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오프 크라이스트

삶읽기 2005. 3. 30. 09:24


저녁 먹다가 얘기가 나와, 마침 사순절 기간이기도 하고 해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빌려 보았다. 역시 예수의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만 그렸을 뿐,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는 관심이 없는 영화였다.

어느 누가 악(?)에 의해 고통 받았다고 해서 그가 곧 바로 선이 될 수는 없는 법. 그의 십자가형을 가지고 인류(물론 기독교신자들이라고 해야 정확하겠지만)에게 끝없는 죄의식을 심어준 행위가 기독교의 여러 잘못 가운데 으뜸이리라(물론 그 부분이, 신의 아들이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는 그 사건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기독교의 종교성이겠지만).

그 죄의식은 나만 들볶는 게 아니라 주위의 멀쩡한 사람들까지 죄인으로 만든다. 기독교가 신의 이름으로 자행한 저 숱한 살육은 모두 이 죄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나의 죄를 씻기 위해 나는 오늘도 이교도를 섬멸한다. 죄의식은 강박과 편집증을 부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교회, 특히 구교의 그런 정통 이론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게다가 영화적으로도 촌스러운 부분이 많다. 무슨 누아르 영화처럼 과잉된 감정 표현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사탄의 모습은 영화에 몰입할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예수의 절명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과 그로 인해 갈라지는 유대 성전이라니...

(2005.3.21.월. 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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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

삶읽기 2005. 3. 21. 14:13

<기묘한 이야기>라는 일본 비디오를 빌려 봄. 세 편의 단편을 모아놓은 옴니버스. 첫째 이야기는 비행기 사고로 조난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공포/심리극. 둘째는 한 사무라이가 핸드폰을 손에 쥐게 되며 벌이는 소극. 무척 비중 있는 (걸로 보이는) 사건과 인물에 관한 애교 있는 비틂. 일본사에 대한 공부가 필요함을 다시 한번 느낌. 세 번째는 결혼 생활을 컴퓨터를 통해 가상체험하는 이야기.

첫째 이야기에서 나온 이야기 하나가 기억에 계속 남는다. 등산대가 조난을 당해 둘만 살아남는다. 한 사람이 다쳐 텐트를 치고 구조대가 오기까지 기다리게 된다. 식량이 남아 있었으나 성한 사람은 이를 부상자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는 밖을 살피고 온다며 하루에 세 번씩 텐트 밖으로 나가 배를 채우고 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친 사람은 야위어 가고 결국 숨을 거둔다. 텐트에서 떨어진 눈밭에 시체를 묻는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시체가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는 것. 깜짝 놀라 시체를 다시 파묻지만, 다음날 일어나보면 어김없이 시체가 지신의 곁에 누워 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는 극도의 공포에 빠지는데, 결국 생각해낸 것이 비디오카메라를 켜놓고 자는 것. 아침에 일어나니 역시 시체는 자시의 옆에 누워 있고, 카메라를 돌려 보니, 바로 자신이 시체를 들쳐 업고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누이더라는 것. 첫째 영화의 얼개도 이와 정확히 같음.

극중 스토리 텔러가 한 말도 인상 깊음. 세상에는 두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야기 하는 사람과 이야기 듣는 사람. 이야기 하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말은, 하나 더요. もう一度。나는 이야기하는 사람인가 듣는 사람인가. 하고자 하는 사람인가 듣고 싶은 사람인가.

일본 후지TV에서 10년 동안 방영되던 <환상특급>이란 프로에서 제일 인기 있던 것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SMAP 주연의 특별판도 있다고 함.

(200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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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3.5.

