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나의 사표

삶읽기 2024. 2. 3. 19:17

조국은 나의 사표(師表)!
사람들은 조국 전 장관, 수석, 교수를 사법개혁의 화신이라고도 하고
천하의 인간 쓰레기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는 평험한 시민이었다. 우리의 평균적 욕망이 투여된.
명백한 불법이나 사기가 아니라면 수익율 좋은 투자처에다가 돈을 굴려서 강남에 건물을 사고 싶었다. 너나 없이 그렇듯이.
어떻게든 내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좋은 직장에 보내고 싶은 아버지였다. 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거기다가 사회의식이 넘쳐나서 보수꼴통들의 몹쓸짓을 언제나 준엄하게 심판하는 민주인사였다. 게다가 그는 이름도 무시무시한 '사노맹'의 맹원이었다지 않은가.

아마 누군가 이명박을 꿈꾸었다면, 나는 조국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말도 할 수 없이, 너무나도 멋진.
그리하여 그는 나의 사표다.

이름하야 '조국 사태' 뒤에,
나는 먼저 입바른 소리를 삼가기로 했다.
그 무슨 민주인사라도 되는양 사회 문제에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싶을 땐, 조국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내 자식을 통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되돌아 본다.
아마 아비로서의 바람이나 욕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그때마다 조국은 나의 사표가 되어줄 것이다.
은행잔고와 아파트 전세가의 등락에 여전히 전전긍긍할 터이지만, 전단지에 실려오는 교외의 목좋은 부동산 소식에 흔들릴 때면 조국을 되돌아보리라.

법과 원치, 정의의 화신 윤석열은 도무지 내 삶과는 무관한 이다.
우주 끝까지 쫓아가 악당을 무찌르는 그는 방금 만화영화를 찣고 우리 앞에 나선 정의의 용사이다.
그가 물리친 박근혜와 이명박, 그리고 이제 그가 거꾸러트리기로 작정한 문재인의 구별은 그에게 무의미하다. (미완)
(2020.12.8)

검역과 고립, 그리고 40일

삶읽기 2020. 3. 27. 12:13

검역, 격리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quarantine이 있다. 
40을 뜻하는 quarante(불어), quaranta(이탈리아어)에서 온 말이다.
중세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전염병 전파를 우려해 입항한 선박에서 40일간 선원의 하선을 금지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크루즈선에서의 하선을 금지했던 일본 정부는 아마 저 중세의 전염병 대책을 본땄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문뜩 지금 우리 모두는 간절히 땅을 밟아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배에 갇혀있는 그런 신세가 아닌가 생각했다.
'31번 환자'가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이 지난달 20일 전후였으니, 그리고 나서 심각한 공포가 우리를 엄습했고 자발적/강제적 '사회적 거리두기'가 우리 모두를 규율하기 시작했으니, 각자의 배 안에 갇힌 지 한달쯤 된 것 같다.
연기된 개학일 4월 6일은 '신천지'로 온 언론이 도배된 시점으로부터  40일쯤 되는 날이지 않을까.

40일이 지난다고 이 배에서 내리는 것이 허락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학교도 학원도 교회에도 가지 못하고 집안에 고립된 아이들에게 개통해 준 핸드폰 덕에 처음으로 가족 단톡방이 개설되었다.
예정대로라면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한글을 배우고 있었을 둘째는 아직 한글을 못깨쳤고 글도 모르며 단톡방에서 맹활약중이다.
컴퓨터 화면과 마이크를 상대로 한 독백의 강의는 벌써 3주차 녹화/녹음을 마쳤다.

노아의 방주를 타고 살아남은 이들은 비둘기를 통해 바깥이 안전한 줄을 알고 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고립된 배에서 내리겠지.
그러나 이 고립을 견디고 배에서 내린 우리는 과연 다른 사람을 향해 반갑게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을 붙잡고, 얼싸안을 수 있을까? 찾아오는 손님을 반갑게 환대할 수 있을까?
아마 중세의 저 40일을 견단 이들은 분명 그랬으리라. 
우리의 고립이 우울한 것은 지금의 고립감 때문이 아니라 그 이후가 더 무섭기 때문은 아닐까.

