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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언어 (4)
(『언어적 근대의 기획 - 주시경과 그의 시대』, 소명출판, 2013의 8장에서 이어지는 글)
1.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물론 어디까지나 비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고진이 정리한 세 가지 교환양식은 의사소통의 문제와는 질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레이코프가 지적했듯이 은유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본질적인 방식이다. 언어, 또는 언어 행위라는 것은 쉽게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어서 구체적인 것에 빗대지 않으면 이해하기도 표현하기도 어렵다. 레이코프는 우리가 언어 행위를 수도관을 통해 물을 흘려보내는 것과 같이 혹은 그릇 같은 데에 무엇을 담아 건네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고 했거니와, 야콥슨의 의사소통 모델을 등가교환에 연결시킨 것은 레이코프가 ‘도관 은유’라고 부른 언어에 대한 이러한 식의 이해가 특정한 시대, 즉 근대에 와서 보편적인 것이 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물론 『탐구1』에서와 달리 『세계사의 구조』에서 고진은 의사소통에 관한 것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교환양식과 의사소통 모델을 연결시켜 본 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시도이다.
그런데 이는 예컨대 20세기 초 조선이라는 공간에서 주시경 같은 이들이 했던 작업의 의미를 좀더 거시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시경이 참여하고 그의 시대가 기획한 근대적 언어 담론은 평등한(균질적인) 개인과 그들이 공유하는 코드를 전제로 하는 야콤슨의 의사소통 모델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 모델은 분명히 언어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유용하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 일반화된 현재의 사회구성체와 더 쉽게 조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언어의 특정 국면, 어쩌면 더 본질적인 것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는 예컨대 언어를 통해 우애와 연대감을 형성하고 확인하는 것과 같은 면은 잘해야 부차적인 현상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화용이나 화행, 사회적 변인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언어학이라는 분과학문에서 주변적인 위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확인해 주는 뚜렷한 징표이다. 언어에 대한 인식이라는 면에서 보면 우리는 아직도 주시경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2.
그렇다면 코드의 일치를 전제로 하는 이러한 식의 의사소통 모델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없었는가? 만약 근대적 의사소통 모델이 등가교환을 주요한 교환양식으로 하는 사회구성체와 더 쉽게 조응하는 것이라면, 이에 대항하여 우리는 예컨대 이른바 ‘맑스주의 언어학’이란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 언어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과연 있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언어를 상부구조의 하나로 본, 년대 소련의 관제 언어학 마르주의의 교조성이 스탈린에 의해서(!) 거부된 이래 ‘부르주아 언어학’과 구별되는 ‘맑스주의 언어학’이란 것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물론 볼로쉬노프나 바흐친과 같은 예외가 없지는 않았으나, 60년대 이후 ‘서방’ 학자들에 의해 ‘발견’되고 호들갑스러운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그들은 스탈린 체제에서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소련 언어학계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해 본 적 없는 변방의 지식인들이었다. 게다가 볼로쉬노프의 『맑스주의와 언어철학』은 랑그의 언어학, 즉 소쉬르식 구조언어학을 비판한 데서 더 나아갔다고 보기 어렵고, 바흐친 역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대화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 언어학을 비판했을 뿐, 새로운 언어학을 구상했다고 할 수는 없다.