삶읽기 2005. 3. 5. 13:52

사무실은 난방이 여전히 되지 않고 있다. 드디어 엘엔지 가스 난로를 발견(?!)했고, 이르면 월요일에는 배달이 된다는 사장님의 말씀, 은 여전히 미덥지가 않다. 편도선이 부었고, 무르팍이 시리다.
점심 후 최실장님과 권팀장님은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업무상 추위를 피했다고나 할까.
좋은 꿈을 꾸었다며, 실장님이 로또 한장을 쥐어 주셨다. 십만원 이하는 모두 술사고 그 이상은 반절을 드리기로 했다. 몇년 학비 정도는 빠질 것 같다. ^^

경준이 형이 논문을 전해주러 (김석득 선생님 댁께 가는 길에 ) 친히 홍대역으로 왔다.
'<유가사지론>의 점토석독구결의 해독 방법 연구'
웬만한 국어학 전공자에게도 쉽지 않은 주제다. 우선 문헌이 고려때 것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고 구결중에서도 점을 찍어 읽는 방법을 표현한 점토구결에 관한 것이기에 그렇다. 15세기 이전의 한국어를 재구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 있을 터. 물론 아직은 표기법사 정도일 수밖에 없으나. 그러나 여기서 아마도 이 논문의 지도 교수 임용기 선생은 삼분법의 기원을 찾았으리.

<괴델, 에셔, 바흐>를 다시 펴들어 서론을 읽었다.
최근에 읽은 <무한론 교실>이 이 책과 이진경의 <수학의 몽상>을 불러냈다.
자기 언급의 역설이 나를 설래게 한다. 언어학은 자기언급 그 자체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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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결혼식

삶읽기 2005. 1. 26. 13:12

결혼식은 결혼하는 당자보다 그로 인해 모인 이들이 오히려 즐거운 날이다.
정말 오랫만에 많은 친구들을 보았다.
하나 혹은 둘 심지어는 셋 씩이나 새 식구를 달고 나온 친구들도 있었고,
나처럼 여전히 혼자 온 이들도 있었으나, 기분은 예전 같았다. 놀리고 치대고 히히덕거리고 쑥스러워하고.... 여전히 서툴게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여전히 고맙고 미쁜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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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간다에서의 3박4일

삶읽기 2005. 1. 22. 08:15

1. (2005.1.17.월)
10시 비행기에 대느라 5시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환전을 하고 신발까지 벗어가며 출국 심사를 받았다.
비행기의 기내식은 생각보다 먹을 만했다. 맥주도 한 잔했다.

나리타에서 내렸고, 스카이라이너를 탔다. 일본 농촌의 풍경은 아담하고 평안해 보였다.
우에노에서 내렸고 우에노 공원에 들러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앞에 잠시 서 있다가 길을 재촉했다.
제이알선으로 아키하바라역까지 간 후 다시 전철을 갈아타고 스이도바시역에서 내렸다.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니 3시 반경.
기내식 이후로 아무것도 못먹어 배가 고팠다.
라멘을 사 먹었으나 너무 느끼했다. 식권을 자동발매기로 사야하는 집이었는데 말을 못알아 들어서 잠시 고생했다.



첫 행선지는 동경당서점.
1층에서 문고본 <현대사상의 모험>, 현대사상 2004년 9월호의 권외 특집 <북가이드 60>을 고르다.
2층 사전코너에서 백천정의 한자학 3부작 <자통>, <자훈>, <자해>를 구경하다.
호텔에 돌아 와서 캔맥주를 먹다가 경모형이랑 연락이 되어 스이도바시 역에서 아홉시 반경에 만나 맥주와 소주를 얻어먹고, 수요일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짐.

2. (2005.1.18.화)
8시에 아침밥으로 호텔 2층의 식당에서 갈비탕을 먹고 방에서 약식 회의를 하다. 실장님이 조사해 오신 아이템을 검토하는 식.
삼성당 서점 문고코너에서 오전 시간을 보냄. <근대일본사상안내>라는 책을 삼.

점심은 튀김짐에서 덴부라 덥밥을 먹음. 인근의 직장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 그득, 매우 혼잡했다.
점심 후에는 호텔에 책을 부려 놓은 후 다시 나와 고서점을 위주로 돌아 다녔다. 고서점이라고는 해도 새 책도 많이 있었고 또 상대적으로 싸지도 않았다.
어느 것은 문고판임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원래 가격의 몇배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백천정의 <상용한자>를 여러번 들춰보다가 결국은 사지 못했다.
롯데리아에서 음료를 먹고 다시 이런저런 서점엘 들렀다.

