 ‘작은 영화’들을 주목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영화들은 대부분 내놓고 흥행을 노래하지 않은 영화들이다. 이렇게 흥행에 목을 매지 않으려니 부득이 저예산 체제로 제작된 것이 많다. 상업적 굴레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바탕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감독 득의의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영화적 표현과 영상 언어들도 검증되지 않은 신선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저자는 ‘변방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인다. 여기서의 변방은 물론 영화적 변방, 즉 비할리우드 영화를 뜻한다. 스페인 영화(<그녀에게>)와 멕시코 영화(<프리다>)를 앞장세운 영화평은, 에스키모인들(<이타나주아>)과 이란의 쿠르드족 사람들이 만든 영화(<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를 거쳐, 영국(<블러디 선데이>, <오! 그레이스>), 프랑스(<아멜리에>, <8명의 여인들>), 호주(<토끼 울타리>), 일본(<자토이치>, <간장선생>, 중국(<투게더>), 그리고 한국 영화(<오아시스>, <와이키키 브라더스>, <올드보이>) 등등과 같은 변방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이렇게 ‘작은 영화’로 만들어진 ‘변방의 이야기’ 속에서 저자는 ‘아웃사이더’들의 삶을 발견하고 그들의 삶에 적극적 연대의 시선을, 떨리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하여 이란/이라크/터키 접경지대에서의 고단한 삶을 녹이기 위해 말에게 술을 먹여야만 했던 어린 쿠르드족 이야기, ‘야만스런’ 원주민들 속에 ‘고결한’ 백인의 피가 섞인 혼혈아를 버려 둘 수 없다는 인종주의자들의 살뜰한 ‘배려’ 덕분에 토끼울타리를 하염없이 걸어야 했던 어느 소녀의 이야기,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을 개선하라는 평화 집회에 참석했다가 난데없이 ‘피의 일요일’을 경험해야 했던 북아일랜드인들의 가슴 아픔 기억, 구걸을 멈추고 단결할 때만이 장미를 얻을 수 있다고 외치는 어느 노동자의 좌충우돌 노조 결성담 …… 등등이 더 이상 우리 삶의 주변에서 서성이거나 배회하지 않고 합당한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를 담은 변방의 작은 영화들. 이 스크린 위의 몸짓과 소리들은 저자의 풍요로운 문체 속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때로는 간결하고 격한 호흡으로, 때로는 나지막하고 기름진 문장으로 자신이 선택한 영화를 옹호하는 38꼭지의 비평은, 저자가 상찬해 마지않는 그 38편의 영화들이 거둔 미학적 성취를 비평 쪽에서 이룬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비평이 어엿한 예술의 한 장르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이다.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

밥벌이 2004. 9. 13. 11:57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

클라이브 크리스티 편저, 노영순 옮김/ 도서출판 심산문화



1. 보편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동남아시아사를 위하여


동남아시아의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는 이 책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각국의 개별사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동남아시아사를 기술하고 있다. 지금까지 출간되었던 동남아시아 관련 역사서들은 대개 개별 국가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동남아시아’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이 지역은 유사한 역사적 경험의 공유를 통해 나름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이 책은 그렇게 일정한 지역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 동남아시아사 전체를 통합적 관점으로 다루고 있다.

동남아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의 장점은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매우 직접적이고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는 데에 있다. 이렇게 각 사건을 실감 있게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의 독특한 구성에 힘입은 바 크다. 이 책은 일종의 독본(讀本) 형식인데, 동남아시아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추리고 이 사건들의 배경과 의미, 그리고 그 영향 관계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각종 사료를 배치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장에서 직접 역사를 만들어 갔던 이들의 육성이 그대로 녹아 있는 여러 증언들과 문서 보관소에서 잠자고 있던 각종 원사료들이 우리에게 가감 없이 제시된다. 호찌민과 키신저의 회고담과 수까르노의 연설문이 등장하는가 하면,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서구 열강이 취한 동남아시아 정책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각국 행정부의 비망록과 정보국의 보고서 등도 제시된다. 물론 각 사건들의 의미를 깊이 있게 분석하는 역사학자들의 통찰력 있는 사적(史的) 기술 또한 만날 수 있다.

