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장치란 무엇인가?>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

책일기 2024. 3. 2. 18:52

1. 
2월부터 읽고 있는 책들
녹색평론 184호, 2023년 겨울호
김덕영,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 길, 2007
조르조 아감멘, 장치란 무엇인가, 난장, 2010
민태기,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위즈덤하우스, 2023
최정운, 한국인의 탄생, 미지북스, 2013
장기영, 보란듯한 몸, 초과되는 말들: 베리어컨셔스 공연, 이안재, 2023

2.
<녹색평론>을 다시, 읽다.
김종철 선생의 돌아간 뒤에 왠지 <녹색평론>을 잘 읽지 않게 되었다. 
걸려 오는 전화에 응원의 말들을 엊어드리기는 했으나, 왠지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가끔씩 펼쳐 들어도, 오히려 김종철 선생이 만들던 때와 너무 똑같아, 예컨대 권두언의 문체마저 그대로라서 책장을 덮었던 적도 있다.
마음 먹고 다 늦은 겨울호를, 그렇다 이제 계간지가 된 <녹색평론> 겨울호를 펴들었다.
여전히 내 삶을 아프게 돌아보게 하는 글들과 현 정세를 넓은 안목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글, 
그리고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대한 성찰을 담은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 새로운 삶의 형태와 공존의 모습을 구체적인 일상으로 그리는 문장에 눈길을 멈추었다. 
마지막 광고란에서, 원주지역 독자모임을 제안합니다, 라는 문구를 읽고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설렜다. 

3.
조르조 아감멘의 <장치란 무엇인가?>.  
김진해 선생의 글을 읽다가 만난 책. 푸코의 담론 형성체 개념을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다. 
<말과 사물>에서 담론 외적 요소를 완전히 도외시 했던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비담론적 요소를 도입한다. 그리고 <감시와 처벌>에서부터  규율 사회, 지식과 권력이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게 된다.
예컨대 근대적인 형법학이라는 담론은 감옥이라는 비담론적 요소와 결합하여 근대적인 죄-처벌의 개념을 형성하고 또 근대적인 의미의 수감자, 죄인을 생산한다.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정신의학이라는 담론은 정신병원이라는 비담론적 요소와 결합하여 근대적인 정신병의 개념(의학적 치료의 대상인 병증으로서의 광기)을 형성하고 또 근대적인 의미의 정신질환자를 생산한다.
장치로서의 한국어학, 한국학이 결합하는 것은 어떤 비담론적 요소이며, 그렇게 해서 작동하게 되는 장치는 어떤 근대적 개념과 주체를 생산하는가?
무언가 생각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4.
김덕영의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
김덕영의 글은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계발되는 바가 크다.
특히 이 책에서는 게오르그 짐멜과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이들을 통해 짐멜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니체(노예의 도덕=근대 비판)와 베버(탈주술화, 과학, 합리성으로서의 근대)의 사이에 있다는 짐멜의 위치가 흥미로웠고,
자연과학적 요소가 강한 칸트의 철학을 상징체계에 적용한 카시러 등의 신칸트학파와의 대조를 통해서도 새롭게 알게된 바가 많았다.
다만, 짐멜의 가치이론을 한계효용학파의 그것에 가깝다고 하면서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본 고전경제학과 대조한 것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상대주의(한계효용학파)와 절대주의(아담 스미스, 맑스)의 대립 구도를 세운 것인데,
맑스의 정치경제학에서 '가치'는 단순히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도 아니다. 
노동도 상품의 가치도 모두 사회=시장에서의 교환에 의해서 비로소 결정되는 것이다. 소쉬르의 랑그가 그렇듯이. 사용가치와 구체노동, 그리고 파롤이 아니라, 시장에서의 교환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가치, 즉 교환가치와 추상노동, 그리고 랑그만이 정치경제학/일반언어학의 진정한 대상이 될 수 있는 것. 가라타지 고진은 정치경제학의 이런 특성에 대해 쇼펜하우어를 빗대어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정치경제학, 인류학, 언어학에서의 가치 이론. 맑스와 마르셀 모스(혹은 칼 폴라니), 그리고 소쉬르. 이들의 상관관계는 내게 여전히 해명의 대상이다. 
(2024.03.29)

<하이데거 극장>, <휘어진 시대>

책일기 2024. 2. 3. 16:25

1.
한달에 한번 정도 "책일기 삶읽기"를 쓰도록 한다.

지난 연말부터 새벽 시간이나 잠자기 전 짬을 내 세 종의 책을 읽고 있다.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1,2, 한길사, 2023
남영, <휘어진 시대>1,2,3, 궁리, 2023
박희병, <한국고전문학사 강의>1,2,3, 돌베개, 2023

연말 연초 대학원생들과 세미나에서 읽은 책
개리 거팅, <미셸 푸꼬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 훙은영 박상우 옮김, 백의, 1999

주시경의 저작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채로 <주시경전서> 3권에 수록된 <고등국어문전>의 정체를 (비로소 이제야!) 파악하기 위해 1908~1910년 사이에 발표된, <국어문전음학>, <국문연구>, <국어문법>의 내용과 교차 검토 중. 


2.
<하이데거 극장>을 시작한 것은 12월 초인 듯.
자브란스키의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를 읽다가 그의 장광설에 질려 버린 경험에 반신반의. 
한겨레 신문에서 읽던 고명섭의 글은 언제나 미적지극한 느낌이었기에 역시 반신반의.
그러나 하이데거의 거의 전 저작을 차례로 읽어주는 그의 진중함과 성실함에 감탄함.
후설 현상학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딜타이의 해석학, 신학생 시절의 신학에 이르까지 그의 사상에 녹아든 당대의 지적 흐름을 상세히 설명.
야스퍼스와의 관계, 한나 아렌트와의 밀회, 카시러와의 다보스 결투 등도 흥미있게 펼쳐진다.
물론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 취임과 더불어 시작되는 독일국가사회주의당과의 관계, 유대인에 대한 그의 발언 역시 가감없이 복원한다. 하이데거를 변호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좀 안쓰럽기는 하지만.
2권 중반 정도까지 읽다가 한쪽으로 치워놓은 상태. 
제2차 세계대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치와 결별한 하이데거는, 그러나 여전히 독일민족을 근대가 망쳐놓은 세계사를 구원할 현존재로 굳게 믿고 있다.

3.
하이데거 극장>과 함께 사 두었던 <휘어진 시대>를 읽기 시작한 것은 부산출장을 앞두고서이다.
이거라도 읽으면 1박 2일 출장이 마냥 헛되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 가기전에 1권을 마치고 2권을 기찻간에서 읽으려 했으나, 출장길에 겨우 1권을 다 읽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부의 '과학혁명'을 다룬다. 물론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원자폭탄이 주요 주제.
그러나 전제적인 얼개로 보았을 때 주인공은 양자역학. 1권은 양자역학이 나오기 위한 이론적 배경, 2권은 양자역학의 탄생, 3권은 양자역학과 전쟁,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비극적 결말.
유럽 각국의 물리학자, 수학자, 화학자들을 종횡무진 탐사하는 저자의 이야기 솜씨에 혀를 내두름.
영국의 톰슨/레더퍼드, 독일의 막스 프랑크/아인슈타인(베르린)과 힐베르트(괴팅겐), 프랑스의 퀴리 부부과 랑주뱅(이상은 1권의 주요 인물), 그리고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슈레딩거....
현대 물리학의 혁명적 변화를 내 초보적인 과학 지식으로는 따라가기 버거웠지만, 치열한 토론과 경쟁, 연대감으로 형성되는 과학자들의 공동체, 그리고 양차 대전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상세한 묘사/설명은 당시의 분위기를 어려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게 한다.     
진리를 찾아가는 그들의 뜨거운 의지, 연대의식이 전쟁 앞에서 여지없이 조국애로 수렴되어 갈갈이 찢겨 나가는 모습은 그런 면에서 더욱 씁쓸하다. 
2권 중반부를 읽고 있음.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세상에 내놓을 찰라.


4.
일반 상대성 이론은 물론이거니와 방사선의 발견으로부터 시작하여 원자론을 거쳐 양자역학의 성립에 이르는 길은 말할 것도 없이 고전 물리학의 붕괴를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이론은 뉴턴 역학을 완전히 대체한다. 질량을 가진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는 가정 대신, 질량을 가진 물체의 주위가 휘어져 버린다는 아이디어를 통해 우주의 운행을 설명한다는 것의 의미. 행성은 인력 때문에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직선 운동하고 있지만, 태양의 중력장 안에서 공간이 휘어져 있기 때문에 회전하는 것일 뿐이다. 
중력장은 물론 자기장과 전기장에서 받은 영감에 의한 것이다. 무질서하게 놓여 있던 쇳가루가 자석의 주위로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는 놀라운 이미지를 우리는 모두 갖고 있다. 부르디외를 비롯한 사회과학의 장 이론 역시 중력장이라는 개념과 무관치 않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사회적) 힘에 의해 형성된 중력장 안에서 그 중력장이 허락한 형태로 말하고 행동할 뿐이라는 것
무엇보다 특수상대성 이론과 일반상대성 이론은 뉴턴의 시공간 개념, 따라서 칸트의 철학적 세계관, 유크리드 기하학을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조건 하에서만 실현되는 제한적인 것으로 보게 다. 
아인슈타인은 끝내 인정하지 않았지만,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제출된 양자역학은 더욱 근본적이다. 추체에 의한 관찰 대상의 간섭. 관찰자의 관찰과 무관하게 대상은 거기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거기에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확률상으로 계산해 낼 수 있을 뿐, 전자의 명확한 위치와 운동량(질량*속도)은 알 수 없다. 운동량을 알려하면 위치가 모호해지고 정확한 위치를 알려면 운동량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 기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불확실성 원리의 기본 가정이다. 
관찰 행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바로 이러한 양자역학의 세계관을 비판하기 위해 제기된 유명한 사고 실험이다.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상자를 열러 보는 관찰자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바로 그 시대에 유사한 공간에서 제출된 하이데거의 철학은 어떠한가?
그가 추구한 존재의 진리는 '세계-내-존재'인 현존재에서 비로소 개시(開示), 즉 열려 보여진다.
여기서 주체와 대상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진리란 대상과의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의 진리론은 전형적인 주체 철학인 것이 아닐까?
현존재, 즉 인간에게 존재의 진리가 드러나는 사태는, 예컨대 죽음이라는 현사실성 앞에선 현존재의 결단, 기투에 의해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현재를 살아가는 세인의 공공성에서 벗어나는 순간 역시 바로 그때이다.
더구나 1930년대 현존재가 개인에서 도약하여 (게르만) 민족으로 화하는 장면을 읽는 것은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는 비슷한 시기 식민지 조선의 지식이 정인보가 기본적으로 개인이라는 단위에서 논의될 수 있는 '양지(良知)'를 겨레의 '얼'이라는 개념으로 도약하는 장면과 겹친다. 이런 과정은 사실 신채호와 박은식이 국수, 국혼이라는 개념을 제출하는 것과 근본적으로는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양지가 그렇듯이 혼백의 혼은 당연히 개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양지와, 혼, 그리고 현존재가 네이션과 결합하는 대목은 징후적인 현상으로 읽힌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물론 근대 극복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합리, 이성, 과학, 탈주술화에 대한 그의 비판 자체가 18세기 낭만주의에 젖줄을 대고 있는, 근대성의 또 다른 면모는 아닐까. 근대의 극복을 논하는 과정에서 동원되는 하이데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후기 하이데거가 거듭 다루는 훨덜린을 빼놓고 18세기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지젝은 하이데거의 철학을 나치즘에 바로 연결시키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내재한 어떤 점이 나치즘과 친연관계에 있었는가 하는 분석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철학적 과제일 터.
이는 교토학파의 근대초극론을 검토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사항일 것.


