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통신: 제1신

원주통신 2019. 11. 26. 12:22

원주세브란스에서의 일주일

 

1.

지난주 금요일(11/15). 한 달에 한 번 서울에서 하는 세미나를 마치고 대학 동기들과 잠깐 만났다. 대학 때 매일같이 어울려 다니며 소란을 피우던 놈들인데 이제 서울서 창원서 원주서 제각각이다. 이렇게 잠깐이나마 모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토요일(11/16)에는 김장을 하러 어머니가 계시는 충주엘 갔다. 이모와 이모부님이 벌써 영동에서 와 계셨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애들은 애들대로 제 일을 찾아서 모두 분주했다.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일요일 하루 종일 쉬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일요일 오후에 살펴보니 오른쪽 고환이 꽤 붓고 딱딱해져 있었다.

월요일 아침 일찍 방광염 때문에 몇차례 다녔던 원주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의 비뇨기과를 찾았다. 의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방광염이 다른 곳으로 옮아서 염증이 생겼을 수 있다며 항생제, 소염 진통제를 처방하고 5일 후에 보자고 했다. 그러나 화요일 아침에는 상태가 더욱 심해져 병원을 다시 찾았다. 의사는 짜증을 내며 2, 3일 정도는 지나야 나아진다고 했다. 내가 차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증상이 더 심해졌다고 하자 그럼 큰 병원으로 가야지 뭐.” 하며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진료의뢰서를 떼주며 나를 내보냈다.

원주세브란스는 지난 여름 건강검진을 하고 처음이었다. 업무과에서 접수를 했더니 오후 4시 10분에 오란다. 학교에 들어와서 요즘 읽던 최남선의 <살만교차기>를 얼마간 읽고 요약했다. 수업준비를 하고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를 확인했다. 점심으로 싸온 고구마와 김치를 먹고 수업에 들어갔다. 몸이 몹시 좋지 않았는지, 두 시간 수업이 끝나고 아주 녹초가 됐다. 부랴부랴 병원에 도착하니 3시 40분. 5시가 될 때까지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거의 맨 마지막으로 만난 비뇨기과 담당 의사는 바로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잠깐 고민을 한 끝에 목요일 수업을 마치고 4시경에 와서 입원을 하기로 하고 병원을 나왔다. 처방전을 들고 약국엘 들어가는데 그 전부터 묵직한 게 미심쩍었던 배가 말썽을 일으켰다.

엄청난 복통이었다. 약을 간신히 타서 택시를 탔지만, 택시에서 거의 데굴데굴 구르는 수준으로 몸음 가눌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해 안방에 누웠는데 산통 하는 여인처럼 연신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지켜보던 아내는 당장 응급실로 들어가자고 했다. 애들은 알고 지내던 집에 맡기고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탔다. 응급실로 가는 길 내내 뒤로 젖힌 의자에서 복통으로 찢어지는 듯한 배를 부여잡고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했다. 응급실을 거쳐 52병동에 입원했다. 역시 복통으로 잠을 자지 못했고 진통제를 맞아도 누워있기가 힘들어 병동 복도를 밤새 배회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는 간호실에 가서 진통제를 더 놔달라고 했지만, 두 번에 한 번은 ‘아직 시간이 안 됐어요. 한두 시간 더 있다 오세요.’ 하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곤 했다.

결국 금요일(11/21) 오전. 의사로부터 들은 진단명은 부고환염과 장염. 부고환염은 고환 뒤쪽의 부위에 염증이 생기는 것으로 통증이 극심하고 치료 기간도 최대 4주까지 간다고 한다. 게다가 장염이 심하게 와서 장폐색 수준이고 CT 촬영 결과 대장이 부어있다는 것. 심한 복통도 이 때문이었다. 담당 의사말로는 장염이 먼저였을 것이라는데 순서가 무엇이 중요하랴. 직접적인 원인은 단지 불을 붙인 부싯돌 같은 것일 뿐, 불이 붙을 환경을 조성한 것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금요일 저녁. 병원에 입원한 화요일 저녁부터 아홉 끼를 거르고 열 끼 만에 금식이 해제되어 죽을 먹는 순간을 그야말로 감개무량. 생각만큼 먹지는 못했지만 아무런 간도 되어 있지 않은 흰죽이 그렇게 맛있는 줄음 미처 몰랐다.