이 밖에도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약소한 국가, 또 민족국가의 염원을 달성하지 못한 소수민족, 나아가 이데올로기나 종교 때문에 주변화된 집단들에 대해서도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이제까지 들어 보지 못했지만,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여러 소수 민족과 각종 정치 단체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보를 얻게 된다.



2. 20세기, 동남아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동남아시아는 대륙부와 해양부로 나뉜다. 대륙부 동남아시아는 크게 보았을 때 타이, 버마, 베트남 등이 주축을 이루는 곳으로서 인도 문명과 불교 문명이 만나는 지역이었다. 이에 비해 해양부 동남아시아는 하나의 광범위한 언어-문화 집단(말레이 폴리네시아계)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5세기 이후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가 우세한 지역(필리핀)으로 나뉘게 된다.

이렇게 여러 문명권과 종족 및 왕조로 구성된 복잡한 형태의 각 구성체들을 ‘동남아시아’라는 하나의 테두리로 묶을 수 있는 통일성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 이 책이 제기하는 첫 질문이다. 여타의 아시아 지역과는 다르게 지배적인 종교도, 언어도, 문화도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지역으로부터 문화, 종교, 민족이 넘쳐 흘러들어 온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볼 때 놀라우리만큼 동질적인 경험을 해 왔다. 16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유럽의 해양 강대국은 종교적 상업적 목적을 위해 동남아시아의 주요 무역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20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는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미국 등이 동남아시아의 대륙부와 해양부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현재의 태국으로 이어지는 샴 왕국만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이다. 식민지 지배의 경험은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상정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이 다루는 첫 시기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수년 전이자 식민 강대국이 동남아시아를 거의 완전히 차지하고 있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 동남아시아의 각 민족들은 근대적 교육?종교?언론?정치 시스템을 갖추어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또한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치열한 저항과 정파간 연대가 모색되었다.

1942년 초부터 1945년 중반까지 계속된 일본의 군사 점령도, 역시 참담한 경험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 지역이 또 하나의 공통된 경험을 갖게 해 주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지배 기간 중 이 지역의 주요 민족주의 단체들은 제법 큰 영향력과 세력을 가진 대중운동 조직으로 발전했고, 전후의 민족국가 건설 과정에서도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 지역은 모두 탈식민화를 경험한다. 비교적 빠른 시기에 탈식민화 과정이 진행되지만, 곧 동남아시아 전체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세계정세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하여 인도차이나 국가들과 여타의 나라들 간에, 그리고 각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과 반공산주의자들 간에 극심한 균열이 생겼고, 결국은 베트남전과 캄보디아 내전 등으로 치달아 동남아시아 전체가 쓰라린 피의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이 책은 1970년대 중반까지의 동남아시아를 다루고 있다. 때문에 현재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다. 이는 이 책이 다루려고 했던 역사적 시기의 한 매듭이 이때(1970년대 중반)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편저자의 설명이다. 그 후의 사건과 현상들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들이어서 아직은 역사 기술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의 언급은 그가 동남아시아의 근현대사를, 그리고 역사 기술이라는 것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땅거미가 내려앉아야 날개를 편다’는 헤겔의 유명한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사건의 ‘의미’와 장기간에 걸친 모양 갖추기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식민 시기, 탈식민 시기 그리고 그 직후에 대해 이러한 특권적인 시각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오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라는 레토릭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레토릭만큼이나 멀리 떠나가 버린 시대로 이동해 가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역사라고 간주할 수 있는 시점에 다다라 있다. (35쪽)

대영제국은 인도를 어떻게 통치하였는가 - 영국 동인도회사 1600~1858

밥벌이 2004. 9. 6. 11:16


[대영제국은 인도를 어떻게 통치하였는가

― 영국 동인도회사 1600~1858?]