5.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한 일은 결국 근대 비판일지도 모른다.
그는 근대철학이 주체의 경험과 선험, 코기토와 비사유, 존재의 근원으로의 회귀와 되돌아옴을 진자처럼 반복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가 반과학이라고 보았던 탈주체의 정신분석과 문화인류학이 과연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얼마나 온전히 정초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서 보았을 때 하이데거의 철학이 근대의 에피스테메 안에 놓여 있는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푸코가 바랐던 것처럼 근대의 에피스테메를 넘어서기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분명할 터. 다만 언어에 대한 그 새로운 이론은 더 이상 언어학이 어닐 것이다. 그것은 '의미'와 '사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룰줄 아는 새로운 담론일 것이다.

(2024.1.1.)

‘사회언어학’을 찾아서- 언어 연구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사회언어학

책일기 2021. 5. 25. 09:44

1.

“전공이 어떻게 되시나요?”

가장 난감한 질문 가운데 하나다. 물론 질문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상황이 어떠한지에 따라 그저 “국문과 나왔습니다.”라는 간단한 말로 대답이 가능할 수도 있다. 또 역사나 철학, 문학 전공자의 질문이라면 ‘어학’이라는 한 마디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예컨대 국어학 전공자들 사이에서 나온 질문이라면, 내 대답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한때는 ‘사회언어학 전공’이라는 대답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한 적도 있다. 처음 학술발표를 한 곳도 한국사회언어학회였고, 난생 처음 학술논문을 게재한 곳 역시 <<사회언어학>>󰡕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내 전공이 과연 사회언어학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또 사회언어학 전공을 자임하는 분들한테서 일종의 위화감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사회언어학은 고사하고 그 상위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언어학의 세부 전공 어디에서도 내 공부의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낭패감에 휩싸였던 적이 여러 번이다.

석사 논문을 쓸 때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나의 문제의식은 근대적인 언어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데에 있었다. 물론 이 테마를 풀어내기 위해 주로 살핀 곳은 한반도 안쪽이었으나 때로는 동아시아, 더 나아가 서구 유럽의 ‘근대성(modernity)’이란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시경을 비롯해서 대체로 전문적인 한국어 연구자와 그들의 저술을 연구 대상으로 했지만, 당대의 주요한 역사 문학 철학 텍스트 역시 검토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석박사 두 번의 학위논문 심사 때마다 가장 대응하기 힘들었던 지적은 사회학, 역사학, 문학 전공의 심사위원들이 하는 문제제기가 아니라, ‘이것이 어떻게 어학 논문인지를 설득해보라’는 어학 전공 심사자들의 요구였다. 사회언어학이 내 전공이라는 신념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회언어학은 고사하고 ‘어학’인지도 의심스러운 내 연구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그렇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관심사는 ‘언어’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언어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담론과 인식의 문제였다.

 

2.

이제 막 공부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석사 과정 시절, 나는 아무 의심 없이 내 전공은 사회언어학이라고 믿었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정작 그것이 어떤 학문인지도 잘 모르면서, 음운론이나 통사론은 물론이고, 의미론이나 화용론보다도 더 진보적인 학문이라며 으스댔던 것도 같다. 그런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어느 세미나 자리에서 그러한 환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평소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선배 하나가 아주 냉소적인 어투로 ‘대체 사회언어학이란 게 뭐냐?’고 내게 물었다. 일관된 연구 대상과 방법론이 부재한 사회언어학이 과연 제대로 된 학문이기나 하냐는 힐난이었는데, 지금이라면 이런저런 이야기로 반박을 했겠지만, 달랑 번역된 두 권의 개론서를 읽은 것 말고는 사회언어학에 대해 별반 아는 게 없었던 나로서는, 분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워드워프(Wardhaugh)와 파솔드(Fasold)의 개론서를 읽으며 나 역시 여러 다양한 분야와 주제의 논의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았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테면 2014년과 2020년에 한국사회언어학회에서 출간한 총서 1, 2권을 읽어보면 한국의 사회언어학 연구가 얼마나 깊이 있고 수준 높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루어진 10개 내외의 주제들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연구 방법론이나 대상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물론 이들 사이에도 일정한 연관성은 있고, 그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임즈(Hymes)가 구별한 것과 같은 방식의 분류(Socially Realistic Linguistics, Socially Constituted Linguistics, Social as well as Linguistics)가 아마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지역이나 계층에 따른 변이 연구와 의사소통 민족지학, 그리고 이중(다중)언어 상황 및 언어계획의 문제 등이 그 구체적 주제일 텐데, 여기에는 상호작용 이론에 근거한 대화분석 같은 것이 추가되어야 할 터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너 가지의 분야로 정리한다고 해서 사회언어학의 일관된 연구 방법론이나 대상이 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 사이의 학문적 배경이나 관점의 상이함이 도드라질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공통점을 아예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균질적 언어공동체’라는 가상의 실체를 전제하고 있는, 이른바 ‘순수 언어학’에 대한 문제제기. 이것이 바로 모든 사회언어학적 연구를 관통하는 일관된 문제의식이 아닐까?

 

3.

비판적 담화분석의 이론가로 잘 알려진 페어클라우프(Fairclough)는 소쉬르의 ‘랑그’라는 개념이 ‘국어(national language)’의 신화가 정점에 달한 20세기 초에 등장한 것이 과연 우연이었겠는가, 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한 바 있다. 그가 지적한 바와 같이 ‘순수 언어학’은 지역과 계층과 세대와 젠더의 차이에 따른 무수한 변이와 변종을 간단히 무시하고 ‘균질적 언어공동체’를 가정한다. 그리고 그 ‘균질적 언어공동체’라는 이론적 가정은 의도치 않게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소쉬르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자연과학적 모델에 입각했던 선배 세대와는 달리 ‘사회’라는 관점을 언어 연구에 도입한 인물이다. 그가 ‘사회적 사실’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학을 정초한 뒤르켐(Durkheim)의 영향을 받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문제는 소쉬르의 ‘사회’를 간단히 ‘민족’ 혹은 ‘국가’와 등치시켰던 그의 후예들에게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역과 계층과 세대와 젠더에 따른 다양한 ‘사회’와 그 수만큼의 다양한 ‘랑그’의 존재를 언어학은 짐짓 외면하고 있지 않았는가.

사회언어학은 단지 언어학을 보완하거나 보조하는 학문이 아니라, 기존 언어학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불온한 학문이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음운론과 형태론, 통사론과 의미론의 옆에 얌전히 앉아 언어학을 완성하는 게 아니라, 언어학의 근본 가정을 의문시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사회언어학의 역할이 아닐까. ‘하나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했던 공동체에 내재한 차이와 이질성의 확인, 그리고 그 속의 수많은 ‘랑그’와 그것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다양성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모색하는 데에까지 나가야 한다고 본다. 사회언어학은 ‘순수 언어학’에 대한 비판 정신 못지않게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언어 연구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성찰, 그 자체를 사회언어학의 한 분야로 설정할 수 있게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전공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나도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어질 테니까.

(<사회언어학회소식지>57호. 2021/5/24)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탈출기

책일기 2020. 8. 11. 11:36

서평. 백승주,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탈출기>, 은행나무, 2019.

1.

그는 언어학자이자 언어교육의 최전선에 있었던 언어교육학자이다.

그리고 기호학과 언어심리학, 혹은 심리언어학에 조예가 깊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특히 언어적 규칙을 공유하지 않은 타자의 입장에서 겪은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언어학자이자 언어교육학자로서 상하이에서 보낸 1년을 소개한다.

상하이의 뒷골목과 박물관, 백화점을 걷던 그는 느닷없이 신촌의 지하철과 이대역 근처의 자취방, 그리고 제주의 풍광과 역사로 우리를 안내한다.

마오와 중국 공산당은 우리의 국가주의를 되돌아보게 하고, 상하이에 만난 기괴한 건축물을 통해 그의 일가가 겪은 4.3의 비극을 차분히 이야기한다.

2.

그와 나는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처음 만났다.

휴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강의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우리는, 96년 '연대 사태' 덕에 지어진 건물을 빠져나와 뒷산의 오솔길로 산책을 했다.

누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는 별로 기억에 없다.

다만, 선배도 동기도 모두가 떠나고 없던 그 대학원에서, 가끔 만나 술한잔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했다는 기억은 선명하다.

그의 결혼식에 갔고, 얼마 후 술취한 그를 이끌고 그의 신혼방에까지 신발도 채 벗지 못한 채 난입했고, 그의 딸 이현이의 돌잔치에 (맨정신으로) 갔댔다.

이제 그는 광주에 나는 원주에 있다.

전화로 가끔 안부를 묻는다.

3

그는 언어학자이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다.

내 공부는 언어학자들이 벌여놓은 일들에 대해 되돌아보는 것이다.

나는 언어학이 기본적으로 근대 부르주아 정치학에 봉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물론 실제로는 평등하지 않다. 그러나 이상적으로나마 평등하다고 믿게끔하는 여러가지 정치적 이데올로기/제도/장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언어학이라고 생각한다. (촘스키)

민족의 구성원은 물론 현실적으로 평등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공유한다고 가정하는 '국어문법'은 그들의 평등성을 가상적으로 입증한다. (주시경/최현배)

나는 내 공부의 의미를 (옳고 그름을 떠나) 이해하는 이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공부를 이해한다고 믿고, 심지어 내 공부를 지지한다고 믿는 사람 중에 하나가 그이다.

물론 그 이해와 지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특히 그가 종종인용하는 진화생물학(에 기반한 심리학)을 우려하는 편이다.

그러나 오랜 동안 그에게 의지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오래 그를 '동지'로 생각하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4.

작년 여름에 받은 책을 이제서야 다 읽고 한두마디 적어둔다.

페이스북에서 대략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펼쳐 읽다보니, 새롭고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다.

때론 날렵하고, 때론 시니컬한 그의 문장은 매혹적이다.

술자리에서의 그처럼.

『공자와 논어』

책일기 2018. 1. 12. 17:27

1,

조국 노나라에서 자신의 이상을 펼치지 못한 공자는 위나라를 시작으로 14년 동안 자신을 팔기 위해 각국을 떠돌았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좋은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沽之哉 沽之哉 我待價者也 <子罕>)

 

56살부터 14, 70여 명의 군주를 만나고 다녔지만, 자신의 이상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정치를 맡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70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오경을 다듬으며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어찌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으랴. (“군자는 일생을 마치도록 이름이 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 <위령공>)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人不之不溫, 不亦君子乎 <학이>) 

<논어>를 펼치자마자 만나는, 필시 말년의 어록임이 분명할 이 대목은 그래서 차라리 처연하다. 70이 넘도록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찾아 헤맨 공자는 이 <학이>편에서 공부하는 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자신과 제자들을 향해 주문처럼 읊조린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말라!"

 

제자들 역시 <학이>편의 마지막 대목을 같은 내용으로 편집함으로써 스승의 고통에 공명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남을 알아주지 못할까를 걱정하라.”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그리고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이 논어의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은, 공자 학단이 얼마나 이 문제로 자주 번민에 빠졌었는지를 웅변한다.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이인>

不患人知不己知 患其不能也 <헌문>

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其知也 <위령공>

 

2.

