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읽기

쉽게 쓴다는 것

pourm 2013. 4. 2. 10:52

물론 쉽게 이해되는 글을 쓴다는 것이 미덕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그러나 그 쉬움이 상식이라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기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사전에서 <맞벌이부부>를 <남편과 아내가 모두 일하는 부부.>라고 풀이하면 간단명료하다. 쉽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에 대한 거대한 편견에 기대고 있다. <외벌이부분>의 아내가 집 안팎에서 하는 것은 <일>이 아니고 <놀이>란 말인가? <일하는>이라는 이 맑고 투명한 듯이 보이는 언어에 <임노동 관계에 있는 노동>만을 의미 있는 <노동>으로 보는 이데올로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꿈은 사실 복지국가였다>는 박근혜는 말은, <아버지의 심오한 뜻>을 <쉽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뜻인데, 그래서 더 폭력적이다. 당신은 <복지국가>라는 것을 잘못이해하고 있다고 쥐어박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복지는 국가가 해 준다>는 이데올로기가 <상식>으로 깔려 있다는 것이 문제다. <국가>와 <복지>는 특수한 국면에서만 어울린다. 이른바 <복지>라는 것이 <우애와 연대>에 기반한다면, (베버가 지적했듯) <국가>는 <폭력의 독점>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쉽게 쓴다는 것은 여전히 미덕이다. 그러나 쉽다는 것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글쓰기는 (무의미하다기보다는) 위험하다. <쉬울수록> 그 힘은 더 세다.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저 간명한 명사구가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얼마나 간단히 제압했던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긴박한 정세와 엄중한 이론들은 한낱 웃음거리가 될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글을 어렵게 쓴다는 것은 분명 직무 유기이고, 그 자체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이에 비해 쉬운 글은 보기와는 다르게 엄청난 고통의 소산이다. 그러나 그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갈고 닦아 만들어진 것이 쇠사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사슬에 메인 자도, 심지어 그것을 만든 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힘이 세다. 말이란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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