저녁은 실장님 처남을 만나 셋이서 먹었다.
꽤 분위기가 좋은 돈가스집. 정식 일인분이 2천8백엔, 생맥주 일인분이 5백엔씩 했으니 꽤 비싼 편이었다. 모두 1만2천엔 정도가 나왔다.
배가 불렀으나, 호텔에 돌아와서 맥주를 몇잔 더했다.

3. (2005.1.19-20)
호텔 식당에서 아침으로 육개장을 먹고 9시 반경, 삼성당으로 향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곳이 많았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마쓰이 빌딩 주위를 돌았다. 매우 세련된 건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10시경 삼성당 문고로 갔다. 우선 언어학 코너로 갔는데, 특별히 눈에 띄는 책이 없었다.
서울에서 보고 간, 소쉬르 <일반언어학강의>(4천엔)와 <일반언어학강의 제3강 노트>(5천엔)를 여러 번 들춰 보다가 결국 사지 못했다.
<언어적 근대를 넘어서>가 눈에 띄어 꼼꼼히 살펴보았다. 흥미있는 책이었다.
잠깐 언어학 코너를 본 후 전날과 마찬가지로, 이날 역시 역사학 코너를 샅샅히 뒤졌다.


점심으로 가쓰돈이라는 돈가스 덥밥을 먹고 이번엔 동경당 서점으로 갔다.
우선 언어학 코너로 행했다. 삼성당보다 훨씬 분류가 세밀하게 잘 되어 있었다.
고영진 선배가 번역해서 돌베개로 원고를 넘겼다는 <언어제국주의란 무엇인가>도 보였고 이연숙 선생의 <국어라는 사상>도 보였다.
<국어와 방언의 사이: 언어구축의 정치학>이란 책과, 삼성당에서 눈여겨 보았던 <언어적 근대를 넘어서>를 샀다.
<국어와 방언>이란 책은 일전 역사학 대회 때 산, 소창진평과 시지성기 관련 책을 쓴 바로 그이의 책이었다. 68년생이니 매우 젊은 연구자인 셈이다.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 하면 오바도 한참 오바일 터이지만 묘한 감정이 드는 것은 사실.


저녁에는 경모형과 마유 누나, 형정 누나를 만났다. 실장님도 자리를 함께 해 모처럼 만에 화기애애한 술자리를, 도쿄 간다 서점 동네에서 가졌다.
마유 누나는 토요일 시험이 있어서 먼저 가고 나머지는 노래방을 찾으러 나왔으나 보이지 않았다.
실장님은 호텔로 돌아갔고, 나는 선배들을 따라 기숙사로 구경을 갔고, 밤새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때로는 열변을 토하기도 하고 때로는 익살스런 웃음을 짓기도 하며...
새벽 공기는 생각한 것보다 탁했다. 담배를 많이 피운 탓도 있었겠으나 속이 매스꺼웠다.
호텔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공항으로 향했다.

서울은 도쿄보다 무척 추웠다. 그리고 책은 매우 무거웠다. 다리는 천근만근에 눈꺼풀은 수시로 내려 앉았으나, 어머니가 끓여주신 밥은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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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모

삶읽기 2005. 1. 14. 11:48

월요일, 점심을 푸지게 먹고 신발을 질질 끌며 미용실에 갔다.
지금의 직장으로 옮기고 나서부터 다니기 시작한 곳이라 근 2년이 다되어 가니 단골이라면 단골.
내 머리를 전담 마크(?)하고 있는 아자씨께 대가리를 디밀고 여지없이 병든 닭 모드로 졸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아지씨 왈...

"손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머리가 많이 빠지셨어요. 머리숱이 굉장이 많은 편이셨는데..."

한 오년 전쯤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더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학기를 꽉 채우고도 쩔쩔매던 논문 학기 중이었는데, 머리를 깎으러 갔더니 원형탈모증이라며 병원엘 가란다.