내가 <논어>를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배운 것은 십이삼 년 전의 일이니까 서른을 좀 넘기고서이다. 그러나 <논어>, 거기에 등장하는 이들의 마음에 공명하며 읽기 시작한 것은 사오년 전인 마흔쯤부터가 아닌가 싶다. 그런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바로 위에 나오는 구절을 읽으며 내 마음이 무척 아프다는 것을 깨닫고서부터이다.


요시카와 고지로의 공자와 논어를 재독했다.

논어 해설서는 제법 많이 나와 있지만, 이 책만큼 공자의 일생과 당시의 주변 정세를 통해 논어를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는 책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전반부는 잡지 <新潮>10회 동안 연재된 것이고, 후반부는 NHK에서 한달 동안(27) 강연 형식으로 방송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을 내 나름의 키워드로 대강 정리한 것.

(보통의 일본책들과는 달리 소제목은 물론이고 장제목도 달리지 않아, 나중에 필요한 곳을 찾아 읽기가 어려워 일부러 정리했다.)

 

3.

공자와 논어, 요시카와 고지로 지음, 조영렬 옮김, 뿌리와이파리, 2006



 

중국의 지혜 - 공자에 대하여

1. 공자라는 사람

2. 논어라는 책

3, . 인문. 인본주의.

4. 정치

5. 학문

6. 위나라. 위령공-남자-괴외-태자. 공희(자로의 죽음)

7. 제나라. 제장공-최저-경봉/경사

8. 제경공-안영

9. 제경공-안영-공자. -노 회담.

10. 공자의 강인함. 인간/문명에 대한 확신.

 

고전강좌 논어

1. 일본에서의 논어 수용1

2. 일본에서의 논어 수용2

3. 공자 전기1

4. 공자 전기2 - 출생. 어릴 적 총명함.

5. 공자 전기3 - 좌구명. 子産, 소시적 잡인. 음악

6. 공자 전기4 - 제경공과의 일화. -노회담.

7. “군군 신신 부부 자자”(제경공과의 문답)의 해석

8. 제장공-최저, 경봉. 제경공.

9. 공자와 양화

10. 공자와 공산불요

11. 공자와 정치

12. 공자와 노자

13. 공자와 노장적 세계관

14. 공자와 인간의 길

15.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의 논어 해석

16. <향당>편의 해석. 제경공과의 대면. (제경공-노정공 회담)

17. 공자의 노나라 재직 시절. 공자와 전쟁/살육

18. 공자 노나라 재직 시절2 - 삼가(三家) 문제 주유(周遊) 14

19. 공자의 14년 주유 - 위나라 (광에서의 위기. 子見南子)

20. 공자가 바라보는

21. 공자의 주유 - 공자 학단의 상호 신뢰. 당시 세간의 평. 공자의 소회

22. 공자의 말년1 - 오경 편정. 제나라 강공 시해 사건. 기린 출현. 죽기 전 꿈.

23. 공자의 말년2 - 인간에 대한 믿음.

24. 인간에 대한 신뢰. 끊임 없는 노력 강조(不患人不己知 患不知())

25.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 - . 천명. 사명. 운명.

26. 중용, 절도 있는 삶의 중시

27. 학문/문학의 중시

『언어 · 헤게모니 · 권력』서평 (4)

책일기 2018. 1. 8. 17:42

언어적 근대의 극복을 위하여

– 가스야 게스케의 언어 · 헤게모니 · 권력(고영진 · 형진의 옮김소명출판, 2016) 서평 (4)


4. 언어적 근대의 극복을 위하여

4.1.

애석하게도 필자는 가스야 게스케의 언어 헤게모니 권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문제를 제기할 만한 능력이 없다. 애초부터 그보다는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15편의 논문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 대부분이 국내에서는 잘 소개되지 않은 주제와 시각들이라 가급적 저자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핵심을 추려내려고 노력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지극히 회의적이지만, 재독 삼독 그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문제의식이 우리 학계에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애초의 판단만큼은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공간과 언어의 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스야의 고뇌에 찬 서술은 언어=영토=공동체에 기반한 언어에 대한 자연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입장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필시 두 종류의 선과 면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면을 구획하는 질서의 선과 다방면으로 산란하여 서로 착종하는 선. 전자의 선은 출발점으로 회귀함으로써 일정한 동질적 영역을 획정한다. 거기에는 공백은 있을 수 없으며, 외부로 통하는 지하도도 없다. 모든 선이 그어지기 전에 그에 앞서서 존재하는 좌표 공간으로의 면이 있다. 그런데 후자에서는, 면은 선의 집합이고, 하나의 선이 그어질 때마다 면은 변화를 입는다. 그 면은 결코 동질적인 원리가 관철되고 있지는 않다. 선의 밀도와 방향에 따라서, 면은 희박한 부분과 농밀한 부분을 가지고, 여기저기에는 이질적인 공백마저도 존재한다. 그것은 동질적 좌표 공간이 아니라, 휘어지고 뒤틀린 비뚤어진 공간이다.

말은 결코 면을 획정하지 않는, 산란하는 선이다. 말은 결코 영토를 가지지 않는다. (266)

 

말에는 언제나 사회정치적인 문제가 개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상태를 매우 예외적이고 불순한 것으로 치부하는 이른바 자연주의, 자유주의적 입장이 실은 말을 면에 안에 가두고 특정 영토에 붙잡아 매고 있는 언어=영토=공동체라는 이데올로기와 공모 관계에 있음을 가스야는 이 책의 곳곳에서 고발하고 있다.

말은 결코 영토를 가지지 않으며 면을 획정하지 않는다는 가스야의 주장은, 그렇다면 그런 것이 아니라면 과연 말은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근대에 성립된 언어에 대한 이러한 관념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다. 사실 근대를 공부하는 이유 역시, 목적론적인 사고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면, 근대의 극복을 모색하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가스야는 다른 언어나 변종과의 영역 분담을 불허하고 따라서 소수 언어, 방언의 멸절을 가져오는 “‘국어체제로부터의 탈각을 원한다면, 복수의 언어들 사이에서의 기능 분담을 인정하면서도, 언어 간의 계층제를 끊임없이 붕괴시켜 간다는 대단히 어려운 실천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37)

그러나 이 책을 통틀어 근대의 극복, 혹은 근대 이후의 언어 인식과 관련해서 직접 참고할 만한 부분은 이 정도뿐인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국어의 지배에 대항해 온 말이, 자립화하자마자, 스스로를 국어의 논리에 따라서 규범화해 간다는 순환의 문제를 제기기하고 이러한 순환을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는 국어이후의 언어 인식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물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 물음에 대한 답, 국어이후의 언어 인식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닫고 침묵한다.(42)

 

4.2.

그에게 근대적 언어 인식을 극복할 수 있는 미래상을 그려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데리다의 말을 빌려 미래의 민주주의가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오직 부정적(否定的) 형식을 통해서만 제시되어야 한다고까지 하였기 때문이다.(284이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그리고 프랑스 사회의 극우화 과정에서 하버마스와 크리스테바가 자연적 네이션 개념에 맞서 계몽주의에 입각한 네이션 개념을 천명하였으나 결국 공히 타자의 목소리가 억압될 수 있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며 내린 결론이다

따라서 국어이후의 언어 인식은 국어의 논리가 갖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는 식의 부정적 형태로만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스야의 신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몇몇 구절을 열쇳말 삼아 국어이후의 언어 인식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더듬어 보는 것마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복수 언어의 기능 분담같은 것은, 비록 그 구체적 실현 형태에 대해서는 침묵하였지만, 그가 비교적 분명한 목소리로 언급한 극복 방안으로서 충분히 숙고할 만한 개념이다. 중세적 다이글로시아를 넘어서는 길이 반드시 국어와 같은 체제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의 여러 방언들 사이에서 이탈리아 국민어를 창출하려는 과정에서 대립했던 만조니와 아스콜리에 관한 대목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25) 각 방언들을 피렌체어로 치환하려 했던 만조니를 비판하며 아스콜리가 제시했던 것이 방언들 사이에서의 일종의 기능 분담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복수 언어의 기능 분담이라는 문제 말고도 우리가 주목해야 부분은 만조니와 아스콜리의 대립에 관한 글을 가스야가 근대 산문의 문체라는 일견 전혀 다른 문제로 매듭짓고 있다는 점이다. 가스야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필자가 보기에 아스콜리가 아니라 만조니와 같은 시각이 결국은 근대의 대세가 된 것도 이 근대적 산문 문체의 특수한 성격과 관련이 있다.

 

가스야가 보기에 근대의 산문은 언어적 작위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는 무표적인 언어를 이상적인 것으로 삼는다. 그것은 화자도, 청자도, 콘텍스트도, 그리고 발화 장면에도 의존하지 않는 무규정적인 언어 양식을 뜻하며 따라서 모든 사물에 중립적인 기술이 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그런 언어이다.(204-206그리고 그때 언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족적인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언어학 역시 이와 같이 레토릭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는 영도(零度, zero degree)의 문체를 표준으로 삼고 있으나 특정 문체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레토릭이 배제된 무표적인 것이므로 그것이 하나의 문체라는 것 자체도 깨닫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조니가 약혼자를 쓰는 과정에서 이러한 문체를 형성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사실이 웅변하듯이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산문 문체는 결코 자연적인것이 아니다. 그리고 언어의 기능 분담이라는 면에서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던 만조니와 아스콜리였지만 문어의 문체에 있어서만큼은 의견이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국어이후의 언어 인식을 구상하는 데에는 이러한 근대적 산문 문체의 이데올로기 역시 문제시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직접적으로 문체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개념을 통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을 재해석하는 부분(31언어와 권력)에서도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전통 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에로의 이행에 수반되는 아비투스의 변용은 언어 자본, 나아가서 문화 자본의 원리가 구비전승 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이행하는 것과 병행하고 있다”(294-295)는 것이 가스야의 생각인데, ‘실천의 감각에 충실한 구술문화에 비해 문자문화는 표상의 논리에 압도된다결국 문자문화는 콘덱스트에 의존하지 않고 객관적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세련된 코드’, “모든 상황을 초월한 정통 언어라는 관념을 낳게 된다. 화자에도, 청자에도, 콘텍스트에도 의존하지 않는 문체란 결국 그런 것들로 인한 변이를 완전히 지워버린 문장을 의미한다그리고 신체적 감각이 일소되고 표상의 논리가 전일하게 지배하는 문체란 낭송과 같은 것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구술성이 완전히 배제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만약 근대적 산문 문체의 이후를 논한다면 아마도 여기에서 단초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4.3.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개념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제3부에서는 국어형성의 구체적 과정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러한 근대적 언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 주요 개념들을 재검토하고 있는데(예컨대 3장에서는 언어 기호의 자의성이 의미하는 바를 소쉬르 대 방브니스트라는 익숙한 구도가 아니라 계몽주의 언어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재조명한다) 2장에서는 언어학에서든 상식적 차원에서든 별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언어공동체개념을 문제로 삼고 있다. 다각도의 검토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언어공동체하나의 단일한 언어라는 가상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무엇을 해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이것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의 언어적 상호 작용에 기반해야 한다고 제언하는데, 이때의 언어공동체란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거시적인 수준에 있는 것일 수 없으며, 언어만이 아니라 사회문화 혹은 정치적 차원 같은 외적 요소가 고려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한 개인이 동시에 복수의 언어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그 소속을 변경하는 것 역시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316)

그러나 사실 가스야가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문제를 삼고자 하는 것은 언어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라는 개념 자체이며 이것을 논할 때마다 끊임없이 언어가 호출되는 상황이다. 예컨대 퇴니스의 유명한 개념인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의 문제에서 전자는 후자와 달리 자연적인 것에 기반하며 또 개인의 행위나 의지에 앞서 존재하고 그 개인을 절대적으로 구속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게마인샤프트와 가장 친연성을 갖고 있는 것은 언어공동체일 것이다. 그러한 점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 모어라는 표현일 텐데, 실제로 가스야는 모어 파시즘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피히테까지 소급되는 독일적 전통을 찬찬히 더듬는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논의에 언어가 불려나오는 것은 모어로 상징되는 정서적 일체감의 맥락에서만은 아니다. 소장문법학파를 비롯한 역사언어학자들이 인간이 함부로 언어를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과학적인 모델을 설정했던 데 비해, 소쉬르는 인간이 언어를 좌지우지 할 수 없는 것은 언어가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때의 사회적이라는 것은 분명히 개인의 행위나 의지를 뛰어넘어 그것을 구속한다는 뒤르케임의 사회적 사실’(fait social)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게마인샤프트나 모어 파시즘과는 어찌 보면 정반대의 차원이기는 하지만 소쉬르와 뒤르케임 식의 사회라고 해서 언어가 호출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스야는 게마인샤프트와 같은 정서적 공동체에서의 언어 문제를 우려했지만, 홉스나 로크로 대변되는 계약에 근거한 사회의 언어 인식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일까?