(하마우즈 데쓰오 지음, 김성동 옮김/ 도서출판 심산문화 )


주식회사의 기원, 동인도회사를 찾아서


개미 투자자들은 항상 손해만 보게 되어 있다는 게 증권가의 상식처럼 이야기된다. 하지만 주가(株價)의 오름내림에 평범한 대부분의 봉급쟁이들이 일희일비, 노심초사할 정도로 주식은 이제 우리의 일상이다. 꼭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신문이나 방송 뉴스를 통해 매일 주가의 변동을 상세히 보고 받는다. 심지어 바다 건너 미국이나 일본, 유럽의 주가도 매일매일 체크된다. 주식회사 아니고 다른 어떤 회사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현대의 자본주의는 주식회사가 끌고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그렇다면 이 주식회사는 언제, 어떤 이들에 의해,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을까? 놀랍게도 최초의 주식회사는 17세기 초반에 설립된 네덜란드나 영국의 동인도회사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업 형태는 그 후로 200년이 더 지나도록, 즉 1830년대 철도 건설 붐이 일기 전까지는 다른 분야에서는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동인도회사가 다른 기업들은 채택할 필요가 없던 방식으로 투자자를 모으고, 새로운 방법으로 이익을 분배하고, 사원 채용에 전에 없던 시스템을 도입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적 기업체와 식민지배체의 기묘한 결합 ― 동인도회사


동인도회사 이전에 대규모 합자회사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전의 합자회사는 기본적으로 서로 얼굴을 아는 투자자들이 모여 설립한 것이지만, 동인도회사는 낯선 사람들과 사업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더 많은 자본을 필요로 했다. 여기에 더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결정은 선출된 이사들이 내렸고 대부분의 투자들은 이사회의 결정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주식을 팔거나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투자의 익명성’이나 ‘소유와 경영의 분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 주식회사와 다른 형태의 합자회사를 구별해 주는 것은 바로 회사의 ‘영속성’이다. 이전의 합자회사들은 처음부터 해산일을 정하고 시작했다. 정해진 몇 년이 지나면 회사의 모든 재산은 정리되어 투자자들에게 분배되었고, 그러면 회사는 자연스레 사라지는 게 통례였다. 그러나 동인도회사는 기한을 정해 놓고 출발하지 않았다. 일정 기간 후에 회사를 몽땅 처분하여 이를 투자자들에게 나눠 주는 대신 동인도회사는 자본을 계속 축적해 나갔다.

이는 그때까지는 상상할 수 없었던 ‘혁신’이었다. 산업혁명 후 대량 생산 체제를 도입한 철강, 면방직, 석탄 회사들조차도 가족 기업일 뿐이었다. 당시에는 주식회사의 형태를 도입해야 할 정도로 많은 자본과 시간이 드는 사업이란 없었다. 그렇다면 동인도회사는 왜 이렇게 많은 자본이 장기간 필요했던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 이는 외국과의 전쟁, 그리고 식민지 건설이라는 거의 주권 국가가 할 법한 일들을 해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근대적 주식회사는 전혀 근대적이지 않은 기업 형태 때문에 생겨났던 것이다.

[대영제국은 인도를 어떻게 통치하였는가 ― 영국 동인도회사 1600~1858]는 바로 이 대단히 이른 시기에 출현한 근대적 기업 형태가 식민 경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꼼꼼히 고찰한 수준 높은 연구서이다. 이 책은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영유하기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회사의 인도 통치, 본국 정부의 인도 통치 개입, 인도 통치를 담당한 총독 관료 등 ……에 초점을 맞추었다. 간단히 말하면 기업통치(corporate governance), 즉 정치적 측면에 중점을 둔 동인도회사의 통사(通史)인 것이다.”(10쪽)