『‘스탈린 언어학’ 정독』이라는 책을 쓴 바 있는 일본의 사회언어학자 다나카 가쓰히코(田中克彦)는 ‘언어학의 모험’이라는 부제가 붙은 최근의 저서에서도 언어는 상부구조도 토대도 아니라는 스탈린의 선언이 소비에트 학계뿐만 아니라 사상계 전반에 ‘해방’을 가져온 ‘선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田中克彦 2009/2013:136) 물론 이때의 ‘해방’이란 ‘토대-상부구조론’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그런데 언어를 상부구조의 하나로 본다는 것은 언어를 다른 사회 현상과 동일하게 취급함을 뜻하는 데 반해 언어가 상부구조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언어가 여타의 사회 현상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나카 가쓰히코는 이에 대해 ‘말은 문화이지만 보다 자연에 가까운 문화’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토대-상부구조론’에 입각한다면 문화는 물론 상부구조에 속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문화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되는 말은 ‘보다 자연에 가깝기’ 때문에 상부구조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性)에 따른 굴곡이 있는 유럽어와 달리 일본어에는 왜 그런 것이 없느냐 하는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것은 마치 튤립이 피는 방식과 국화가 피는 방식이 다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라는 다나카의 비유는 ‘말은 자연에 가까운 것’이라는 그의 결론이 의미하는 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결국 언어적 규칙은 자연 법칙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고 이는 자연과학을 방법론적 모델로 삼았던 근대 유럽의 역사언어학의 관점과 일치하게 된다. 1930년대 홍기문이 겪었던 곤란함은 소련 언어학에서도 반복되었고, 그 해결책 역시 홍기문의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는 계급적인 것이 아니라 전인민의 것’이라는 명제인데, 이는 다시 말해 언어적 규칙(코드)을 상황이나 조건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적용되는 자연법칙과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3.
언어가 상부구조인가 아닌가 하는 점은 물론 여기서의 관심 사항이 아니다. 다만 그 언어에 대한 인식이 이른바 ‘부르주아 언어학’에서든 이를 의식적으로 ‘극복’하려 했던 쪽에서든 결국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했을 뿐이다. 또 ‘언어’와는 달리 상부구조에 속할 수밖에 없는 ‘언어학’의 기본 전제가 양쪽에서 일치한다면 그러한 상부구조(언어학)를 규정하는 토대라는 것이 예컨대 시장경제나 계획경제와 같은 수준을 넘어서는 더 깊은 층위에서 작동하는 것일 수 있다는 예상치 못한 결론 역시 이 글의 일차적 관심사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나카 가쓰히코도 지적한 바 있는 것처럼 언어학사에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가 갖는 의미를 역사언어학의 자연과학 모델을 사회학적 모델로 대체한 것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소쉬르 이전의 언어학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이다. 언어는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인간이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자연 법칙을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없듯이 말이다. 역사비교 언어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고, 문헌학자가 정원사라면 언어학자는 식물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슐라이허의 비유나 ‘음 법칙에 예외 없음’이라는 소장문법학파의 기세등등한 구호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쉬르는 이전 세대의 이와 같은 자연과학적 모델을 뒤르케임 식의 사회학적 모델로 대체하려 했다. 통시언어학과 구분되는 공시언어학을 주창하면서 이 둘을 경제사와 경제학에 견주거나 언어학을 당시에는 있지도 않던 학문인 기호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귀속시키고자 애쓰는 모습은 자연과학 모델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소쉬르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자연과학 모델과 사회학적 모델 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컨대 어딘가에서 변사체가 발견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두 가지 시선이 요청된다. 우선 필요한 것은 사인(死因)의 규명이다. 약물 중독, 혹은 출혈 과다, 아니면 심장 마비 등등. 여기에 필요한 것은 물론 자연과학적 시선이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하는 판단 역시 아마도 이를 근거로 내려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같은 자살이나 타살이라 하더라도 그 죽음을 둘러싼 각종 상황에 따라 그 자살, 혹은 타살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정리해고와 연이은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중년의 가장이냐, 수뢰 사건으로 수사 받던 고위 공무원이냐, 아니면 ‘손배가압류’로 고통 받던 파업노동자였느냐. 그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무엇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일단 하나의 관점을 취하고 나면 그 죽음의 의미는 결코 자의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물론 어떠한 관점을 취하게 되는가 하는 것 역시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앞의 시선이 의사가 취하는 것이라면 뒤의 시선은 일테면 형사나 탐정, 또는 기자가 취하는 것이다. 이때 의사가 하는 일이 객관적 대상의 실체를 자연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라면 탐정이나 기자의 역할은 바로 그 실체의 규명에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해석해 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탐정이 하는 추리 같은 행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쉬르와 같은 시대에 그와는 별개로 기호학을 정립하고자 했던 미국의 철학자 퍼스도 기호의 해석에는 추리와 비슷한 지적 활동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것을 연역법이나 귀납법과 구별되는 ‘가추법(假推法)’이라고 부른 바 있다. 우리의 언어행위 역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각종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그것의 의미를 해석해 내는 작업이 있지 않고는 단 한순간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문법적 규칙과 어휘의 사전적 풀이만 가지고는 의사소통이라는 행위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4.