 

4.4.

가령 무언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가 있는 화자는 사회적으로 미리 합의된 코드에 맞추어 메시지를 완성하고(encoding) 그것을 전달받은 청자는 앞서의 그 코드에 맞추어 화자가 발신한 메시지를 해독한다(decoding). ‘코드를 특정한 표현(기표)에 어떠한 가치(기의)를 부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체계라고 할 때, 의사소통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화자와 청자가 그리고 사회가 공유하는 이 코드다.

그런데 이 코드란 것은 원칙적으로 개별 화자나 청자, 구체적 맥락 등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근대 산문 문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구체적 장면과 무관하게 중립적으로 존재하는 언어가 실재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언어학이 관심을 기울이는 거의 유일한 것 역시 이 코드에 관한 사항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문제로 삼고 싶은 부분은 이러한 의사소통 모델에서 등가교환이라는, 근대 사회에 와서 일반화된 교환양식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의 당사자나 그 발화 상황, 맥락에 앞서 기호의 가치’(의미)를 결정하는 코드가 사전에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있다는 가정은, 등가교환에서 교환 대상(상품)가치’(가격)가 교환의 당사자나 그 상황, 절차 등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장에 의해 결정된다는 전제와 매우 유사한 면이 있다.

의사소통이든 등가교환이든 그것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기호나 교환 대상의 가치를 결정하는 특수한 장치인데, 그것은 어느 누구의 인위적 개입도 없이 사회를 통해 자연스럽게결정된다(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사회자연이 아니라 인위와 대립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는 것이다.

 

18세기 이후 사회에 대한 인식의 문제에서 시장과 같이 그 고유한 법칙과 역학을 갖는 경제적 영역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많은 이들에 의해 지적되어 온 바이다. 그리고 이때의 사회는 개인들이 자신의 본성에 충실할 때, 즉 다른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합리적으로 해나갈 때 자동적으로 조절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유방임주의 경제관에 입각하여 사회를 이해하는 관점을 비판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등가교환이라는 교환양식의 문제에 천착하여 사회의 구성 원리를 새롭게 모색하려 한 것은 역시 증여론으로 대표되는 마르셀 모스와 그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칼 폴라니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 증여와 답례라는 상호 의무에 기반하는 교환양식은 언어의 문제에 있어서도 큰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화자와 청자가 공유하는 코드에 의해 기호의 가치가 결정되는 의사소통 모델에서는 등가교환에서와 같이 해당 행위의 당사자와 상황이 완전히 주변화된다.

그러나 증여-답례의 교환양식에서는 사전에 공유해야 하는 코드 같은 것이 없어도 교환이 얼마든지 가능할 뿐만 아니라(오히려 교환을 통해 비로소 상대방의 코드를 확인하게 된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떠한 절차와 방법으로전달하느냐 하는 것 모두가 교환의 의미를 결정하는 데 관여한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이 증여-답례의 모델에서는 교환 행위를 통해 당사자들 간에 (상호 의무감에 기인하는) 일정한 관계가 생성되고 유지,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등가교환에서는 물론 원칙적으로 교환이 일회적인 것이어서 교환에 관여하는 사람들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 자체가 부차적이고 예외적인 일이다.

그러나 증여와 답례로 이루어지는 교환은 교환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애나 연대감 같은 것이 생겨나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정하게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거나 기왕의 관계가 안정적으로 관리되며 때로는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기도 하는데, 심지어 교환 자체보다 이러한 관계의 형성이나 유지가 교환 행위의 목적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등가교환에서는 물론 무엇인가가 교환되면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것 자체를 설명할 길이 없다.

 

 

4.5.

앞서 우리는 특정한 코드에 기대어 정보를 전달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의 의사소통 모델이 소쉬르나 뒤르케임 식의 사회를 가정한다고 했다. 물론 등가교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모델에서도 말을 주고받으면서 대화 참여자들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형성되거나, 기왕의 관계를 적절하게 유지 관리하기 위해서 (정보 소통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무의미한) 말들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어렵다. 말을 한다는 행위를 단지 정보 전달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말을 주고받으면서 대화 참여자들 사이의 관계가 형성/유지/변화된다는 것이 의사소통의 본질인지는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입장은 사회를 필수적으로 가정해야만 성립하는 관점이지만 정작 그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서는, ‘언어공동체와 시장에 대한 설명이 그렇듯이 인위적 개입없이 자연스럽게형성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실질적 설명도 제공하기 어렵다는 점만큼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또한 이 사회란 것이 등가교환에서는 시장을 매개로 해서, 그리고 의사소통 모델에서는 언어공동체을 매개로 해서 대개 근대의 민족국가에 귀착된다는 공통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증여와 답례의 교환양식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사회를 가정할 필요 자체가 없을뿐더러 반대로 이에 천착하면 실제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공동체/사회의 실상을 생생히 포착해낼 가능성이 있다. 증여와 답례를 통해 생성, 유지되는 행위자들 간의 일정한 관계가 공동체나 사회의 성립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언어공동체개념에 문제를 지적하며 제안했던 가스야의 대안(실제의 언어적 상호작용에 기반한 공동체)과도 부합하는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민주주의는 부정적 형태로만 그려져야 한다고 본 가스야의 입장에 선다면, 공동체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에 그친 그의 글에서 너무 멀리까지 온 것 같다. 그러나 근대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사회를 재검토하는 작업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덧붙여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회계약론이나 자유방임주의의 사회가 반드시 인간의 본질에서부터 출발하는 데 비해(리바이어던과 같은 괴물이 없으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게 되는, 또는 최대한 이기적이면서도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인간) 증여-답례의 교환에서는 인간에 대한 어떠한 규정이나 선이해도 불필요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증여-답례의 모델에 기대어 사회와 언어의 문제를 재검토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을 위한 자리를 전혀 가지지 않는 새로운 에피스테메를 구상하여 근대를 극복하고자 했던, 그리하여 촘스키와 같이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을 밝혀내려는 근대 특유의 편집증에 대하여 철학적 비웃음으로 일관했던 푸코의 입장과도 부합하는 면이 있다고 하겠다.



 

『언어 · 헤게모니 · 권력』서평 (3)

책일기 2018. 1. 4. 17:03

언어적 근대의 극복을 위하여

– 가스야 게스케의 언어 · 헤게모니 · 권력(고영진 · 형진의 옮김소명출판, 2016) 서평 (3)


3. ‘국어의 사상과 언어의 존재론이라는 문제 - 전체론적 언어상의 형성

3.1.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스야는 이 책의 제12장에서 다이글로시아 개념을 통해 국어발생론을 매우 요령 있게 정리하고 있다. 다이글로시아란 물론 어떤 사회에서 한 언어의 두 변종, 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이들의 사용 영역이 공식적인 공간과 일상적인 공간으로 엄격하게 구분되는 현상을 말한다.

편의상 두 개의 변종, 혹은 언어를 상층어와 하층어로 나눌 때 상층어는 그 공동체의 가치의 원천이 되는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전통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고 따라서 고도로 규범화되어 있다. 반면에 하층어는 상층어에 비해 그 위신이 대단히 낮으며 문자로 적히는 일조차 드물다. 하층어는 대체로 그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모어인데 비해 상층어는 교육 기관 등에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습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결국 다이글로시아란 공/, /, /말이라는 이분법에 따라서, 두 개의 언어 변종이 엄격한 계층제를 이루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33) 물론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은 대체로 이러한 다이글로시아 상태를 극복하고 국어로 상징되는 단일 언어 사회의 구축과 궤를 같이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사용하던 성스러운 글말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 입말로밖에는 사용하지 않던 세속어를 전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격상시킨 것이다.

계층적이기는 해도 서로 다른 변종이 각자 자신의 영역을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다이글로시아가 분리에 의한 지배라면(상층어는 절대로 하층어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하나의 변종이 모든 영역을 무차별적으로 전유한다는 점에서 국어에 의한 단일언어 사회는 동화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35)

그리고 이때의 동화에 의한 지배는 법적 제도적 강제와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민 사회에서 작동하는 헤게모니 장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게스야가 주장하고자 하는 논지의 핵심임은 앞서 강조한 바와 같다.

사실 언어적 근대를 중세적 보편 문어에서 세속어로의 전환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제 상식과도 같은 것이어서 진부하기까지 할 정도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러한 전환의 성격과 양상이 어떠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주목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스야의 논의가 갖는 의미는 물론 근대 사회의 특수한 권력 작동 양식을 통해 그것을 선명히 제시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게스야의 국어 발생론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국어의 사상적 의미를 따지기 위해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힘, 즉 서로 뒤얽혀 있으면서도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두 개의 힘을 고찰할 것을 주문한다.

그 두 개의 힘은 각각 개별주의적인 방향과 보편주의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인데, 개별주의적으로 향하는 힘이란 물론 고전 라틴어 아랍어 한문과 같은 초지역적인 문명어의 문어 규범에서 개별 민족어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자연주의적이고 음성중심주의적 언어관이다.

그 이전의 다이글로시아 상황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오랜 기간의 수련을 거쳐 획득한 언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언어였지만, 이제 모든 화자가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습득하는 것이라야 진정한 언어가 된다. 언어의 본질은 문자가 아니라 소리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음성중심주의 역시 문어로만 존재하는 초지역적인 공통어가 아니라 실제 발화로 살아 생동하는세속어만을 진정한 언어로 보는 이 개별주의적인 힘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국어의 발생에 관여하는 또 다른 힘은 보편주의적 방향으로 향하는 것인데, 이때의 보편주의적 방향성이란 다이글로시아에서와는 달리 각각의 개별 언어가 가질 수 있는 표상 기능과 대상 영역이 끝없이 확대되어 간다는 특성을 말하다.(40)

다이글로시아 상태에서는 고전 라틴어 아랍어 한문 등의 지배 언어가 세상의 진리를 독점하고 있었으며 이들 언어를 배우는 것 자체가 세상의 진리를 획득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다이글로시아가 무너진다는 것은 특정 언어에 의한 진리의 독점이 더 이상 불가능해짐을 의미하며 국어로 격상된 세속어로도 보편적 지식의 획득이 가능하다는 언어 인식의 성립을 뜻한다.

