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삶읽기 2008. 11. 20. 07:56

출근길.

(사실 등굣길이다. 그런데 등굣길은 아이들이나 걷는 것이라는 유치한 생각이 내 손을 잡아 끈다. 출근길을 걷자고. 물론 강의를 하러 갈 때도 출근길은 아니다. 출장길이란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원 소속 없는 출장. 나를 고용했다고 "치는" 데는 그런 곳뿐인데 그런 데로 출근하지 않고 출장 간다. 그리고 나를 고용했다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 어느 연구실로 나는 출근한다.)

생뚱맞게 칼뵘이 지휘하는 모짜르트를 듣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교향곡 36번이라나 38번이라나...

시디도 되지 않는,

뉴스나,기껏해야 삼김토론 같은 시시껄렁한 농담만 들려 주던 내 차의 라디오는 신이 났다.

텅빈 학교 주차장에서, 소리가 갈라지지 않는 한 볼륨을 크게 높이고 눈을 감았다.

그 앙징맞고 즐거운 리듬의 선들이

내 "기관 있는 신체"로 파고들었다.

얼음처럼 찬 공기도 반갑기만 했다.

연구실 컴퓨터를 켜자마자

알라딘으로 접속.

모짜르트를 검색했다.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지휘자, 연주자의 이름이 떴다.

칼뵘은 거의 품절이었다.

이것저것 클릭해보다가

다니엘 바렘보임 50주년 실황 DVD를 구입했다.
모짜르트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다.

십 년도 전에 베토벤 평전(솔로몬, 윤소영 역)을 읽다가 윤소영이 전한 몇 마디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클래식도 빵과 한 가지로 투쟁을 통해 획득해야 하는 우리의 자산이라고.
(역시 윤소영에 따르면, 그 엄청난 파토스에 당환한 레닌이,
베토벤을 더는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토로했다던, 바로 그 "열정" 소나타가
반 백의 바렌보임이 자신의 데뷔 50주년을 기념하며 고른 두 곡 중의 하나다.)

그렇다. 왜 이렇게 즐거운 경험을 그들에게 빼앗겨야 하는가.

(나도 <베토벤 바이러스>에 감염 되었나 보다.)

집에 들어와 보니 4년 전 샀던 DVD 플레이어는 이미 예전에 고장이 나 있었고, 오디오는 CD만 되지 않는다.
예전에 공연히 젠체하느라고 사놨던 시디들, 길렐스의 피아노 몇 장, 프루트벵글러의 베토벤 9번, 바렌보임의 베토벤 5번 등등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하여, 내가 조만간 베토벤이든 모짜르트든들을 수 있는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또, 우연히 라디오에서 만나지 않는 한.
역시 클래식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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