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적 근대의 극복을 위하여
– 가스야 게스케의 『언어 · 헤게모니 · 권력』(고영진 · 형진의 옮김, 소명출판, 2016) 서평 (1)
1. 촘스키와 푸코, 그리고 가스야의 일반문법 - 일반문법의 정치학
1.1.
1971년 11월 네덜란드의 한 티비 프로그램에서는 촘스키와 푸코가 나눈 대담이 방영되었다. 촘스키는 영어로, 푸코는 프랑스어로 진행한 이 대담의 주제는 ‘인간의 본성’, ‘정의와 권력’ 같은 것이었는데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반대 방향에서 터널을 뚫어오고 있는 두 철학자’로 소개된 이들의 토론은 그러나 그리 생산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한쪽이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정의’가 무엇을 뜻하고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해 다른 한쪽은 그러한 개념이 성립하는가부터가 지극히 의심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논의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고까지 보고 있으니 토론이 겉돌기만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가령 촘스키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은 창조성이고, 그 주된 근거는 물론 인간의 언어능력이다. 매우 제한되고 불충분한 언어 자료밖에는 접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특정 시기가 지나면 고도로 조직되고 체계적인, 심지어 그가 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말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이 지니는 언어능력의 놀라운 창조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능력은 언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 본능적인 지식, 제한된 정보로부터 고도로 복잡하고 조직된 지식을 이끌어내게 하는 도식 체계야말로 인간성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며 “이 도식 체계의 덩어리, 생래적인 조직 원리의 덩어리,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 ․ 지적 ․ 개인적 행동을 인도한다고 보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인간성’이 과학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특정 시기의 여러 담론을 제한하고 분류하고 그들 간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인식론적 지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그러한 질문이 가져오는 효과와 그것이 하필이면 특정 시대에 유난히 강조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물론 바게트 빵처럼 팔려나갔다는 『말과 사물』에서 그가 펼친 논지와 그대로 연결된다.
각각의 시대마다 지식의 내용과 형태 등을 제한하는 ‘에피스테메’가 있다는 것이 그것인데, 그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물에 대한 앎을 규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것이 ‘유사성’이었던 데 비해 고전주의 시대(17~18세기)에 들어서면 서로 얼마나 유사한가가 아니라 그들 간의 동일성과 차이를 분명히 가려내야만 가능해지는 ‘표상의 체계’가 지식의 본질이 된다. 그러나 18세기 말이 되면 표상은 더 이상 지식이나 사유와 동일시되지 못하고 표상의 근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 과학’이 출현하게 되는 것의 의미는 바로 표상의 근원/담지자로서의 인간이 지식의 대상으로 등장하게 되는 이러한 ‘지식의 역사’를 고려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푸코의 입장이다.
인간을 위한 자리를 전혀 가지지 않는 새로운 에피스테메를 구상하여 근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더 나아가 여전히 인간의 본질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는 철학적 비웃음/침묵으로 응대하겠다는 푸코와 크로마뇽 시대부터 전혀 변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는 것이 현대 과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보는 촘스키가 과연 적절한 토론의 상대이었는지는 애초부터 의심스러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1.2.