가스야는 이러한 국어에서의 보편주의적 방향이 세계의 모든 요소를 스스로의 내부에 거두어 들여, 자족하는 폐쇄된 영역을 만들어내려는 언어의 운동이라고 결론짓고 있다.(42) 다른 언어나 변종과의 영역 분담을 불허하는 국어의 이런 특성이 바로 소수어의 멸절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은 그가 지적한 바와 같이 국어이후의 언어 인식을 모색하는 데 반드시 참조해야 할 지점일 것이다.

 

3.2.

그런데 국어의 발생과 결부되어 있는 이 두 가지 방향의 힘은, 비록 가스야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인 전체론적인 언어상의 형성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론적인 언어상이란 특정한 언어, “‘X라는 언어 전체가 불가분의 통일체를 이루고, 그 근저에는 일관된 원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말하는 것인데 그에 의하면 언어에 대한 이런 관념이 출현하는 시기는 근대 유럽의 국민어 형성 과정과 일치한다는 것이다.(50-51)

화자는 자신이 어떤 개별 언어, 즉 한국어나 일본어, 또는 영어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개별 언어의 존재에 대해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스야에 따르면, ‘내가 어떤 언어를 말한다는 명제는 특정한 신념의 표현일 뿐이며, 그 신념을 진리로 간주하게 될 때 비로소 그 X어라는 대상이 사회적으로 설정된다는 것이다.

“‘X라는 대상의 자명성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언어학을 포함한 ‘X에 대한 허다한 담론들이 그것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X어의 등질성이라는 관념 역시 “X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제 담론의 등질성이 낳는 효과에 불과하다는 것이 가스야의 주장이다.(183)

그리고 이러한 전체론적인 언어상의 형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가스야가 지목하는 것이 바로 각각의 언어는 고유의 영토에 토착한다는 의식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균질적 주권이 빈틈없이 작용하는 영토와 그 경계가 전에 없이 중요해진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특정한 영토와 그 위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언어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의식은 확실히 근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언어를 특정한 지역이나 공간에 할당하는 이러한 식의 사고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언어 지도의 작성이다. 예컨대 1800년대 초반 프랑스 내무성의 통계국은 프랑스의 전 국토를 아우르는 언어 조사를 단행하였는데, 가스야에 따르면 이 조사의 특징은 농산물 지도의 작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역 구분의 기준을 정치적 행정 구역이 아니라 지질학적 토양의 패턴이나 지층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는 언어와 농산물을 아날로지, 즉 유추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했음을 뜻하는데, 마치 농산물의 산출이 자연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것처럼 언어 역시 그것이 사용되는 지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하겠다.(149-157) 그리고 언어가 특정한 영토에 토착하는 것이라는 이러한 생각은 영토의 동질성언어의 동질성을 보증한다는, 또는 그래야만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이 책의 32언어공동체 개념 재고에서 가스야가 제기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공동체라는 지극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은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변이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단일한 언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곤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언어가 특정한 영토에 토착한다는 이 근대적 언어 인식은 매우 문제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토(국토)를 매개로 언어(국어)와 공동체(국민)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시켜 시켜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인식은 결국 동일한 영토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일체성이라는 관념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각각의 언어가 그 고유한 영토에 토착한다는 의식, 그리고 그 언어는 불가분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이른바 전체론적 언어상의 형성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럽의 국민어 형성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이는 물론 근대 유럽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의 경우 가장 이른 시기에 국어문법을 집필한 이들 가운데 하나인 주시경은 아래에서와 같이 영토=공통체=언어의 의식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其域其種其種其言一境一種一種一種케함이라. …… 我國亞細亞洲 東方 溫帶으로 靈明長白山東西南으로 溫和三海半島此域我人種祖産土音하매 此人族此音此域言語하니 檀祖開國後로만 여도 四千餘年傳用我韓國語天然特性으로 獨立되는 니라 국어음전음학(1908), 자국언문(自國言文)


여기서 주시경은 조선이 백두산과 삼면의 바다로 경계 지어져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하늘이 일정한 경계 안에 특정한 종()의 사람을 살게 하며 그 사람들로 하여금 독립의 표가 되는 국어를 말하게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시경은 대한제국 시기 학부에 제출한 연구보고서에서는 백두산 이북의 아무르 강, 쑹화 강, 랴오허 강 주변의 낮은 땅들이 아주 먼 옛날에는 모두 바다였기 때문에 결국 조선 반도가 아시아 대륙과 단절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대범한 상상을 펼치는데 이 역시 우리의 고유한 언어가 이 강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난갈, 짬듬갈같은 나름의 개념과 범주들을 통해 국어의 일관되고 통일된 모습을 가시화하려 했던 주시경의 시도는 이와 같이 언어=영토=공동체라는 관점을 전제로 한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3

그런데 언어가 그 고유한 영토에 토착하는 것이라는 의식과 함께 전체론적 언어상이 근대에 비로소 형성되었다고 보는 가스야의 주장은 사회언어학을 포함한 기존의 언어학에 대한 자못 심각한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개별적이고 독립된 언어들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어 존재한다는 상식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러한 상식에 기반하여 (영어학, 독어학, 일본어학, 한국어학과 같은) 개별 언어학이 성립함에도 불구하고, 언어학은 정작 그 개별 언어 전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예컨대 영어학은 영어의 음운이나 통사, 어휘와 같은 각각의 층위에 대해서는 그것을 이루는 제 요소와 그 기능이 무엇인지 논할 수 있지만, 그런 제 요소가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영어 그 자체에 관해서는, 그것을 언급하는 순간 그러한 행위는 언어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 된다.

예를 들어 18세기 말 프랑스어가 라틴어나 그리스어보다 훨씬 우월한 이성적인 언어임을 내세우며 명석하지 않은 것은 프랑스어가 아니다라고 했던 리바롤의 선언(프랑스어의 보편성에 대하여, 1784)은 이제 최소한 언어학의 영역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가스야가 제기하고 있듯이 언어학이 고유명사로서의 ‘X를 언어 연구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어 내적 사실에 집착하는 경우이든 사회언어학과 같이 언어 외적 사실에 주목하는 경우이든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촘스키는 고유명사로서의 ‘X라는 상식적인개념은 사회정치적인 차원을 가지므로 과학적 접근에서는 배제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사회언어학에서도 수많은 변종들이 연구 대상이 될 뿐 하나의 단일한 개별 언어는 현실에 기인하지 않는 임시구조물에 불과하다고 치부될 뿐이다.(16-19) 물론 가스야가 제기하는 문제는 리바롤과 같은 유의 시대착오적 관점을 언어학에 다시 부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근대에 들어 전체론적 언어상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근대 국민국가의 언어 정책 역시 그에 기반해이 수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언어학에서는 불가분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그 ‘X라는 개별 언어 전체에 대한 논의 자체가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가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언어학이 언어의 존재 그 자체를 지탱하는 사회적 권력의 작용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사정을 분명히 하기 위해 소개하는 개념이 바로 언어의 전체 기능이라는 것이다.

 

프라하 학파의 보가트이료프와 호탈렉에 의해 제기되었다는 언어의 전체 기능이란 개념은 각각의 층위나 그것을 이루는 요소의 기능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새로운 기능을 뜻하는 것으로서, 개별 언어에 전체성을 부여하고 언어에서의 우리의식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스야에 따르면 이 전체 기능언어적 사실과 사회적 사실의 경계에 있고, 이 양쪽에서 야기되는 복합적 역학 관계에 의해 그 강도와 질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 전체 기능이란 것이 언어 쪽에서 보면 사회적인 것으로 보이고 사회 쪽에서 보면 언어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이 언어와 사회라는 두 개의 힘의 접촉면에서 성립하기 때문인데, 따라서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냐 언어적인 것이냐를 따지는 물음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며 중요한 것은 그 전체 기능을 결정하는 복합적인 역학 관계라는 것이다.(21-22)

그러나 ‘X가 그 고유한 영토에서 토착하여 아무런 인위적 개입 없이 자연 발생한 것이고, 따라서 거기에 가해지는 어떠한 개입도 부자연스럽고 비정상적인 과정일 뿐이라는 언어 의식에서는 위와 같은 의미의, ‘복합적인 역학 관계에 의해 성립하는 전체 기능이란 것 자체가 인식 불가능의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언어학에서 ‘X라는 개별 언어 전체에 대한 논의 자체가 배제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에 대한 자연주의, 자유주의에 입각한 접근은 그러나 소수 언어의 멸절과 같은 문제에 대해, 그것에 어떠한 정치적 법률적 강제가 개입되어 있지 않는 한, 자연스러운 언어의 자연사(自然死)’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언어 · 헤게모니 · 권력』서평 (2)

책일기 2018. 1. 3. 16:45

언어적 근대의 극복을 위하여

– 가스야 게스케의 언어 · 헤게모니 · 권력(고영진 · 형진의 옮김소명출판, 2016) 서평 (2)


2. 근대의 새로운 권력 양식과 언어의 문제 - 언어와 헤게모니


2.1.

가스야 게스케의 언어 · 헤게모니 · 권력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세 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가 근대 사회의 언어 문제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총론적인 성격의 글들이다.

언어에 대한 인위적 개임을 거부하는 근대 언어학의 언어적 자유방임주의가 실은 근대국가의 국어형성에 일정한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있다거나(언어인식과 언어정책 자연주의와 자유주의의 함정), 다이글로시아 상황과의 대비를 통해 국어발생론을 매우 요령 있게 정리하고 개별주의적이면서도 보편주의적인 방향을 취하는 근대 특유의 언어관이 국어사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주장(국어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 발생적 고찰), 그리고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하나하나의 언어가 전체론적 성격을 갖는 통일체라는 생각이 사실은 근대 주권국가의 모델에서 기원한 특정 언어는 고유한 영토에 토착하는 것이라는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설명(전체론적 언어상­고귀한 속어에서 근대국민어로) 등은 우리가 근대 사회의 언어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데 매우 계발적인 관점을 제공해 준다.

1부의 이러한 글들이 그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던 중요한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으나, 그러나 이 책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는 그러한 총론적이고 개괄적 관점을 뒷받침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의 구체적인 분석에 있다고 하겠다.

8편으로 구성된 이 책의 2부는 대체로 유럽 특히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상황을 중심으로 언어에 대한 근대의 특수한 관점이나 습속이 형성되고 정착되는 과정을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분석하고 있는데,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그 내용 자체가 국내에서는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거니와 분석의 방향이나 시각의 신선함은 국내외를 막론하고도 단연 독보적인 것이라고 감히 단언하고 싶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다루고 있는 2부의 1언어와 헤게모니이다. 사실 이 한 편의 글은 이 책의 전체에서 매우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부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의 총론이라 할 내용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조망하고 있다면, 2부는 이에 대한 각론 격의 글들로서 역사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2부의 앞머리에 위치한 이 언어와 헤게모니는 물론 근대 사회의 언어 문제에 관한 일반론을 전개하는 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이나 이탈리아 통일운동, 즉 리소르지멘토 과정에서 소수언어나 방언을 배제하고 단일한 국어를 형성해 나가는 언어 정책이나 그 속에서 제출된 주장이나 입장을 다루는 글도, 또 그와 밀접하게 연관된 이론이나 현상을 다루고 있는 글도 아니다.