인도 통치의 첨병 ― 영국 동인도회사


인도는 영국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획득하고 지배하는 데 전진 기지이자 관리 센터와 같은 역할을 했다. 실론(스리랑카), 버마(미얀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은 모두 인도의 군사력이나 인도정부의 외교력으로 영국이 획득한 아시아 식민지이다. 뿐만 아니라 인도인들은 이러한 영국의 식민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상당한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이들 지역의 차?고무?사탕수수 농장 및 논의 개간은 인도인들의 노동력이 아니었으면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영국은 인도인들을 군대에 편입시켜 적절한 때에 이를 가동했다. 동인도회사는 독자적인 대규모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장교를 제외한 병사의 대부분은 인도인이었다. 이들은 국내 전쟁뿐만 아니라 버마, 이집트, 중국 등지에서 벌어지는 해외 전쟁에도 파견되었다. 영국이 인도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 전쟁은 아무래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100만 명 이상,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200만 명 이상의 인도인이 영국의 승리를 위해 전쟁에 동원되어야 했으니 말이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영국의 인도 식민 통치에 엄청난 기여를 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기업 시스템은 매우 현대적이었다. 일례로 사원 채용 방식을 들 수 있다. 영업과 행정 업무를 모두 처리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던 동인도회사는 자체적으로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 본토의 공무원 채용 과정에서도 아직 시행되고 있지 않던 공개 시험을 실시해 직원을 채용하기까지 했다.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확립한 각종 행정 시스템 역시 나무랄 데가 없어서, 이후 영국 정부가 직접 인도를 통치할 때도 그대로 유지되었을 정도다. 또 군사 면에서도 선진성이 두드러져 영국 본토의 해군보다도 앞선 기술을 보유하기도 했다.

[대영제국은 인도를 어떻게 통치하였는가 ― 영국 동인도회사 1600~1858]는 이렇듯 영국의 인도 통치에 없어서는 안 될 회사, 영국 동인도회사를 고찰하고 있다. 1601년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받은 동양 무역 특허장을 품고 아시아로 향했을 때 동인도회사의 자금력은 겨우 5척의 선박을 보유할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120여 년 만에 세계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했으며, 200년 후에는 인도에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는 역사상 최강의 상사로까지 발전했다.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밥벌이 2004. 9. 4. 15:09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케네스 포메란츠·스티븐 토픽 지음, 박광식 옮김)


‘유럽 중심주의’를 거부한다 -교역사로 본 세계사

우리는 유럽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럽 중심의 역사관을 갖고 있다. 세계사를 은연중에 서양사와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산업화는 자체 동력으로 완성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그들의 자본주의가 전세계로 퍼져나가 현제의 세계경제(Global Economy)를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 책에서 이러한 유럽중심의를 여지없이 혁파한다. 유럽이 세계 경제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일 뿐이고, 그 훨씬 이전부터 중국이나 인도,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의 상업망이 유럽 경제 못지않게, 또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럽인들은 이 네트워크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났던 사람들에 불과하고…….


뿐만 아니라 저자들은 요즘 운위되고 있는 세계화가 그렇게 새삼스러운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이전에는 독자적이고 고립되어 있던 여러 사회가 유럽의 산업혁명을 계기로 비로소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여러 개의 중심을 가진 복잡한 문화간 네트워크가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최소한 1400년대부터는 세계체제가 작동하고 있었고, 이 속에서 각 문화권들이 서로 협력하고 갈등했으며, 혹은 폭력으로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기도 했다(주로 유럽인들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세계사를 바라보는 이 책의 기본 입장이 세계체제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저자들 스스로의 언급(17쪽)을 굳이 지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위에 소개한 저자들의 관점으로부터 최근에 번역 출간된 ?리오리엔트?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리오리엔트?의 저자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이 책(?커피, 설탕, 그리고 폭력?)의 저자 중 한 사람인 포메란츠의 연구를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인용하고 있으며 대체로 그와 입장을 공유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리오리엔트?가 대체로 이론적인 면에 치우쳐 있다면 이 책은 76가지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예화들로 세계경제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크의 책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이민자와 상인, 무역업자와 수액 채취인, 해적과 사략선(약탈을 합법적 허가받은 배) 선장, 발명가와 생산업자, 뱃사람과 노예, 기업가와 기술자, 모험가와 광고주, 가우초(팜파스의 목동)와 구아노(칠레 해안에 쌓여 있던 새들의 배설물) 선적인 등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세계경제라는 무대에서 각자의 배역을 매력적으로 소화하고 있다. 이들에 의해서 거래되는 품목 역시 설탕과 커피, 차, 담배, 코코아, 면화, 감자, 땅콩, 쌀, 비단, 은, 금, 연지벌레, 노예, 무기 등등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지만 모두 세계경제의 일면을 보여주는 데에 빠질 수 없는 중요 소품들이다.