그러나 물론 이 둘 사이의 토론이 애초부터 허무맹랑한 기획은 아니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주목을 받던 두 학자는 1966년 약속이나 한 듯이 자신들이 그동안 해온 작업의 일반론이라 할 저술을 내놓았는데, 공교롭게도 두 학자 모두 17세기 뽀르-르와이얄의 일반문법을 주요한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통사 구조론』(1957)을 출간한 데에 이어 1959년 스키너의 행동주의 심리학을 정면으로 비판하여 주목을 받은 촘스키는 『통사 이론의 제양상』(1965)을 통해 자신의 언어 이론을 본격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내놓은 저작이 바로 『데카르트학파 언어학』(1966)인데 여기서 그는 그의 언어학이 데카르트로부터 기원하는 이성주의, 합리주의라는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 근거로 뽀르-르와이얄의 일반문법을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푸코 역시 개별 담론의 형성을 분석했던 『광기의 역사』(1961)나 『임상의학의 탄생』(1963)과는 달리 특정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에피스테메의 존재를 주장하는 『말과 사물』(1966)에서 뽀르-르와이얄의 일반문법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표상의 에피스테메가 앎의 담론을 규정했던, 그리하여 언어에 대한 분석이 지식의 영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고전주의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뽀르-르와이얄의 일반문법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이 공히 뽀르-르와이얄의 일반문법을 주요한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는 있지만, 그 맥락은 전혀 다르다. 촘스키가 이 일반문법으로부터 읽어낸 것은 자신이 주장하는 표층구조와 심층구조의 이원론이며, 모든 언어에 공통적인 심층구조가 인간에게 내재된 정신적인 구조이자 심적 실재라는 이성주의 언어학이었다. 그러나 푸코에게 있어 일반문법은 르네상스 시대를 지배한 유사성의 에피스테메를 대체하였으나 결국에는 근대의 인간과학에게 다시 자리를 내줄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 즉 ‘속성, 분절, 지시, 파생’의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표상 체계의 한 원형이다. 다시 말해 촘스키는 이 일반문법으로부터 역사를 초월하는 인간의 이성, 정신을 찾아내고 푸코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지식의 역사와 그것을 제한하는 인식의 틀을 분석해낸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일반문법을 분석하는 이들의 논의가 전혀 다른 입장에 서 있기는 하지만, 두 논의에서 모두 일반문법을 둘러싼 정치나 사회경제적인 맥락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발생한 이래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려는 촘스키에게 역사란 애시 당초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의 역사를 다루는 푸코가 일반문법의 사회사적 배경이라든지 그것이 현실과 어떤 관련을 맺었는지 등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와 같이 『말과 사물』이 담론 외적 요소를 도외시했다는 지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직후의 저작인 『지식의 고고학』(1969)에서는 ‘언표’라는 개념의 도입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려 했던 점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적 권력의 작동 방식을 문제 삼은 『감시와 처벌』(1975) 같은 이후의 저작에서 뽀르-르와이얄의 일반문법은 더 이상 다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촘스키에서는 물론이고 푸코에서 역시 우리는 ‘일반문법의 정치학’을 읽어낼 수가 없다.
1.3
일반문법이란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위에서 언급한 촘스키와 푸코의 저작을 통해서이고 그 이래 일반문법 하면 으레 뽀르-르와이얄을 떠올린다. 그러나 가스야 게스케에 따르면 “일반문법이 이론적으로 발전해서 정점에 달한 것은 포르-르와이얄 문법이 쓰여진 17세기가 아니라 오히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엽이다.”그리고 “일반문법은 ‘고전적 에피스테메’에 충실할 필요도, ‘데카르트파’일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이들은 “인식의 오류의 원천에는 언어의 오용이 있다는 로크의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 이들 ‘데카르트파’가 아닌 ‘로크파’의 일반문법은 결코 언어의 초월론적 체계를 발견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개념의 형성 과정을 바탕으로 언어의 보편적 규칙을 이끌어 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일반문법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세속 언어’를 가능한 한 완성에 근접시키는” 욕망의 결과인 동시에 그 ‘완전태의 기준’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이 일반문법에 대해 푸코에게서도 촘스키에게서도 얻을 수 없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가스야가 강조하려는 것은 다름 아닌 ‘일반문법의 정치학’이다. 그가 제시하는 일반문법의 정치학은 프랑스 혁명의 언어정책에 깊숙이 관여하여 방언의 근절을 시도했던 그레구아르로부터 시작하고 교육을 통해 새로운 공화국에 걸맞은 시민의 형성을 바랐던 관념학파의 중앙학교 구상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그것을 관통하는 배경은 일반문법이다.