그러나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은 그것이 명시적으로 언급되든 그렇지 않든 그러한 역사적 과정을 분석하는 데 있어 이 책의 저자가 늘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언어와 헤게모니는 이후에 이어지는 2부의 다른 글을 읽는데 있어 하나의 지침과도 같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 ‘국어를 중심에 놓고 근대 사회의 언어 문제를 총론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1부에 비해서는 각론이라 하겠지만, 1부를 뒷받침 하는 2부의 다른 글들에 대해서는 일반론이 된다는 것이고, 이는 다시 말해 2부의 첫머리를 장식한 언어와 헤게모니가 결국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축이자 이 책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열쇠라는 뜻이 된다.

그러한 사실은 헤게모니를 직접 다룬 것은 21장뿐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서명이 언어 · 헤게모니 · 권력이라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2.2

사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그의 언어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지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국내에 소개된 그람시의 전기에서도 토리노 대학 재학시절 그의 전공이 근대언어학이었으며 재학 당시 청년문법학파에 비판적이었던 신언어학파의 마테오 바르톨리 교수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던 학생이라는 사실이 소개되어 있다.

또 가스야가 이 책에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시피 프랑코 로 피파로는 이미 그람시에게 있어서의 언어, 지식인, 헤게모니에서 언어에 대한 이론적 관심은 그람시의 사상 형성을 그 출발점에서부터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일 뿐만 아니라, 그람시 사상의 핵을 이루는 헤게모니 개념 역시 언어 개신의 전파 양상을, 바르톨리의 언어학의 도움을 빌려서 이론적으로 고찰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61)

뿐만 아니라 그람시는 씌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언어활동에 내재하는 규범문법과 씌어진 규범문법을 구별하였는데, 전자는 시민사회의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헤게모니에 대응한다면 후자는 현실의 혼질적인 언어 상태에서, 균질적 전체를 추출하여 도달해야 할 문화의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정치사회의 인위적 강제에 기초하는 디타투라(dittatura)’에 대응한다는 것이다.(67)

또 그람시가 이탈리아의 언어 통일에 대한 문제에서 각 지방의 방언을 피렌체어로 치환해야 한다고 보았던 만조니에 맞서, ‘국어는 문화 활동에 의해 고양되는 창조적 동의에 의해서만 창출되며 법률적 명령에 의한 언어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본 아스콜리를 계승하고 있다는 게 가스야가 요약한 로 피파로의 그람시 이해다.(72)

문법의 문제를, 그리고 이탈리아의 언어 통일 문제를 그람시가 이와 같이 그의 핵심 개념인 헤게모니 이론과 깊숙이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실은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2.3.

그러나 가스야는 이러한 로 피파로의 그람시 이해에, 그리고 언어 이론과 헤게모니 이론을 연결 짓는 방식에 대단히 큰 의문을 제기한다.

, 로 피파로가 시민사회와 정치사회, 동의와 강제를 이분법적으로 구별하고 이런 이분법에 의해 헤게모니를 설명하고 있으나, 다시 말해 시민사회의 동의를 얻으면 헤게모니를 획득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정치적 법률적 강제에 의한 것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가스야는 헤게모니가 이런 이분법(시민사회 대 정치사회, 동의 대 강제)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러한 이분법 자체가 헤게모니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헤게모니 개념이 가리키고자 하는 것이 중심을 가지지 않는 비균질적인 장에서의 역학 관계의 분자적 변동과 그 침투 과정”(78)이라면 로 피파로가 전제하는 이분법은 애당초 성립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결정적으로 로 피파로의 이러한 설명은 헤게모니 장치를 근대적인 권력 양식이라고 본 그람시의 입장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로 피파로는 그람시의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헤게모니라는 개념이 그의 대학 은사인 바르톨리 교수의 이론, 즉 언어의 개신과 전파가 한 언어의 사용자들이 다른 언어의 문화적 권위를 수용한 결과라는 주장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권위동의라는 것은 헤게모니의 효과로서 사후적으로 승인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헤게모니의 성립 근거로서 권위동의를 상정한다는 것은 결과를 원인으로 오인한 것이라는 가스야의 지적은 이미 위에서도 밝힌 바이거니와 가스야가 더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관점이 헤게모니 개념의 특수한 역사성을 은폐한다는 사실이다.

그람시는 헤게모니 장치를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되어 처음으로 등장한 권력 양식으로 파악하고 있는데(79) 로 피파로에 의해 헤개모니 개념의 기원으로 파악된, 문화적 권의의 수용에 의한 언어의 개신과 전파는 전혀 근대 사회에 특수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 국가에서 경쟁적으로 국어를 창출해나가는 과정을 헤게모니 개념을 통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그 개념의 특수한 역사성을 온전히 복원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가스야의 주장이다.

 

부르주아지가 법 개념에 도입한, 따라서 또한 국가의 기능에 도입한 혁명은, 특히 순응시키고자 하는 의지(따라서 법과 국가의 윤리성)에 있다. 이전의 지배계급들은 자기계급의 영역을 기술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확대시키고자 하지 않았다는 뜻에서 근본적으로 보수적이었다. 그들의 개념은 폐쇄적인 신분의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유기체, 전 사회를 흡수할 능력이 있는 유기체, 전 사회를 자기 자신의 문화적 경제적 수준으로 동화시킬 수 있는 유기체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모든 국가 기능이 변화하였는데, 국가는 이제 교육자가 되었다. (안토니오 그람시, 그람시의 옥중수고1, 308.)

 

 

이전의 지배계급들이 폐쇄된 카스트를 만드는 데 만족했다면,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의 전 역역을 자신의 문화적 경제적 수준으로 동화시키려 하기 때문에 이전 시대와 구별되는 근대 국가의 특성은 (강압이 아니라) 교육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에는 사회 공간 전체가,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교육 장치가 되고, ‘규율의 학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자발적 동의란 것은 그 교묘한 교육적 전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79)

헤게모니 장치가 작동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넓은 의미의 교육의 과정에서이고 이를 통해 시민사회는 제재나 강제적인 의무없이 작동하지만, 집단적인 압력을 행사하며, 관습이나 사고와 행동의 방식, 도덕 들의 진화라는 형태로 객관적인 결과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거듭 반복해서 강조하거니와 이전 사회와는 다른 근대 사회의 특수한 권력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그람시가 씌어지기 이전의 자발적 규범문법의 존재를 지적한 것은 이것이 단지 시민사회의 자발적 동의를 획득한 헤게모니에 대응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근대 국가에서는 언어의 통일이 통치의 가능성을 가져다주는 헤게모니 장치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 된다.(82)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근대 사회 이전에는 모든 국민이 동일한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기이한 것이었고, 방언에서 국어로의 치환은 따라서 근대 시기 이전부터 있던 언어의 개신, 전파와는 전혀 다른 현상이다.

그것은 근대 사회의 특수한 권력 양식인 헤게모니 장치가 작동되는 회로를 따라갈 때만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될 터이지만, 동의에 의한 것이냐 강제에 의한 것이냐를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로 피파로의 관점을 따를 경우에는 프랑스 혁명 기간 그레구아르 같은 인물에 의해 추진된 언어 정책은 인위적 강제나 억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민 사회의 동의에 기반한 민주주의적이고 문화주의적이었다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발적 동의에 의한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가 아니라 그 자발적 동의를 얻어나가는 논리와 메커니즘이 무엇이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가스야가 그레구아르의 언어 정책을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일반문법을 지목하고, 그 일반문법의 정치학을 집요할 정도로 강조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2.4

반혁명의 위험을 미연에 제거한다는 목적에서 발레르가 공화국에서 사용되는 프랑스어 이외의 언어, 즉 브르타뉴어, 바스크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의 근절을 위해 법적이고 정치적인 강제를 사용하려 했던 것에 비하면 그레구아르는 확실히 달랐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강제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레구아르와 같은 이들이 혁명으로 인해 출현한 새로운 공간의 특성을 간파해 냈다는 데 있다. 그레구아르는 강제, 억압, 금지로 설명되는 권력과는 별종의 권력이 작동하는 장이자, “개인의 자발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것을 개발=이용함으로서 작동하는 공간(177)인 시민 사회의 중요성을 감지했고 언어의 통일 역시 이 시민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의 하나로 보았다.

즉 근대적 합리성으로 혁신한 새로운 언어는 (혁명의 제일 과제인 동시에 법적 강제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새로운 습속의 형성, 그리고 그것을 통한 근대적 시민의 창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이거니와, 새롭게 혁신된 언어를 시민사회의 각 영역에서 통일적으로 사용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새로운 습속의 형성과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레구아르가 언어 통일을 생활공간의 획일화와 같은 레벨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인데, 그의 이와 같은 사상을 지탱하는 것은 사회 조정의 학문으로서 성립한 이데올로지=관념학이었다.(234) 새로운 시민의 형성을 목표로 한 관념학파의 교육 프로그램에서 일반문법이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은 앞서 언급한 대로이다.

그렇다면 시민 사회에서 작동하는 근대 특유의 권력 양식으로서의 헤게모니 장치와 언어 통일의 논리적인 연결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마 일반문법일 것이다. 일반문법에 의한 언어 통일은 시민사회의 요소요소에서 작동하는 헤게모니 장치를 전제하는 것이라면, 헤게모니 장치는 일반문법이 목표로 했던 것과 같은 언어의 혁신과 통일에 의해 창출된 근대적인 시민 사회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각주는 편의상 생략하였음.)



 

『언어 · 헤게모니 · 권력』서평 (1)

책일기 2018. 1. 1. 16:21

언어적 근대의 극복을 위하여

가스야 게스케의 언어 · 헤게모니 · 권력(고영진 · 형진의 옮김, 소명출판, 2016) 서평 (1)



1. 촘스키와 푸코, 그리고 가스야의 일반문법 - 일반문법의 정치학


1.1.

197111월 네덜란드의 한 티비 프로그램에서는 촘스키와 푸코가 나눈 대담이 방영되었다. 촘스키는 영어로, 푸코는 프랑스어로 진행한 이 대담의 주제는 인간의 본성’, ‘정의와 권력같은 것이었는데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반대 방향에서 터널을 뚫어오고 있는 두 철학자로 소개된 이들의 토론은 그러나 그리 생산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한쪽이 인간의 본성사회의 정의가 무엇을 뜻하고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해 다른 한쪽은 그러한 개념이 성립하는가부터가 지극히 의심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논의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고까지 보고 있으니 토론이 겉돌기만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가령 촘스키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은 창조성이고, 그 주된 근거는 물론 인간의 언어능력이다. 매우 제한되고 불충분한 언어 자료밖에는 접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특정 시기가 지나면 고도로 조직되고 체계적인, 심지어 그가 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말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이 지니는 언어능력의 놀라운 창조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능력은 언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 본능적인 지식, 제한된 정보로부터 고도로 복잡하고 조직된 지식을 이끌어내게 하는 도식 체계야말로 인간성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며 이 도식 체계의 덩어리, 생래적인 조직 원리의 덩어리,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 지적 개인적 행동을 인도한다고 보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인간성이 과학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특정 시기의 여러 담론을 제한하고 분류하고 그들 간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인식론적 지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그러한 질문이 가져오는 효과와 그것이 하필이면 특정 시대에 유난히 강조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물론 바게트 빵처럼 팔려나갔다는 말과 사물에서 그가 펼친 논지와 그대로 연결된다.

