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과 반일, 그리고 '앙가주망'의 사이에서

삶읽기 2019. 9. 16. 11:44

1.

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 말고 맞서야 한다, 는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의 결연한 멘트에 소름이 돋는다. 마치 집회를 마치고 교문 밖으로 나가기 직전 울려 퍼지던 투쟁결의문 낭독의 시간인 것만 같다.

 

‘앙가주망’을 외치는 대통령의 비서와 ‘더이상 지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듬직한 혹은 섬뜩한 국무회의 발언은 이들이 혹시라도 박정희나 전두환과 싸우던 시절의 기분으로, 아니면 의열단 단원의 심정으로 이 사태를 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분노의 땔감을 있는 대로 그러모아 불길을 지피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진보의 자리가 아니다.

 

2.

최고 권력자의 수석비서관 노릇이 ‘앙가주망’이라면 전두환을 찬양한 서정주는 참여 시인이란 말인가. 명민한 그가 그리 생각했을 리야 없을 것이다. 다만,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보수파와의 싸움을 마치 7,80년대 해직 교수가 된 기분으로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들 뿐이다. 게다가 그 싸움이란 것이 대개 정치적인 제스처에 그칠 뿐, 예컨대 지금과 같은 시기를 기회로 삼아 자본의 온갖 요구를 들어주려고 작정한 것처럼 나서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경제 영역으로 들어가면 피아를 식별하기조차 어려워진다.

 

‘조선일보 바로세우기’ 운동은 조선일보를 대표로 하는 보수파가 바로 친일파라는 손쉬운 논리를 채택함으로써 전선을 명확히 했지만(아, 청산되지 못하 과거여!), 그 전선은 종종 진보를 혼란에 빠트렸다. 애국과 매국은 보수의 논리이지 진보의 언어는 아니다. 진보는 비애국을 감수하고라도 소수자의 편에 서야 한다. 요컨대 강제 징용이나 일본군 성 노예 피해자들의 문제를 애국의 논리, 친일 반일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진보의 자세가 아니다. 소수자에 대한 국가권력과 자본의 폭력으로 접근할 때만이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예컨대 일본 내의 진보와의) 연대가 가능하다.

 

3.

사실 보다 근본적인 우려는 지금의 이 사태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정책의 큰 틀이 뒤바뀌는 국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데 있다. 예컨대 미국의 인도 태평양 구상에서 남한을 배제하는 것이 미국의 장기적인 전략이고(작년 싱가폴 회담 전후부터 이따금 보이던 분석이다.) 일본은 이를 감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일본이 내세우는 안보상의 문제라는 것이 영 개운치가 않다. 중국-러시아-북한과 한국-일본-미국의 대결 축에서 한국을 떼어낸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의 군사적 기여도가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아베의 이른바 전쟁을 할 수 있는 정상국가론과도 부합한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이는 말 그대로 위기이자 기회일 것이다. 미국의 패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남한의 지배 블록에게 재앙과 같은 것일 터. 그러나 새로운 사회의 구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무한한 잠재력의 공간이 열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해방 후 펼쳐졌던 가능성이 미국과 소련의 패권에 종속되면서 사라졌다면, 그러한 공간이 다시 열리는 셈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지금의 이 촛불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어떤 어둠을 밝혀야 하는 것인가.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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