녹색당/정의당의 선거연합정당 관련 결정에 부쳐

삶읽기 2020. 3. 16. 12:15

녹색당이 전당원 투표를 통해 선거연합정당 참여를 결정했다.
마음이 복잡하다.
정의당의 선겨연합정당 불참 결정을 듣고, 노회찬과 심상정이 당원 투표 끝에 내린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탈당하여 유시민+이정희의 통합진보당에 합류한 이래, 거의 처음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누군가를 반대하기 위한 투표.
누군가가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하는 투표.
선거연합정당의 명분은 이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지하는 이에게 투표하고 싶다.
심지어 선거연합정당은 사실상 촛불을 앞세워 집권한 이들이 주도하고 있고, 그들은 견재 받고 심판 받아야 하는 주요한 정치세력이지 않은가? 이명박-박근혜가 다시 돌아온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으로 이 이상한 정당, 가설정당의 정당성은 충족되는 것인가?

그러나 아, 비판적 지지의 망령은 여전히 강고하다.
아니, 가장 기묘한 방식으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비판적 지지, 이명박근혜를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만든 정당에 투표함으로써 녹색당이 원내정당이 된다면? 이 정부의 실책을 가리는 역할을 할 민주연합론에 가담하여 녹색당이 의회에 진입하게 된다면?
트로이의 목마가 될 것인가, 아니면 녹색당까지 저들의 전리품이나 악세사리가 될 것인가?

정세에 따라서는 전선을 긋고 거기에 제 세력이 결합하는 운동은 물론 가능하다.
그런데 전선 저쪽이 아니라 이쪽에 정부, 집권여당이 있는 그런 정세는 배우지 못했다.
단순한 정부여당이 아니라 거기에는 재벌과 자본이 결탁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성은 박근혜와도 거래했지만, 문재인과도 한배를 탔다.
지배블록 내의 지분 싸움에 진보정당이 개입하며 오히려 전선을 완전히 착각하게 하고, 그리하여 결국 지배블록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게 하는 형국 아닌가?
이 정권은 검찰과의 요란한 내전을 치루는 것으로 개혁 의지를 뽐냈지만, 그런 힘의 반에 반도 재벌 개혁에는 투자하지 않았다.

전선은 다시 그어져야 한다.
민주노동당 이래 진보정당은 민주당이라는 자유주의 정당의 하위 종속변수로 자신을 위치 지우면서 생존해 왔다.
생존을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는 없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나는 그 진보정당의 운동이 오늘 파국에 처했음을 본다.
지배블록의 한 편에 섰을 때에만이 생존이 가능한 진보정당이란, 더이상 진보정당이 아니다.

그들이 진보신당을 깨고 나간 이래, 거의 한번도 심상정(과 노회찬)을 응원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오늘, 처음으로 정의당의 선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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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삶읽기 2019. 9. 16. 11:49

대체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잘 구분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그동안,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일을 운 좋게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혹독한 여름이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겠지.
(2019년 8월)

친일과 반일, 그리고 '앙가주망'의 사이에서

삶읽기 2019. 9. 16. 11:44

1.

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 말고 맞서야 한다, 는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의 결연한 멘트에 소름이 돋는다. 마치 집회를 마치고 교문 밖으로 나가기 직전 울려 퍼지던 투쟁결의문 낭독의 시간인 것만 같다.

 

‘앙가주망’을 외치는 대통령의 비서와 ‘더이상 지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듬직한 혹은 섬뜩한 국무회의 발언은 이들이 혹시라도 박정희나 전두환과 싸우던 시절의 기분으로, 아니면 의열단 단원의 심정으로 이 사태를 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분노의 땔감을 있는 대로 그러모아 불길을 지피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진보의 자리가 아니다.

 

2.

최고 권력자의 수석비서관 노릇이 ‘앙가주망’이라면 전두환을 찬양한 서정주는 참여 시인이란 말인가. 명민한 그가 그리 생각했을 리야 없을 것이다. 다만,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보수파와의 싸움을 마치 7,80년대 해직 교수가 된 기분으로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들 뿐이다. 게다가 그 싸움이란 것이 대개 정치적인 제스처에 그칠 뿐, 예컨대 지금과 같은 시기를 기회로 삼아 자본의 온갖 요구를 들어주려고 작정한 것처럼 나서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경제 영역으로 들어가면 피아를 식별하기조차 어려워진다.

 

‘조선일보 바로세우기’ 운동은 조선일보를 대표로 하는 보수파가 바로 친일파라는 손쉬운 논리를 채택함으로써 전선을 명확히 했지만(아, 청산되지 못하 과거여!), 그 전선은 종종 진보를 혼란에 빠트렸다. 애국과 매국은 보수의 논리이지 진보의 언어는 아니다. 진보는 비애국을 감수하고라도 소수자의 편에 서야 한다. 요컨대 강제 징용이나 일본군 성 노예 피해자들의 문제를 애국의 논리, 친일 반일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진보의 자세가 아니다. 소수자에 대한 국가권력과 자본의 폭력으로 접근할 때만이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예컨대 일본 내의 진보와의) 연대가 가능하다.