각각의 시대마다 지식의 내용과 형태 등을 제한하는 에피스테메가 있다는 것이 그것인데, 그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물에 대한 앎을 규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것이 유사성이었던 데 비해 고전주의 시대(17~18세기)에 들어서면 서로 얼마나 유사한가가 아니라 그들 간의 동일성과 차이를 분명히 가려내야만 가능해지는 표상의 체계가 지식의 본질이 된다그러나 18세기 말이 되면 표상은 더 이상 지식이나 사유와 동일시되지 못하고 표상의 근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 과학이 출현하게 되는 것의 의미는 바로 표상의 근원/담지자로서의 인간이 지식의 대상으로 등장하게 되는 이러한 지식의 역사를 고려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푸코의 입장이다.

인간을 위한 자리를 전혀 가지지 않는 새로운 에피스테메를 구상하여 근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더 나아가 여전히 인간의 본질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는 철학적 비웃음/침묵으로 응대하겠다는 푸코와 크로마뇽 시대부터 전혀 변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는 것이 현대 과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보는 촘스키가 과연 적절한 토론의 상대이었는지는 애초부터 의심스러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1.2.

그러나 물론 이 둘 사이의 토론이 애초부터 허무맹랑한 기획은 아니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주목을 받던 두 학자는 1966년 약속이나 한 듯이 자신들이 그동안 해온 작업의 일반론이라 할 저술을 내놓았는데, 공교롭게도 두 학자 모두 17세기 뽀르-르와이얄의 일반문법을 주요한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통사 구조론(1957)을 출간한 데에 이어 1959년 스키너의 행동주의 심리학을 정면으로 비판하여 주목을 받은 촘스키는 통사 이론의 제양상(1965)을 통해 자신의 언어 이론을 본격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내놓은 저작이 바로 데카르트학파 언어학(1966)인데 여기서 그는 그의 언어학이 데카르트로부터 기원하는 이성주의, 합리주의라는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 근거로 뽀르-르와이얄의 일반문법을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푸코 역시 개별 담론의 형성을 분석했던 광기의 역사(1961)임상의학의 탄생(1963)과는 달리 특정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에피스테메의 존재를 주장하는 말과 사물(1966)에서 뽀르-르와이얄의 일반문법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표상의 에피스테메가 앎의 담론을 규정했던, 그리하여 언어에 대한 분석이 지식의 영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고전주의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뽀르-르와이얄의 일반문법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이 공히 뽀르-르와이얄의 일반문법을 주요한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는 있지만, 그 맥락은 전혀 다르다. 촘스키가 이 일반문법으로부터 읽어낸 것은 자신이 주장하는 표층구조와 심층구조의 이원론이며, 모든 언어에 공통적인 심층구조가 인간에게 내재된 정신적인 구조이자 심적 실재라는 이성주의 언어학이었다그러나 푸코에게 있어 일반문법은 르네상스 시대를 지배한 유사성의 에피스테메를 대체하였으나 결국에는 근대의 인간과학에게 다시 자리를 내줄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 속성, 분절, 지시, 파생의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표상 체계의 한 원형이다다시 말해 촘스키는 이 일반문법으로부터 역사를 초월하는 인간의 이성, 정신을 찾아내고 푸코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지식의 역사와 그것을 제한하는 인식의 틀을 분석해낸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일반문법을 분석하는 이들의 논의가 전혀 다른 입장에 서 있기는 하지만, 두 논의에서 모두 일반문법을 둘러싼 정치나 사회경제적인 맥락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발생한 이래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려는 촘스키에게 역사란 애시 당초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의 역사를 다루는 푸코가 일반문법의 사회사적 배경이라든지 그것이 현실과 어떤 관련을 맺었는지 등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물론 이와 같이 말과 사물이 담론 외적 요소를 도외시했다는 지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직후의 저작인 지식의 고고학(1969)에서는 언표라는 개념의 도입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려 했던 점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그러나 근대적 권력의 작동 방식을 문제 삼은 감시와 처벌(1975) 같은 이후의 저작에서 뽀르-르와이얄의 일반문법은 더 이상 다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촘스키에서는 물론이고 푸코에서 역시 우리는 일반문법의 정치학을 읽어낼 수가 없다.

 

1.3

일반문법이란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위에서 언급한 촘스키와 푸코의 저작을 통해서이고 그 이래 일반문법 하면 으레 뽀르-르와이얄을 떠올린다. 그러나 가스야 게스케에 따르면 일반문법이 이론적으로 발전해서 정점에 달한 것은 포르-르와이얄 문법이 쓰여진 17세기가 아니라 오히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엽이다.”그리고 일반문법은 고전적 에피스테메에 충실할 필요도, ‘데카르트파일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이들은 인식의 오류의 원천에는 언어의 오용이 있다는 로크의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들 데카르트파가 아닌 로크파의 일반문법은 결코 언어의 초월론적 체계를 발견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개념의 형성 과정을 바탕으로 언어의 보편적 규칙을 이끌어 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일반문법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세속 언어를 가능한 한 완성에 근접시키는욕망의 결과인 동시에 그 완전태의 기준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이 일반문법에 대해 푸코에게서도 촘스키에게서도 얻을 수 없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가스야가 강조하려는 것은 다름 아닌 일반문법의 정치학이다그가 제시하는 일반문법의 정치학은 프랑스 혁명의 언어정책에 깊숙이 관여하여 방언의 근절을 시도했던 그레구아르로부터 시작하고 교육을 통해 새로운 공화국에 걸맞은 시민의 형성을 바랐던 관념학파의 중앙학교 구상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그것을 관통하는 배경은 일반문법이다.

 

이 글은 가스야 게스케의 언어 헤게모니 권력 ­ 언어사상사적 접근에 대한 서평이다이 책은 우리에게 언어적 근대에 대한 매우 새롭고 계발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바, ‘일반문법의 정치학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런 예 가운데 하나이다언급한 바와 같이 가스야는 일반문법의 정치학을 1794년 공교육 위원회에 보고되고 국민공회에서 발표된 그레구아르의 보고 방언을 근절하고 프랑스어 사용을 보급시킬 필요성과 수단에 대하여를 분석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보고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언어적 공포정치/자코뱅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그레구아르가 방언을 근절시킬 방안으로 생각한 것은 법적 정치적 강제력이 아니라 애국주이 팸플릿, 농업용 소책자, 역사적 우화, 매력적인 노래, 스펙터클한 연극등을 이용하는 정신적 수단이었던 것이다. ‘방언의 근절이라는 그레구아르의 계획은 사실 동질적인 시민으로 구성되는 국민의 창출이라는 사상”(101)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그가 열렬히 주장해 마지않은 노예제 폐지와 유대인 해방의 논리에서도 확인된다흑인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문명 세계의 일원이 되게끔 해야만 하고, 또 유대인을 게토에서 해방시켜 프랑스 사회를 구성하는 평등한 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레구아르의 지론인데 이를 위해서는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흑인의 크레올과 유대인의 이디쉬어를 근절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달리 언어 문제에 민감했던 이 혁명가의 언어 인식의 배후에 있는 것으로 가스야가 지목하는 것이 바로 일반문법이다. 그레구아르가 바랐던 것은 다양한 방언의 근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어 자체의 혁명이었으며 그 혁명의 이상은 일반문법이 구상하는, ‘보편적 이성의 형식이 어떠한 왜곡도 없이 그 규칙에 충실히 반영’(106)된 언어였던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합리적 질서를 중시했다는 점만이 그레구아르와 일반문법에 집착한 관념학파를 연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본질적인 부분은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언어의 합리적 질서및 그것을 활용한 관념의 생산과 원활한 유통을 통해 시민 사회를 구축하려 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120동질적인 시민으로 구성되는 국민의 창출이 그레구아르가 시도한 언어계획의 궁극적 목적이었음은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이지만, 관념학파에게 있어서도 일반문법은 시민 교육에 불가결한 부분, 그것도 본질적인 핵을 이루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었다.(118) 즉 관념학파가 심혈을 기울여 구상한 중앙학교는 공화국을 이끌고 갈 사람으로서의 이상적인 시민을 만들어낼 터였는데 이 학교의 교육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것이 바로 일반문법이었던 것이다.(116)

결국 일반문법은 “‘경험의 기호적 관리시민 사회의 기호적 관리를 동시에 행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교육 장치였고, 이에 입각한 그레구아르의 국어사상은 언어 규범상에서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고, ‘시민 사회에서의 관념과 지식의 동태적 교류에 의한 언어의 동질화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이 가스야의 결론이다.(120)

 

따라서 가스야가 중요하게 제기하는 것은 일반문법이 보편적 이성의 질서에 기초하는 언어상을 그려내고 언어정책은 이에 따라 언어의 단일성을 확립하고 다양성은 배제한다는 도식적인 진행 과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보다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언어정책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바(‘시민 사회의 구축’)이며,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론(‘관념과 지식의 동태적 교류’)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보통 소수 언어나 방언의 근절이 정치적 강제력에 의해 이루어질 때 부당하다거나 옳지 못하다는 문제의식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적 강제 없이 이루어지는 소수 언어나 방언의 소멸에 대해서는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심지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가스야가 강조하는 것은 전자의 방식, 즉 법적 정치적 강제에 의한 언어 통일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바로 그 과정이 근대의 언어 문제에서 보다 본질적 국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국어는 바로 그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과정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근대 사회 특유의 권력 양식인 헤게모니 장치라는 게 가스야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주장의 핵심이라고 할 것이다.



 

프로이트, 스토아 학파, 워프

책일기 2016. 7. 1. 12:22

1.

처음 진료를 시작했을 때 프로이드는 최면 요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환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문제를 최면상태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최면에서 깨어난 환자가 그 문제를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정적 난점이 있다. 그래서 그가 나아간 길은 자유연상법이다. 특정 증상에 대해 떠오른 생각을 자유롭게 그리고 남김없이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다.

분석가는 그 자유연상이 이어지도록 도우면서, 환자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증상이 사실은 (의식적으로는) 차마 인정할 수 없어 스스로 억압한 어떤 소망이 몸을 통해 이상 발현한 것임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견딜 수 없는 어느 부위의 통증이 사실은 형제, 혹은 부모의 죽음을 바라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소망에 대해 스스로 내린 형벌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통증이나 강박적 이상 행위는 멈추어진다. 프로이트가 분석하고 소개한 수많은 환자들의 사례를 읽다보면 신비롭기까지 할 지경이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서 언어는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신분석과 언어의 관계라면 물론 야콥슨을 경유한 라캉의 테제, 즉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선언이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이는 프로이드가 인식했던 무의식의 특징이 아니다. 그보다 프로이드의 실제 분석 사례에서 쉽게 눈에 띄는 것은 소리나 형태적 유사성으로 인해 문제의 대상이 다른 단어로 왜곡되어 나타나는 경우들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 언어의 역할이 핵심적이라는 점은 이와는 전혀 다른 관점과 차원에서 접근할 때 비로소 분명해진다. 언어와 무의식이 모두 구조화되어 있다거나 분석 과정에서 단어의 소리나 형태적 유사성을 이용한다는 사실 같은 것은 차라리 부차적이거나 지엽적인 것일 수 있다. 정신분석은 대화와 이야기의 구성을 통해 환자의 증상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즉 환자가 자신도 모른 채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용인될 수 없기에 억눌린 무의싱 상태에서) 소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며, 동시에 그 대화와 이야기를 통해, 즉 환자 스스로 구성한 서사를 통해 치유가 이루어지는 일종의 화행이다. 다시 말해 프로이드의 분석과 치유는 바로 <대화><이야기의 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증상이 <의미하는 것>이 도대체 무언인가를 알아내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정신분석의 방법론은 히스테리 환자의 치유에서 시작해서 꿈과 실수, 그리고 농담의 해석을 거쳐 급기야는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종교와 인류 문명의 기원을 밝히는 데에까지 이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서 인류 문명의 전개 자체를 설명하려는 과도한 이론화는 프로이드를 정신분석하고픈 마음이 들게 하지만, <프로이드의 환자들>의 저자 말마따나 프로이드의 진가는 이론이 아니라 사례 분석에 있을 터.