졸업하면서 군데군데 흉찍하게 빠졌던 머리터럭들은 제모습을 갖추었지만,
얼마 후 난 듬성듬성 잡풀이 삐죽이 제멋대로 솟아난 아버지의 무덤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깟 논문 쓰느라고 빠지던 머리가, 암 판정을 받으시고 투병중이던 아버지 옆에서는어찌 그리씩씩도 하게 잘도 꾸역꾸역 자라났는가.
아버지도 그런 생각을 혹 하셨을까. 그랬다면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다시 머리가 빠진단다.
이깟 두려움과 긴장으로 머리가 빠진다면, 앞으로 펼쳐질 ... 짜릿한 인생 어이 버틸고.

내일은 어머니를 모시고 산엘 가련다. 천천히 허위허위 오르며 어머니 손을 한번 잡아드리리라.

남해금산, 그리고 버클리풍의 사랑노래(2004.11.3)

삶읽기 2004. 11. 9. 11:30

버클리풍의 사랑노래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없이.



몇 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를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와 헷갈려,
[뒹구는 돌]을 황동규의 시집이라고 우기다가 낭패를 본일이 있다.
전혀 다른 느낌의 시집이고 시인인데, 아마 /뒹굴다/와 /구르다/의 유사한 이미지 때문이었나 보다.

나중에 나는 이렇게 둘러댔다. '둘은 꽤 헛갈리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둘 다 문지파이고 둘다 서울대 불문과 출신이다(이 말은 거의 동어반복인 셈이라고 중얼거렸다). 둘다 교수고 둘다 사랑에 관한 절창을 갖고 있다.(/남해금산/과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를 떠올렸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시실 둘은 전혀 다르다.
이성복은 말을 다루는 데 잔인하고, 황동규는 자신을 다루는 데 너그럽지 않(았)다.
그리고 이성복의 시는 꺼끌꺼끌하고 황동규의 시는 스산하다.
(나중의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맙소사, 황동규는 불문과가 아니라, 영문과다. 최근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를 다시 들었다가 아차, 했다...)

제일 친한 대학 때 친구 셋,
그 중 하나는 말을 공부한답시고 케임브리지로 떠났고,
또 하나는 정치를 공부한다더니 매우 비정치적인 낯빛으로 연구실에 처박혀 지낸다.
나머지 한 놈은 남해 농협에서 돈다발을 세고 있다.

우리는 대학 때 대개 [남해금산]식의 사랑에 휘둘렸고

또 약간은 그렇게 과장된 감정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
남해금산 보리암에 올라[버클리풍의 사랑노래]를부르고 싶다.
(서울로 올라올때는 농협에 들러 쌀이라도 한 닷말쯤 사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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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 (2004. 10. 21)

삶읽기 2004. 10. 25. 11:02



1.
'이수교에서 고속터미널로 가는 방향으로 오른쪽이 되는' 센트럴시티에서 쇠고기 국수 전골과 하얀 밥을 먹었다.
감기가 심했는지, 그는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친구가 소개해 준 커피숍은 조금 시끄러웠고, 커피 타는 양인(洋人)은 "투모카?"하고 내게 물었다.
고속터미날 앞을 걸었고 /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가 된 기분이었다.

2-1.
언제였던가, 황지우는 장정일을 약간은 경멸스러운 어투로 '댄디'라고 했다. 아마도<세계문학> 주간을 맡고 있을 때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지나 놓고 보면, 장보다 황이 더 댄디라 할 만하지 않았던가 생각된다.
화장실 낙서와 신문의 티비 프로그램 소개란을 몽타주한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는 여적 신선하다.
하지만, 연극원에 다닌다는 후배가 전한 그의 강의실 언행은 나를아찔하게 한다.
아직도 '새들은 세상을 떠야 하는가.'

2-2.
'이수교에서 고속터미널로 가는 방향으로 오른쪽이 되는 구반포 상가 앞 버스 정류장'으로 시작되는 시, /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에서

'그녀'는 서른 한 살이라는 자신의 나이에 갑자기 놀란다.
'서른 한 살, 작은 디 엔 에이 정보를 가진 벌레가 이렇게 다 커버렷다니, 그녀는 떨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따라온 낙타를 타고'검은' 강으로 들어가 버린다.