 

3.

사실 보다 근본적인 우려는 지금의 이 사태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정책의 큰 틀이 뒤바뀌는 국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데 있다. 예컨대 미국의 인도 태평양 구상에서 남한을 배제하는 것이 미국의 장기적인 전략이고(작년 싱가폴 회담 전후부터 이따금 보이던 분석이다.) 일본은 이를 감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일본이 내세우는 안보상의 문제라는 것이 영 개운치가 않다. 중국-러시아-북한과 한국-일본-미국의 대결 축에서 한국을 떼어낸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의 군사적 기여도가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아베의 이른바 전쟁을 할 수 있는 정상국가론과도 부합한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이는 말 그대로 위기이자 기회일 것이다. 미국의 패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남한의 지배 블록에게 재앙과 같은 것일 터. 그러나 새로운 사회의 구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무한한 잠재력의 공간이 열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해방 후 펼쳐졌던 가능성이 미국과 소련의 패권에 종속되면서 사라졌다면, 그러한 공간이 다시 열리는 셈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지금의 이 촛불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어떤 어둠을 밝혀야 하는 것인가.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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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 그리고 <아함경>

삶읽기 2018. 10. 8. 18:53

1.

뜨거운 여름이었다.

40도를 넘나들던 2018년 8월.

마흔다섯의 생일을 전후로 열흘 남짓.

왠지, 나는 내 인생의 반환점을 그때 돈 것만 같다.


2.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 더 이상은 버틸수가 없다, 고 중얼거렸다.

아내에게 사표를 내겠다고 말한 후, 출근해 보니 이미 10시가 넘은 상황. 예정된 부서회의가 있었고 회의에 들어가지 못한 나는 부장 책상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왔다.


부장, 실장과 몇차례 메일을 주고 받았고

처장이 집앞으로 찾아왔다. 꺼진 전화기에는 많은 동료들이 걱정의 말들을 남겼다.

괜히 눈물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다시 회사에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다짐만 굳어졌다.

부이사장이 불렀을 때도, 한번은 거쳐야 하는 일이니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손을 잡고 내 어깨를 잡고 내 팔뚝을 부여잡은 그이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라며 그래도 버티던 내게 그는 '건방진 소리 하지 말라'고 단 한번 언성을 높였다.


사표를 내고 열흘 남짓 만에 출근했고, 그로부터 한달하고도 보름이 더 지났다.

상황은 나아진 것이 '전혀' 없고, 더 심각하기만 하다. 아득하다.

내 딴에는 지난 2년 몸을 던졌다. 그러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가 보다.


3.

뜨거운 여름, <아함경>을 읽었다. 일테면 <화엄경>의 그 광대 무변한 세계(아, 그 감당 안 되는 장광설이여)와는 구별되는 <아함경>의 담백함. 그 뜨거운 여름 정신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 고타마를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보리수 아래서 얻은 깨달음은 연기의 법칙이다. 

그 어떤 것도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것. 

나는 그의 깨달음으로부터 후기구조주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이진경이 걸출한 책 한권을 제출했다)


늘 그렇듯, 삶은 오리무중이고, 갈 길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자, 다시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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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여우

삶읽기 2015. 1. 7. 10:56

지난 주말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린 술자리 이후 내내 괴롭다.
물론 연초부터 하염없이 무너진 몸 상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날 쏟아낸 허황한 말들이 자꾸만 나를 비웃는다.
공부라고는 출퇴근 길 떠들쳐보는 쪼각글이 전부인 주제에,
공부하는 이들 앞에서 설레발을 치다 우스운 꼴을 보인 거 같아 내내 괴롭다.
누군가 <지지리도 못난 삶의 머리끄덩이처럼>이라고 했던가.
공연한 집착이고 부질없는 짓인걸.
갈수록 힘에 겹고, 또 힘에 부친다. 산다는 게.
오늘따라 <얼음장 밑으로 빨려들어가 사리진>
동무 하나가 더 그립다. 