김서영, <프로이드의 환자들>, 프로네시스, 2010. 2016.1.31~2.16.)

 

2.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하나의 예외적 사건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신화와 역사가 뒤엉킨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시대와 비교하는 것은 물론 무의미하겠지만, 공간을 이동하여 동시대의 페르시아를 비롯한 전제군주제를 떠올리더라도 그리스 민회와 배심원에 의한 재판 같은 것은 하나의 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특히 델로스 동맹 이후 거의 전적으로 주변 지역에 대한 가혹한 식민 지배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공화정으로 이어진 이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이정표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제국과 그 식민지는 어디에나 있었지만, 민주주의는 그리스에만 있었다. 그리고 이 민주주의의 시대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와 설득, 논증과 변증으로 대표되는 말의 힘이다

귀족 아닌 평민까지 정치 행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불분명하다. 보통 밀집방진(팔랑크스)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이야기하지만, 평민 가운데 일부만이 필요 장비를 갖출 수 있었다는 점에서 팔랑크스와 민주주의를 직접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유가 어디에 있든 다수의 정치 행위자가 존재하는 상황은 필연적으로 설득과 논리의 힘을 극대화한다. 에게 해 연안의 철학 역시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헬레니즘 철학은 로고스라는 말로 집약된다고들 한다. 로고스는 말이기도 하고 이성이기도 하고 빛이기도 하다. 말을 이성적으로 전개했을 때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춘 것처럼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요한 복음의 테제는 따라서 헬레니즘 문화와의 교섭을 빼놓고는 설명이 어렵다. 신약성경, 이라는 시도는 애초에 누가 복음과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가지고 유대교의 경전이라는 옛 계약(구약)을 대체할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새 계약이 성립되면 그 이전의 계약은 자동 파기 아닌가!) 물론 갈리아 사람 예수에 집중했던 마르코 복음이 시기상으로 가장 먼저고 유대인을 염두에 둔 마태오 복음(그래서 구약과의 대응에 집착했던)과 유대 사회가 아닌 그 외부인을 염두에 둔 누가 복음이 흔히 Q 문서라고 하는 미지의 텍스트와 마르코 복음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요한 복음은 이들 텍스트가 성립된 뒤에 씌어졌으나 헬레니즘 문화에 깊이 영향 받은 그 저자에게 마태오나 누가가 집작했던 예수의 족보나 처녀 잉태 같은 것은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이 곧 하느님이며 어둠을 비추는 빛이었다는 것이다. 구구절절 예수의 족보를 읊어야할 이유도, 그러면서 그 어미를 굳이 처녀라고 강변할 필요도 요한 복음의 저자에게는 없었다. 그에게는 로고스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를 지배한 철학은 로마의 황제까지 배출한(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토아학파이다. 온갖 관습을 거부하고 말 그대로 개같이 생활했다는 견유학파(키니코스학파)나 금욕적 쾌락주의의 에피쿠로스 학파와 달리 현실 참여적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세계를 물체와 물체 아닌 것으로 나누었는데, 비물체에 해당하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말로 표현되는 것>을 꼽았다. <말로 표현되는 것>이란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아마 <사건>이나 <의미>가 될 것이다. 그와 내가 만난 사건, 그리고 그 의미(우애의 형성, 혹은 갈등의 촉발)는 분명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지만, 물체는 아니다. 언어적 표현을 통해서만 비로소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말소리나 글자는 물체일 뿐이다. 스토아학파의 위대한 점은 그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거기에 존속하는 말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사건과 그 의미를, 그러니까 바로 로고스를 개념화했다는 데 있다.

의미론 내지 논리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나 방법론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이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다. 그의 <오르가논>(범주론/명제론/분석론/변증론)은 전통적인 논리학과 의미론의 기본 개념을 대부분 포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정립한 자연학(퓌직스)과 형이상학(메타퓌직스)의 도구였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해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다 해도 전달할 수 없다.>(고르기아스)라는 소피스트들의 해체적 명제에 의해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 된 자연철학을, 그리고 탈레스 이래의 자연철학이 도달했던 궁극적인 결론(파르메니데스 <생성도 소멸도 없는 부동의 일자>)을 보란 듯이 재건한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라는 개념을 통해 천상에 있던 이 스승의 철학을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자연학/형이상학이라는 이 거대하고 체계적인 그의 지적 담론은 <오르가논>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화한 세계에는 <사건의 의미>가 자리할 곳이 없었다. 이를 테면 공과 그 운동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금 안에 떨어지느냐 금 밖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평범한 파울, 한 시즌의 승자를 결정하는 홈런)를 가지게 되는 어떤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의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공의 <형상>이라는 개념으로는 그런 것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물이 무엇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을 질료와 형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런 사건/의미는 바로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점, 그것이 세상을 구성하는 일부라는 점을 개념화한 것이 바로 스토아 학파이다. 전통적인 논리학과 의미론의 완성자는 아리스토텔레스였으나, =로고스=빛을 논리적으로 해명한 공로를 스토아 학파에게 돌려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볼프강 코른, 조경수 옮김, <트로이의 비밀>, 돌베개, 2015(2015.12.23.~2016.1.2.)

토머스 R. 마틴, 이종인 옮김, <고대그리스사>, 책과함께, 2015(2016.1.3.~1.21.)

김용옥, <기독교성서의 이해>, 통나무, 2007(2015.12.23~12.31)

이정우, <세계철학사1 - 지중해세계의 철학>, 도서출판 길, 2011 (2016.1.3~1.31.)

 

3.

작년 초 나를 우울하게 했던 것은,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 어쩌면 일종의 허위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자의식에서 내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주잠깐이긴 했지만, 한때 가졌던 <운동하는 사람>라는 자의식을 밀어치우고 거의 20년 동안 나를 지배한 것은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알량한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물론 공부를 전혀 안 할 때도, 심지어 취직을 해서 직장을 다닐 때도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의식이 모든 걸 합리화해 주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런 헛된 망상을 붙들고 있기가 민망해졌을 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허위의식을 놓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그만 주저앉고만 싶어졌다. 왜 나는 <일하는 사람>, 노동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공부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열패감을 느끼곤 한다. 대개는 그들의 거대한 이론이나 날카로운 분석 때문이지만, 사피어-워프 가설의 워프로부터 받은 위화감의 이유는 좀 달랐다. 내가 처음 그에 대해 알고 놀랐던 것은 워프가 직업적인 학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소방안전기사였다. 그의 언어학은 그러니까 아르바이트, 혹은 부업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일하는 사람>이라고 여겼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둘 다였을 수도 있겠다. 스승의 이름을 집어넣어 더 유명해진, <인간의 사고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그의 야심찬 가설은 사실 전문적인 학자라면 감히 내놓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누구나 가볍게 비판하고 넘어가는 그런 것이 되었지만, 그러나 조금만 진지하게 언어와 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고마는 그런 것이기도 하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고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이 생각은 물론 그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에네르게이아로서의 언어를 말한 훔볼트도 있고,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 하이데거도 있다. 그러나 실제 문법체계를 가지고 이를 논한 경우는 별로 없다. 워프는 아메리카 인디언인 호피족의 언어와 일반적인 인도유럽 어족의 시제체계를 비교하여 이들이 서로 다른 시간 관념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시간을 호피족은 과정과 방향성의 문제로 보는데 반해 인도유럽어 사용자들은 고정된 점, 즉 시점의 문제로 본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가지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내가 보았을 때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호피족의 시간 관념이라는 것은 대개 전근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것이고(심지어 서구유럽의 전근대 사회에서도), 또 인도유럽어 사용자들의 시간 관념이라는 것은 균질적 시간 개념이 일반화된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는 언어권과 상관없이 일반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언어와 사고를 단선적으로 연결짓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예컨대 <음양><오행>으로 질병을 파악하고 이를 치유하는 사람과 <바이러스><세균>, <면역> 같은 것으로 병의 원인을 파악하는 사람의 사고와 행동은 사뭇 다를 것이다. 언어를 매개로 하는 <개념>은 사회의 구조와 배치를 결정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개념이지 언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념은 언어 이외에 그 무엇으로도 표현되지 않는다. 어떤 말=로고스=빛인가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르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가설의 가장 큰 문제는, 이 가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함의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서로 다른 사고의 구조를 가진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서로 같은 사고의 구조를 가진다는 것인데, 워프에게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겠지만, 이 가설은 따라서 내셔널리즘과 너무나도 쉽게 결합할 수 있다. 사실 한 언어와 다른 언어를 가르는 것 자체가 정치, 국민국가라는 이념 없이는 불가능하다. 언어학적으로만 보자면 제주도말과 서울말은 다른 언어로 분류할 이유가 충분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반대로 언어학적으로만 보자면 스웨덴어와 노르웨이어는 한 언어의 변이(방언)로 볼 수 있으나 서로 다른 언어로 카운팅한다. 유고연방 시절 하나의 언어(세르보-크로아티아어)였던 것이 이제는 세르비아어, 보스니아어, 크로아아티어라는 별개의 세 언어로 취급된다. 군대를 보유하느냐가 언어를 가르는 기준이라는 우스개가 있지만, 언어를 가르는 기준 자체에 정치가 개입하는데 언어와 사고를 연결 짓는 워프의 가설은 이 정치, 정확히 말하면 국민국가라는 이념의 힘을 극대화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겨레말은 겨레얼입니다.”)

정치를 배제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모든 것을 집어 삼겨버리고 마는 저 가공할 국민국가라는 이념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소장문법학파의 자연과학 모델 대신 소쉬르가 제시한 것은 사회학적 모델이다. 그러나 그 사회를 우리는 손쉽게 국민국가로 대체했다. ‘국어학이 탄생한 것은 사회’=언어공동체를 국민국가로 대체하는 바로 그 순간이고 국어학국어(라는 사상)’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다시, 국가에 맞서 사회를 복원해 내야 한다. 칼 폴라니는 토지와 노동력, 그리고 화폐라는 결코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을 상품화함으로써 완성된 자율 시장으로서의 자본주의를 악마의 맷돌이라 했다. 그리고 이 악마의 맷돌이 모든 것을 남김없이 갈아치웠을 때 비로소 사회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처절히 파괴된 사회. 따라서 자본주의에 맞서는 것은 바로 사회를 복원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브렉시트로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국민국가 넘어서기는 단일시장(EU는 결국 단일시장 외에 무엇이란 말인가?) 따위로는 불가능하다는 게 이번 사태가 웅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테면 세계시민주의는 국민국가 이념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둘은 동일한 이념의 변주일지도 모른다. 국민국가 역시 박애, 우애라는 깃발 아래서 피어나지 않았던가. 국민국가=시장이 파괴한 사회를 유럽단일시장은 더욱 잘게 촘촘히 갈아버리고 있는 것 아닌가. 시장=국민국가가 아닌 사회를 복원/재구성하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작업 없이는 이 임박한 파국에서 벗어나는 것 역시 난망한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