일테면 루이 14가 귀족들과 커피를 마시는 궁정 연회에서도 세계경제는 여지없이 드러난다. 커피는 예멘의 주요한 항구 도시 모카에서 사온 것이고, 여기에 치는 설탕은 아프리카의 상투메 섬이나 남미의 브라질에서 운영되는 노예 플랜테이션에서 생산된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가톨릭 국가의 왕궁에서 음미되던 이 무슬림들의 음료가 중국 도자기에 담아져 있었으니, 세계경제는 이미 일정한 단계에 진입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는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했던, 교역과 관련된 새로운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지금 사용되는 철도 궤간이 왜 로마 시대의 도로 폭과 같게 되었는지, 깡통이 만들어지고 나서 깡통따개가 만들어지기까지 왜 60년이나 되는 긴 시간이 필요했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최초의 주식회사가 사실은 해적질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 표준시가 정해지는 험난한 과정, 타자기 자판이 일부러 느리게 쳐지도록 고안된 사정들도 알려준다.


이와 같이 이 책은 기존의 세계사 서술이 안고 있던 유럽중심주의의 한계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고 명징한 사례들로 세계경제의 형성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대중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 중심의 세계경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폭력을 강조함으로써 현금의 세계화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성찰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백, 두보를 만나다

밥벌이 2004. 9. 4. 14:54

이백, 두보를 만나다



이백과 두보의 삶, 그리고 이들의 문학은 어디에서 만나고 갈라지는가


“이백과 두보는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같은 시기에 살았다. 똑같이 당시 중국의 언어와 시적 형식을 이용하여 선비 세계에서 시를 지었으며, 마찬가지로 각지를 방랑하다 생애를 마쳤다. 그런데도 이 두 사람의 시는 비교하기 곤란할 정도로 각각 전혀 다른 경지를 전개하고 있다.”(321쪽)



1. 이백과 두보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


동양 문화의 자장 안에 있는 사람치고 이백과 두보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당나라 중기에 활약한 이 두 시인은 시선(詩仙), 시성(詩聖) 등으로 불리며 천 년이 넘도록 큰 영향을 미쳐 왔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이 두 인물의 이름은 매우 친숙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면, 술을 좋아한 이백의 시가 호탕하고 환상적인 데 비해 두보의 시는 사회현실을 극명하게 담아냈다는 정도, 그리고 그들이 남긴 몇 수의 시를 들어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닐까. 이백과 두보가 갖고 있는 그 대중적인 명성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의 독서계는 이제껏 그들을 거의 무시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백, 두보를 만나다?는 이백과 두보의 삶, 그리고 문학을 매우 세밀하게 짚어 내는 한편, 일반 독자들이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갖고 있던 이백과 두보에 대한 어렴풋한 짐작이 사실은 상당 부분 근거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상상하고 있던 이백과 두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이백과 두보를 만나게 될 것이다.