 (2015.1.7)

 

  "아 글쎄 그 여우 한마리가,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야속해서
   세상을 차듯 뒷발로 땅을 더러 탁탁 쳐보기도 했을 터인데
   먹을 것은 없고
   눈은 지지리도못난 삶의 머리끄덩이처럼 내리고
   여우 한 마리가, 그 작은 눈을 글썽이며
   그 눈 속에도 서러운 눈이 소문도 없이 내리리라 생각하고 나는
   문득 몇 해 전이던가 얼음장 밑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진
   동무 하나가 여우가 되어 나 보고 싶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방문을 열어제껴 보았던 것인데
   눈 내려 쌓이는 소리 같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아, 여우는 사라지고_
   여우가 사라진 뒤에도 눈은 내리고 또 내리는데"

                                                             (안도현, <그리운 여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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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세대

삶읽기 2013. 10. 15. 14:34

'그레이스 세대' - 언젠가 이런 말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레이스 백화점은 내가 92년 11월 학력고사 원서를 내러 올라오던 그날 개점했고
졸업하던 해이자 아이엠에프로 뒤숭숭하던 97년 현대로 넘어갔다.
선배들은 <신촌시장>을 경험했고, 후배들은 <그레이스>를 모른다.

나는 왠지 80년대 호황의 끝자락에 세워지고 아이엠에프 때 부질없이 무나진 그레이스가
내가 대학을 다니던 90년대 초중반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 상사들인 80년대 학번은 술자리에만 앉으면 정치 얘기다. <민주주의>는 제몫인양.
아예 술자리를 기피하는 후배들은 여전히 그 엄청난 스펙을 관리 중이다.

90년대가 시작하자마자 울려퍼진 80년대 후일담은 이제 지긋지긋하고
아이엠에프 이후에 대학을 다닌 이들하고는 여전히 쉽게 가까워지지가 않는다.

민주 투사가 아니던 우리는 선배들의 <쟁가>가 늘 부담스러웠고
그렇다고 신세대도 아니었던 까닭에 <락카페> 역시 멋적기는 마찬가지였다.

<날적이>는 아직도 학회실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것만 같고,
<오늘의 책>에서 휘날리던 메모는 아직도 그 수많은 약속들을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사라진 것처럼 난다랑도, 청홍도, 보은집도, 새와나무도 더이상 신촌에는 없다.
90년대가 거기에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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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쓴다는 것

삶읽기 2013. 4. 2. 10:52

물론 쉽게 이해되는 글을 쓴다는 것이 미덕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그러나 그 쉬움이 상식이라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기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사전에서 <맞벌이부부>를 <남편과 아내가 모두 일하는 부부.>라고 풀이하면 간단명료하다. 쉽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에 대한 거대한 편견에 기대고 있다. <외벌이부분>의 아내가 집 안팎에서 하는 것은 <일>이 아니고 <놀이>란 말인가? <일하는>이라는 이 맑고 투명한 듯이 보이는 언어에 <임노동 관계에 있는 노동>만을 의미 있는 <노동>으로 보는 이데올로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꿈은 사실 복지국가였다>는 박근혜는 말은, <아버지의 심오한 뜻>을 <쉽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뜻인데, 그래서 더 폭력적이다. 당신은 <복지국가>라는 것을 잘못이해하고 있다고 쥐어박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복지는 국가가 해 준다>는 이데올로기가 <상식>으로 깔려 있다는 것이 문제다. <국가>와 <복지>는 특수한 국면에서만 어울린다. 이른바 <복지>라는 것이 <우애와 연대>에 기반한다면, (베버가 지적했듯) <국가>는 <폭력의 독점>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쉽게 쓴다는 것은 여전히 미덕이다. 그러나 쉽다는 것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글쓰기는 (무의미하다기보다는) 위험하다. <쉬울수록> 그 힘은 더 세다.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저 간명한 명사구가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얼마나 간단히 제압했던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긴박한 정세와 엄중한 이론들은 한낱 웃음거리가 될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글을 어렵게 쓴다는 것은 분명 직무 유기이고, 그 자체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이에 비해 쉬운 글은 보기와는 다르게 엄청난 고통의 소산이다. 그러나 그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갈고 닦아 만들어진 것이 쇠사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사슬에 메인 자도, 심지어 그것을 만든 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힘이 세다. 말이란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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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명리

삶읽기 2013. 4. 1. 15:45

1.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틀이 필요하다. 그것이 프레임이든 담론이든.

<대학>에서 얘기하는 <格物致知>의 <格>도 <物>에다가 일정한 격자를 가져다 댄 후에 <앎>이 가능해진다는 것 아닌가.(물론 한유에서부터 시작하여 주자에 이르기까지 정통학설은 <격물>을 <물에 다가간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라지만.)

칸트의 선험적 범주 역시 그것이다. 이를 두고 러셀은 빨간색 안경을 쓰면 빨갛게, 파란색 안경을 쓰면 파랗게 세상이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주명리학 역시 세상을 읽고 나의 삶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해석해내는 하나의 틀이다.