 2.

이 병원은 강원도 전역, 제천 단양 충주 같은 충북 북부, 영주를 비롯한 경북 북부권 방언을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금요일 오후까지 있던 병실은 주로 대장암 등 소화기 계통의 수술 환자들이 있던 8인실이었는데, 아주 친근한 고향 사투리를 밤낮 들을 수 있었고(충주에서 들을 때는 제천 말이 강원도 말처럼 들렸는데 강원도에서 들으니 제천 말은 영락없는 내 고향 말이었다), 아직은 귀에 선 강원도 영동 사투리도 물론 들렸다. 강원도의 병실에서도 익숙한 경북 말은 서울에서처럼 자신감이 넘쳤다. 충남이나 호남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아픈 배를 부여잡고 누워 있는 동안에도 다채로운 말의 향연에 귀가 쫑끗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든 노인과 젊은 여성 간호사 간의 듣기에도 아슬아슬한 반말 대화며(반말은 대체로 노인이 먼저 시작하고 이에 대응하는 간호사는 대체로 ‘하셔’ 꼴의 명령형을 사용해 소변량을 체크하라는 둥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이것저것 시키고 또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노부부의 싸우는 것인지 상의하는 것인지 모를 긴장감 넘치는 대화에서(할아버지는 혼내는 것 같은데, 그걸 받는 할머니는 전혀 혼나는 것이 아닌 태연자약하고 여유로운 말투다), 그리고 다 큰 고등학생 아들과 그 엄마, 그리고 누나 삼자의 <82년생 김지영> 감상평 토론회 같은 지역은 도저히 알 수 없고(분명 서울말과 구별되지 않았다. 서울말로는 화자의 지역을 알 수 없다.) 연령대와 세계관만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대화까지, 그리고 간병인 ‘여사님’과 70대 후반의 남성 노인 간에 벌어지는 어색한 첫인사와 바로 이루어지는 깊숙한 생활상의 필수적 대화까지. 게다가 단정한 표정에 감추어진 간호사들의 엄격한 위계가 드러나는 정담까지. 8인실 병동에서의 말의 향연은 어지간한 진통제보다 효과가 좋았다.

 

3. 

박경리 선생은 30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여 내려온 원주에서 원주통신이라는 글을 썼다. 나는 25년의 서울 생활을 접고 올해 초 느닷없이 원주로 내려오는 바람에 고향에서보다 오래 산 서울, 신촌 생활을 정리할 기회가 없었다. 스무 살 이후의 나의 삶은 늘 오리무중의 안개 속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몇 가지 방향이나 경향성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믿겨지지 않지만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중년의 나이. 그간의 내 삶, 생활, 습속을 한번쯤 점검해 봐야 할 때가 온 것도 같는 생각을 원주 기독교 병원의 침상에 누워서 하게 되었다.

푸코를 엉터리라도 읽은 이상 병원생활을 하는 동안 병원이 역시 ‘정상인’ 혹은 ‘일반인’을 만든다는 점에서 학교, 교도소와 사회적으로는 동일한 기능을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물론 의사의 관심사는 오로지 내 염증 수치에 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스무 살 이후의 삶, 서울 생활 25년에 그대로 포개지는 이 시절의 삶을 줄곧 생각했다. 특히 섭생의 문제에 대해 돌아봤다. 스트레스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푼 것은 아닌지, 결국 그래서 몸이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닌지.

푸코는 권력의 특성이 ‘억압’이 아니라 ‘양생’이라고 했다. 욕망을 일정한 배치 안에 가두고 일정한 흐름으로 규격화한다는 것. 그러나 이 권력에 균열을 내는 것 역시 삶의 의지, 욕망. 물론 이는 삶 자체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좋은 삶’ 혹은 ‘윤리적인 삶’에 대한 성찰에 기반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일 터. 마침 늘 나에게 계발적 관점을 주는 작가 김태권의 신작 <먹히는 것들에 대한 예의>라는 책을 소개 받는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지는 육식 문화사라고 한다.