호방하고 은자적 풍류를 즐겼다고 알려져 있는 이백, 그리고 국가와 민중의 안위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두보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젊은 날 관직을 구걸하기 위해 세력가들의 집에 드나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또한 불세출의 시인 두보가 사실은 산문에는 전혀 무능해서 시 외에는 다른 글을 거의 쓰지 못했음도 알게 된다.

물론 ?이백, 두보를 만나다?는 이백과 두보에 대한 기괴한 정보를 모아 놓은 책이 전혀 아니다. 전반부에서는 이백과 두보의 삶을 철저히 고증, 복원해 냈고, 후반부에서는 그들의 시편들을 섬세히 검토할 뿐만 아니라 누가 어떤 시형에서 더 두각을 나타냈고 어떤 형식에서는 다소 뒤처지는가 하는 점까지 밝힐 정도로 깊이 있는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히 고체시, 근체시, 가행, 악부, 율시, 절구, 배율 등 당시(唐詩)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이백과 두보의 삶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자연히 당나라 중기의 역사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후와 중종 시대를 마감한 현종과 그의 아들 숙종 대의 정치 상황, 당시의 관리 등용 제도, 도교와 황실의 관계, 안사의 난의 전개 과정, 당나라의 이민족 정책 등이 두 시인의 삶 혹은 문학과 교차되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좀 더 여유 있는 독자라면 이 책에 실린 이백?두보 관련 지도를 직접 더듬으며 이 두 시인이 살아낸 삶의 족적을 그 현장에서 직접 되짚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이백과 두보가 만나는 곳과 갈라지는 곳


이백과 두보가 만나는 곳 ―

?이백, 두보를 만나다?는 실제로 이 두 시인이 낙양에서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거대한 두 봉우리가, 그것도 삶의 대부분을 방랑 생활로 보낸 두 사람이 광활한 중국 대륙의 한 지점에서 딱 마주쳤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꼭 이런 구체적인 대면이 아니고도 이 둘의 삶에서는 여러 접점이 발견된다.

두 시인 모두 일찍이 관직에 뜻을 품고 고관이나 실력자의 집에 드나들며 시를 지어 바쳐 눈에 띄기를 고대했다. 비굴하게 세력가들을 터무니없이 높여야 했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는데, 자신을 앵무새에 비유하기도 하고(이백, 92쪽), “아침에는 부자의 문을 두드리고, 저녁에는 귀공자의 말에 묻은 먼지를 털며, 남은 술과 식은 고기, 어디를 가나 괴로운 심정”(두보, 138쪽)이라고 노래하기도 했던 것이다.

10여 년 만에 어렵사리 관직을 얻게 되지만 처세가 서툴러 곧 관직에서 쫓겨나다시피 한다는 것도 매한가지다. 이로 인해 둘은 10여 년 동안 여러 지역을 방랑하게 되는데, 이들은 정작 어느 한곳에도 안주하지 못하면서 중국 전역이라 할 정도의 머나먼 거리를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도 포부도 없이 헤매고 다닌다. 관직을 얻기 전에는 중앙 고관들에게 벼슬을 구걸했다면, 관직을 잃고 난 후에는 지방 관리들에게 생활을 의지하는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또 그들의 삶이 안사의 난이라는 당시의 엄청난 역사적 소용돌이에 본의 아니게 휘말려 들어갔다는 것도 동일하다. 이백은 방랑중에 안사의 난을 만나는데, 촉으로 도피한 현종의 16번째 아들 영왕의 군대에 참여했다가 반역의 무리로 지목당해 죽을 고비를 맞기도 한다. 두보의 경우에는 어렵사리 관직을 얻은 후 가족을 데리러 간 사이 안사의 난이 발발하는데, 그 와중에 반군에 의해 장안에 억류되기도 하고 현종 계열로 분류된 방관 일파로 지목되어 관직에서 쫓겨나는 처지가 된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현종으로서도 숙종에게 양위를 할 리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두보의 삶도 예상치 못하게 굴절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방랑중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비슷하다. 이백은 술에 취해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고 하고, 두보는 오랜만에 얻어걸린 소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만 배탈이 나 죽었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백은 방랑 끝에 신세를 지기 위해 찾아간 당도현 현령의 집에서 옆구리가 썩어 들어가는 병으로 객사한다(서기 762년, 향년 62세). 학질과 천식, 중풍 등으로 고생하던 두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배를 타고 상강을 내려가다 악주 근처에서 생애를 마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770년, 59세).


