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중얼거리기

한글날 아침에...딸기와 깍두기, 그리고 한글과 우리말

pourm 2004. 10. 9. 09:30

한 육칠 년 전에 삐삐밴드라는, 요즘 말로 엽기적인 밴드가 있었습니다. 여성 보컬의 독특한 창법과 기발한 가사가 한동안 장안의 화제였지요. 그 밴드의 1집 앨범 '문화혁명'(!) 중에는 '딸기가 좋아 딸기가 좋아. 좋아좋아 좋아좋아…' 하고 소리를 지르는 건지 노래를 부르는 건지, 듣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저는 그 '딸기'라는 노래만 들으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한 가지 떠오르곤 합니다.


저희 집이 충북 제원군(현재는 제천시) 백운면에서 충주라는 실로 엄청난 대도시로 이사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니까 여섯 살 전후의 일인가 봅니다. 초여름의 햇볕이 빼뚜름히 내리 쬐는 어느 날 오후, 저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꼭 붙잡고 공설시장에 장을 보러 갔었습니다. 제가 살던 백운에서는 구경도 못했던 신기한 것들에 눈이 휘둥그레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저는 어느 과일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 본 과일 하나가 제 발걸음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빠알갛게 올망졸망한 것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데 그렇게 먹음직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저는 어머니께 이렇게 졸랐습니다.


"어엄마 나두 저, 깍두기 사줘-. 까악두기 사달란 말이야- "


물론 눈치 채셨겠지만 그 '깍두기'는 다름 아닌 딸기였습니다. 처음 보는 딸기가 먹고는 싶은데 그걸 뭐라고 부를 수가 없으니 제 딴에는 제일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 부른다는 것이 깍두기가 생각났던 것이지요. 물론 그때 제가 그 '깍두기'를 얻어 먹었는지 입맛만 다셨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하지만 한참 후에야 그 '깍두기'를 사람들은 딸기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딸기와 깍두기를 구별하지 못한 저의 경우는 좀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대화를 나누거나 글을 쓰면서 우리는 구분해야 할 단어들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혼동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 단어가 의미하는 대상이나 개념을 혼동하는 결과가 될 텐데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달 9일은 한글날입니다. 일년 내내 별 고민도, 준비도 없다가 한글날만 되면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합니다. '이번 한글날은 어째 제대로 된 행사 하나 없냐. 이래서 되겠냐' 하고 말입니다. 그것도 매우 진지하고 근엄하게.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을 자세히 듣다 보면 '한글'과 '우리말(한국어)'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한글날의 주된 레퍼토리 중 하나인 '국어를 순화하자, 외래어를 쓰지 말고 고유어를 살려 쓰자, 한글은 우수한 글자인데 왜 외래어를 섞어 쓰냐', 이런 따위의 말들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국어, 고유어는 당연히 '말'을 뜻하지만, 한글은 그 말을 적는 '글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과 글자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인데 이들을 섞어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 영어 단어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야! 잘 못 알아 듣겠으니까 한글로 좀 이야기해!' 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한국어와 한글을 혼동하여 쓴 경우입니다. 영어와 대(對)를 이루는 것은 한글이 아니라 우리말(한국어, 국어)입니다. 한글과 대(對)를 이루는 것은 물론 알파벳일 테고요.


또 우리말의 특징을 이야기하며 세종대왕을 들먹거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 한국어와 한글을 혼동하는 예입니다. 당연히 우리말은 한글(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한반도 지역에서 사용되던 '말'이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그 말에 맞게 글자를 지어냈던 것이니까요.


어떤 언어를 제대로 사용한다는 것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거기에는 단어 하나하나의 용법과 그 개념들을 적절하고도 분명하게 구분하여 쓰는 것도 포함됩니다. 딸기와 깍두기를 구분하지 못한 촌놈의 경험을 그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 직장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