이제 일요일(11/24) 아침. 아마 내일이면 퇴원이 가능하리라. 하지만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4주간 금주(禁酒)>라는 듣도 보도 못했고 스무 살 이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형별. 그러나 퇴원하는 월요일이면 이미 지난주 화요일부터 6박 7일의 절식 및 금주 훈련을 마친 상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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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삶읽기 2019. 9. 16. 11:49

대체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잘 구분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그동안,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일을 운 좋게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혹독한 여름이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겠지.
(2019년 8월)

친일과 반일, 그리고 '앙가주망'의 사이에서

삶읽기 2019. 9. 16. 11:44

1.

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 말고 맞서야 한다, 는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의 결연한 멘트에 소름이 돋는다. 마치 집회를 마치고 교문 밖으로 나가기 직전 울려 퍼지던 투쟁결의문 낭독의 시간인 것만 같다.

 

‘앙가주망’을 외치는 대통령의 비서와 ‘더이상 지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듬직한 혹은 섬뜩한 국무회의 발언은 이들이 혹시라도 박정희나 전두환과 싸우던 시절의 기분으로, 아니면 의열단 단원의 심정으로 이 사태를 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분노의 땔감을 있는 대로 그러모아 불길을 지피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진보의 자리가 아니다.

 

2.

최고 권력자의 수석비서관 노릇이 ‘앙가주망’이라면 전두환을 찬양한 서정주는 참여 시인이란 말인가. 명민한 그가 그리 생각했을 리야 없을 것이다. 다만,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보수파와의 싸움을 마치 7,80년대 해직 교수가 된 기분으로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들 뿐이다. 게다가 그 싸움이란 것이 대개 정치적인 제스처에 그칠 뿐, 예컨대 지금과 같은 시기를 기회로 삼아 자본의 온갖 요구를 들어주려고 작정한 것처럼 나서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경제 영역으로 들어가면 피아를 식별하기조차 어려워진다.

 

‘조선일보 바로세우기’ 운동은 조선일보를 대표로 하는 보수파가 바로 친일파라는 손쉬운 논리를 채택함으로써 전선을 명확히 했지만(아, 청산되지 못하 과거여!), 그 전선은 종종 진보를 혼란에 빠트렸다. 애국과 매국은 보수의 논리이지 진보의 언어는 아니다. 진보는 비애국을 감수하고라도 소수자의 편에 서야 한다. 요컨대 강제 징용이나 일본군 성 노예 피해자들의 문제를 애국의 논리, 친일 반일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진보의 자세가 아니다. 소수자에 대한 국가권력과 자본의 폭력으로 접근할 때만이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예컨대 일본 내의 진보와의) 연대가 가능하다.

 

3.

사실 보다 근본적인 우려는 지금의 이 사태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정책의 큰 틀이 뒤바뀌는 국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데 있다. 예컨대 미국의 인도 태평양 구상에서 남한을 배제하는 것이 미국의 장기적인 전략이고(작년 싱가폴 회담 전후부터 이따금 보이던 분석이다.) 일본은 이를 감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일본이 내세우는 안보상의 문제라는 것이 영 개운치가 않다. 중국-러시아-북한과 한국-일본-미국의 대결 축에서 한국을 떼어낸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의 군사적 기여도가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아베의 이른바 전쟁을 할 수 있는 정상국가론과도 부합한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이는 말 그대로 위기이자 기회일 것이다. 미국의 패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남한의 지배 블록에게 재앙과 같은 것일 터. 그러나 새로운 사회의 구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무한한 잠재력의 공간이 열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해방 후 펼쳐졌던 가능성이 미국과 소련의 패권에 종속되면서 사라졌다면, 그러한 공간이 다시 열리는 셈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지금의 이 촛불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어떤 어둠을 밝혀야 하는 것인가.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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