이백과 두보가 갈라지는 곳 ―

이백과 두보는 (잠깐이기는 하지만) 실제 만나기도 하고 서로를 격려해 주기도 했으며, 또 위에서 본 것처럼 유사한 형태의 삶을 살았지만, 실은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사람들이었다.

우선 그 출신이 달랐다. 두보는 대대로 관리를 지낸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이백은 그 가계가 불분명하다. 아버지는 성도 이름도 확실치 않은 상인으로, 이백이 4~5세 무렵 서역에서 촉으로 이주해 성을 이씨로 바꾸었다고 한다(이 때문에 이백의 아버지가 이민족 출신이거나 수배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런 계층상의 차이는 두 사람의 인생의 향방과 구체적 모양새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우선 관직에 나가기 위해 두보는 당연히 과거를 염두에 두게 되지만, 이백은 가계가 불명확해 과거를 볼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백은 처음부터 유력자의 추천(몇 번 시험에서 낙방한 두보 역시 이 길을 택하게 된다)이나, 왕실과 유착되어 있던 도교 교단을 통해 조정에 진출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결국 이백은 도사 오균의 추천으로, 따라서 도사의 신분으로 천자를 알현하게 된다.

이 가계의 차이는 단지 조정 진출 과정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평생 이루고자 한 꿈과 희망에서부터 서로 큰 차이가 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출신의 상이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민의 집안에서 태어난 이백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는 화려한 옷을 입고 퇴청하여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춤과 노래를 즐기는 호사스런 생활이었다(?고풍? 제18수, 265쪽). 또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 선비의 세계에 끼어드는 방식으로 일신의 영달을 추구한 그에게, 왕실은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무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대로 왕실을 섬겨온 관료 가문 출신의 두보는 달랐다. 왕조의 성쇠가 그의 집안 및 자신의 성쇠와 직결되기 때문에 국가와 인민의 안위를 걱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그가 꿈꾸었던 삶은 전쟁의 참화가 없는 평화로운 사회와 그 속에서 유지되는 행복한 가정이었다(?위팔처사에게 드림?, 274쪽). 이백이나 두보 모두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지만 결국 그 목적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백과 두보는 가족을 대하는 모습도 전혀 달랐는데, 예를 들어 이백은 네 명의 아내를 두었으나 모두에게 냉담했고 두보는 단 한 명의 아내만을 두어 평생 소중히 아꼈다. 이는 주위 사람에 대한 태도로도 연결된다. 이백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하나뿐이었지만, 두보에게는 주위 사람도 자신 못지않게 소중했다.

하지만 이 역시 둘의 개인적인 인격과는 관계가 없다. 두보는 극소수의 혜택 받은 선비 가문의 출신으로서 일족도 모두 나름의 지위를 가진 관리들이었으므로 서로 도와주고 끌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환경에서 자랐다. 이에 비해 이백은 애초부터 서로 이끌어줄 친척도 동료도 없이 끝까지 고군분투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교유관계도 달랐는데, 이백은 가는 곳마다 누구와도 금방 친해지지만 또 금방 헤어진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를 사귀게 된다. 이에 비해 두보는 교제의 범위는 좁지만, 몇 안 되는 벗들과 깊은 친교를 유지했거나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이백과 두보의 관계에서도 그런 각자의 특징이 드러나는데, 이백은 두보를 곧 잊은 듯하지만 두보는 두고두고 이백을 떠올리며 전달될 가망성이 없는 편지를 시로 짓곤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