온 세상을 하늘에서 땅 끝까지, 인간이든 사물이든, 말이든 행동이든 모두 화폐, 교환가치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물론 하나의 해석이다.

민족이나 신, 또는 과학이나 아름다움 등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해석의 틀 역시 자고이래로 무수히 많다.

요컨대 사주명리학 역시 그런 틀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타로점이나 별자리점도 비슷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주명리학은 우주적 배치와 관련을 맺는다.

목화토금수라는 오행과 천간(갑을병정무기경신입계), 지간(자축오미진사오미신유술해)이라는 순환적 시간관념이 결합하여 완성되는 것이 사주이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의 우주적 배치가 내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것.

그리고 이 사주명리의 기본 개념은 인간의 신체에도 그대로 결부된다.

예컨대 사주상 일간이 木인 나는 간의 기운이 좋다. 간-심-비(위)-폐-신의 오장은 목-화-토-금-수의 오행과 같이 연동되기 때문이다.

 

2.

사주명리학을 운명에 대한 예언으로 보지 않고 인생에 대한 해석으로 본다는 말은 가령 이런 식이다.

나는 일간이 木(그 중에서도 乙木)인데 나의 다른 사주 가운데 (木이 극剋하는) 土가 있어야 재물운이 있다. 그런데 나는 土가 하나도 없다. 재물운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원래 돈을 벌 팔자가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土가 없는 대신 다른 것들이 골고루 있다. 4주8자이므로 한 사람의 사주에는 오행이 8개가 있는데, 하나는 일간(자신을 뜻함)이고 나머지가 7개가 이 일간과 관계를 맺으며 운명을 결정한다. 내 경우에는 일간이 木이고, 그 외에 金이 둘, 水가 둘, 木이 둘, 火가 하나씩 있다.

水는 木을 生하는 것으로 공부운에 해당한다. 아 그렇구나, 돈 생길 데는 없어도 공부는 평생할 수 있겠구나! 대체로 예의바르다는데, 뭐 그건 그냥 그렇고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는단다. 사주명리학에서는 본인(의 일간)을 生하는 것으로 공부와 부모 그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를 꼽는다. 그래서 공부과 어머니가 같이 간다.

金은 木을 극(剋, 이기다)하는 것으로 관운에 해당한다. 어느 조직에서 잘 버텨날 팔자라는 것. 또는 (옛날 말로) 의식화 조직화를 잘 한다는 것. 은근히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것은 그래서...

木이 生하는 火는 기본적으로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서 이런 운이 있으면 말을 잘하거나 끼가 있고, 아니면 먹을 복이 있다. 그리고 자식운이 함께 간다. 나는 火가 하나 있으니 뭐 그럭저럭...

나의 일간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木인데 이 木이 다른 사중에 있으면 친구나 경쟁자, 혹은 형제운 있는데 나는 그 중에서도 경쟁자가 많은 것으로 나온다. 라이벌들이 즐비해서 괴롭기도 하지만, 어쨌든 뭔가 가치 있는 것을 두고 열심히 노력한다는 뜻이니까....

재미있는 것은 재물운, 공부운, 관운 등등이 가족 관계와 함께 간다는 것.(육친법)

예를 들어 남자는 재물운과 배우자의 운이 같이 간다.

그리고 여자는 관운과 배우자 운이 같이 간다.

예전에 결혼은 남자에게 노동력 하나가 생짜로 생기는 것이므로 재물운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또 여자가 새로운 조직에 가서 잘 적응하냐, 그 조직이 쓸만하냐 하는 것은 관운이면서 배우자 운일 수밖에 없다. 대갓집 살림을 좌지우지하던 안주인은 전통사회 여성이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모델.

 

3.

사주상으로 나는 서른아홉에 대운(帶運)이 있다.

인생살이가 크게 바뀐다는 것.

서른아홉 초에 학위를 했고 그해 말에 지금의 직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즈음부터 몸에 침과 뜸을 놓고 있다. 처음에는 수태음폐경을 다스리는 데 주력했고 오늘 아침에는 족삼리에 침을 꽂았다.

나는 지금 삶의 한 문턱을 넘고 있는가.

스무 살 언저리에 정치경제학과 우리말본을 읽으며 발견한 것과는 다른, 새로운 격자 속으로 들어가는 문턱. 그때는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 앞에서 멈칫거리고 주저하고 있는 것인가.

육친법으로 봤을 때, 일간을 生하는 인성(印星)의 운이 있다지 않은가. 내 사주에는.

자꾸 공부하여 새로운 틀을 끝없이 접하는 것이 내 팔자인지도 모르겠다.

 

2013.3.29. 昌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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