이 글은 가스야 게스케의 『언어 ․ 헤게모니 ․ 권력 언어사상사적 접근』에 대한 서평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언어적 근대에 대한 매우 새롭고 계발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바, ‘일반문법의 정치학’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런 예 가운데 하나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가스야는 일반문법의 정치학을 1794년 공교육 위원회에 보고되고 국민공회에서 발표된 그레구아르의 보고 「방언을 근절하고 프랑스어 사용을 보급시킬 필요성과 수단에 대하여」를 분석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보고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언어적 공포정치/자코뱅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그레구아르가 방언을 근절시킬 방안으로 생각한 것은 법적 정치적 강제력이 아니라 ‘애국주이 팸플릿, 농업용 소책자, 역사적 우화, 매력적인 노래, 스펙터클한 연극’ 등을 이용하는 ‘정신적 수단’이었던 것이다. ‘방언의 근절’이라는 그레구아르의 계획은 사실 “동질적인 시민으로 구성되는 ‘국민’의 창출이라는 사상”(101쪽)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그가 열렬히 주장해 마지않은 노예제 폐지와 유대인 해방의 논리에서도 확인된다. 흑인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문명 세계의 일원이 되게끔 해야만 하고, 또 유대인을 게토에서 해방시켜 프랑스 사회를 구성하는 평등한 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레구아르의 지론인데 이를 위해서는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흑인의 크레올과 유대인의 이디쉬어를 근절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달리 언어 문제에 민감했던 이 혁명가의 언어 인식의 배후에 있는 것으로 가스야가 지목하는 것이 바로 일반문법이다. 그레구아르가 바랐던 것은 다양한 방언의 근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어 자체의 혁명이었으며 그 혁명의 이상은 일반문법이 구상하는, ‘보편적 이성의 형식이 어떠한 왜곡도 없이 그 규칙에 충실히 반영’(106쪽)된 언어였던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합리적 질서’를 중시했다는 점만이 그레구아르와 일반문법에 집착한 관념학파를 연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본질적인 부분은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언어의 합리적 질서’ 및 그것을 활용한 ‘관념의 생산과 원활한 유통’을 통해 ‘시민 사회를 구축’하려 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120쪽) 동질적인 시민으로 구성되는 국민의 창출이 그레구아르가 시도한 언어계획의 궁극적 목적이었음은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이지만, 관념학파에게 있어서도 “일반문법은 시민 교육에 불가결한 부분, 그것도 본질적인 핵을 이루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었다.(118쪽) 즉 관념학파가 심혈을 기울여 구상한 중앙학교는 “공화국을 이끌고 갈 사람으로서의 이상적인 ‘시민’을 만들어” 낼 터였는데 이 학교의 교육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것이 바로 일반문법이었던 것이다.(116쪽)
결국 일반문법은 “‘경험의 기호적 관리’와 ‘시민 사회의 기호적 관리’를 동시에 행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교육 장치”였고, 이에 입각한 “그레구아르의 ‘국어’ 사상은 언어 규범상에서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고, ‘시민 사회’에서의 관념과 지식의 동태적 교류에 의한 언어의 동질화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이 가스야의 결론이다.(120쪽)
따라서 가스야가 중요하게 제기하는 것은 일반문법이 보편적 이성의 질서에 기초하는 언어상을 그려내고 언어정책은 이에 따라 언어의 단일성을 확립하고 다양성은 배제한다는 도식적인 진행 과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보다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언어정책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바(‘시민 사회의 구축’)이며,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론(‘관념과 지식의 동태적 교류’)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보통 소수 언어나 방언의 근절이 정치적 강제력에 의해 이루어질 때 부당하다거나 옳지 못하다는 문제의식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적 강제 없이 이루어지는 소수 언어나 방언의 소멸에 대해서는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심지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스야가 강조하는 것은 전자의 방식, 즉 법적 정치적 강제에 의한 언어 통일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바로 그 과정이 근대의 언어 문제에서 보다 본질적 국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국어’는 바로 그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과정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근대 사회 특유의 권력 양식인 ‘헤게모니 장치’라는 게 가스야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주장의 핵심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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