3.
고속터미날 앞을 걸었고 /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의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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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렌토에서 2004.10.13

삶읽기 2004. 10. 14. 20:28

1.

C'etait bien에서 차를 마시고 소렌토에서 스파게티, 그리고 빨간밥을 먹다.

돌아오는 전철에서,

지리산, 별소리 베고 누었을 때처럼 설랬다고 했다.

아마 처음 먹은 스파게티의 느끼함 때문이었나 보다. 이런미끄덩한 소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감남행 전철과 홍대행 전철의 느낌과 무게가 달랐다.

2.

이제하의 소설은 {소렌토에서}가 처음이었다.

2001년 동인문학상은 김훈에게로 넘어갔지만, 주제넘게 한마디 하자면, 이제하의 {독충}이 받았어야 마땅하리라.

김훈은 이제 출판인들이 뽑은 제일 영향력있는 '문필가'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자전거 여행 2}를 살 꿈도 꾸지 않고, 고통스럽게 산 {칼의 노래}도 집어들지 못한다.

속물근성은 나에게 있는가, 아니면 김훈과 그의 친구들에게 있는 것인가.

3.

그와의 저녁은 /소렌토에서/가 처음이었다.


영화 '바람난 가족'에 대한 단상

삶읽기 2004. 9. 7. 13:26


가족은 사유제와 기원을 같이 한다.
물론 여기서의 가족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말한다.
'내 재산'을 '내 아들'에게 물려주어야겠다는 필요가 '내 피'와 '남의 피'를 구분하게 했다.
내 피와 남의 피의 구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순수한 '내 피'를 가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족제도 내에서 여성의 '바람'은 죄악이된다. 불결이고 욕됨이다.

새로운 사회에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제도가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의미 없는 소리이다. 대안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동어반복이기 때문.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관계와 생활 방식을 전제하는 것이고 이는 새로운 가족 관계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결국, 새로운 사회에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제도가 형성될 것이다, 라는 말은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사회다, 라는 말.

영화 '바람난 가족'은 "지금의 가족 관계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남편도 힘들고 아내도 죽겠고, 입양된 아이는 더더구나 미칠지경이고,
배에 복수가 차오르는 (시)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찾아가라하고, (시)어머니는 자기가 잘못 살았다고 한탄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가족 제도는 어떤것인가?


영화의 결말부에서 변호사의 부인(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good lawyer's wife'란다)은 옆집 고딩과의 관계에서 얻은 아이를 배속에 품고 이혼한다. 상투적이다. 하지만 상투적이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새로운 관계도 이 상투 속에서만 의미 있을진저.


가족의 균열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균열이 둘쭉날쭉 패인 홈에 매몰되지 않고 매끄러운 탈주의 선을 타기 위해서는, 잉여가치의 생산 과정을 규정하는 사회구성체의 균열과 접속해야 한다.
가족의 기원이 사유재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길버트 그레이프'와 비슷하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가족으로 인해 힘들어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가족 그 자체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가족에 대해 문제제기 한다는 점에서. 조니뎁은 간접적으로, 문소리는직접적으로였다는 점이 다르지만 말이다.

영화를 보고 할머니의 팔순 생신 때문에 경향 각지에서 모인, 할머니의 아들딸손주며느리생질당질....나에게 숙부, 당숙, 고모, 당고모가 되는 이들, 그리고 호칭조차 불분명한 사람들과 어울려 '가족' 행사를 했다. 근 스무 시간 동안.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상가와 결혼식에 찾아가 또 다른 형태의 가족 행사에 참여했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 관계는 분명 꿈틀거리고 있지만그것의 실현은, 지리멸렬하고 괴롭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 역시 분명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속에서도준비되고는 있지만,못지 않게 지리멸렬하고괴롭다.

사회적 관계의 변화 없인 가족 관계의 변화 없다?
가족 관계의 변화 없인 사회적 관계의 변화도 없다!

(2003년 10월어느날의 메모에 가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