화행 이론을 전개하면서 설은 두 가지 규칙을 구별한다. 하나는 규범적 규칙이고 다른 하나는 구성적 규칙인데, 앞의 것은 ‘밥 먹을 때는 떠들지 마!’와 같은 종류의 행위를 규제하는 규칙이고 뒤의 것은 ‘공이 이 선 안쪽에 떨어지면 안타이고 바깥쪽에 떨어지면 파울이다’와 같이 특정한 행위의 의미를 규정해 주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예컨대 야구라는 행위 자체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규칙이다. 물론 화행과 관련된 규칙은 후자이고 그는 이런 규칙은 ‘x를 y라는 조건에서 z로 본다’와 같은 형식을 갖는다고 보았다.
‘안녕들 하신가요?’라는 하나의 언표(x)가 어떤 배치(y)에 놓이느냐에 따라 단순한 안부 인사(z1)일 수도, 음흉한 협박(z2)일 수도, 아니면 고통에 찬 절규(z3)일 수도 있다. 마치 어떤 이가 다른 이에게 건낸 물건이 호의에 기반한 선물이 될 수도, 악의에 찬 저주나 호전적인 도발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때 그 의미의 해석은 단순히 개인의 주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타자를 만나기 전에는 의식적으로 떠올리기조차 어려운 공동체 내부의 규칙에 의해 일차적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여기서의 공동체는 ‘민족=국가=시장’과 같은 식의 매끈한 것이 아니라 지역이나 계층 등에 따라 구분되고 또 일정하게 중첩되기도 하는 그런 공동체라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전통문법이 ‘음식을 입에 물고는 말하지 마’와 같은 규범적 규칙을 세우려 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근대언어학이 나아간 길은 마치 자연과학자가 객관적 대상을 탐구하듯이 언어를 객관적 실체로 보고 그것의 내재적 규칙을 구명하는 것이었다. 이 자연과학적 시선에서 하나의 대상은 그것이 어떤 상황과 조건에 놓이더라도 그것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변할 수 없고, 변하지 않아야 그 지식이 ‘과학적’이 된다. 동일한 언어적 표현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상황을 자연과학적 모델로는 이론화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일반언어학강의』의 초반부에서 소쉬르는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과학은 연구의 대상이 미리 분명하게 주어져 있는 데 비하여 언어학은 연구 대상인 언어를 정의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별난 점이 있다며 그 곤란함을 토로한 바 있다. 다른 과학과는 달리 언어학에서는 ‘대상이 관점에 선행하기는커녕, 관점이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인상’이라고까지 하고 있는데, 이는 다시 말하면 언어학에서 다루는 ‘언어’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그 무엇이 아니라 특수한 관점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처음부터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푸코와 같은 입장에 선다면 이는 언어학에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다. 자연과학을 포함하여 모든 과학의 대상은 미리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담론에 의해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모델, 은유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시대가 앞서는지 새로운 담론이 먼저 오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 둘이 결코 별개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할 터. ‘오래된 미래.’ 이제는 진부한 표현이 됐지만, 그러나 새로운 시대는 아마도 우리가 이미 오래 전에 경험했던 것에 대한 검토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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