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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 눈물도 없이
1.
어릴 적, 아침 잠이 없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새벽녘에 책을 읽을 때가 많았다.
네 식구가 모두 모여 꾸물거리는 작지 않은 방은 이른 새벽부터 밝았고, 아버지는 뭔가를 쓰거나 읽으셨다.
나도 /소년소녀 한국전래동화/나 /소년중앙/ 따위의 읽을 거리를 뒤적거렸다.
그런데 귀찮고 성가시게 그때마다 눈물이 났다.
나중에 읽은 어린이용 과학도서에서는, 그게 눈을 보호하기 위한 신체의 '오묘한' 작용이라고 했다.
눈물은 아침에만 나지 않았다.
네 식구 모두 모여 보던 티비 앞에서도 난 연실 눈을 훔쳤다.
언제부턴가 그게 좀 민구스러운 일이란 걸 깨닫고는, 바짝 다가선 티비 앞에서 슬글슬금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래도 식구들은 눈치를 채고 재밌어 했다. "얘 니네 오빠 또 운다."
2.
언제부턴가 눈물이 나지 않는다.
웬만하면 날 울리던 연속극에다 대고 나, 웬만하면 비아냥과 조소를 날린다.
10년 내의 영화 중 눈물을 흘린 게 손가락을 꼽을 정도라 두고 두고 곱씹는 정도다. (팔월의 크리스마스, 박하사탕, 파이란이 그랬다. 최근 /우생순/을 보고 울었다. 임순례의 영화라 해서 유치할 거라는 걱정을 뿌리치고 봤는데, 드라마시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과장된 포즈와 음악이 눈에 거슬렸다.)
물론 아침에 뭔가를 읽을 때도 눈물은 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요즘엔,
인공눈물을 넣는다. 처방전 없이는 살 수도 없는 이놈을 나는 항시 지니고 다닌다.
3.
작년 여름 녹내장 판정을 받고,
'혈액순환개선제, 치매치료제'라는 조금은 썰렁한 효능효과를 자랑하는 알약과 안압약을 처방 받았다. 인공눈물은 그 덤이다.
시신경이 주변부부터 죽어가기 시작하여 심해지면 단추구멍을 눈에 대고 보는 것 같이 시야가 좁아지고, 종내 시력을 잃는 녹내장에는 마땅한 약이 없단다. 그 진행 정도를 늦추는 것밖에는.
담배, 커피, 홍차를 절대 금하라는 의사에게 "술은 어떤가요 ?"했던 내가, 암만 생각해도, 우습다.
술은 그리 큰 관계가 없다는 게 당시 의사의 말이었지만, 최근에 들은 바로는 폭음이 녹내장의 원인일 수 있다는 것.
술자리를 즐기는 데다가 먹었다 하면 폭음을 일삼는 나로서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술은 담배를 부른다.
4.
새해 계획을 완성했다.
담배 완전히 끊기, 일주일에 한 번 산에 가기, 책읽기에 하루 다섯 시간 확보하기, 논문 두 편 쓰기.
이게 신정 때 세운 계획인데, 이 모든 걸 실현하기 위해서는 술을 줄여야 한다. 그래서 마련한 세부 지침.
하루 술자리의 주량 제한 - 소주 한병(8잔), 맥주 1000cc
또 이걸 실현하기 위한 행동 지침 - 소주 한 잔을 세 번에 나눠 마시기.
지난 주말에 실행한 바로는 아주 만족스럽다.
5.
녹내장 판정을 받고, 파란 눈이 된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당연히
처음으로 세운 한해 계획,
'피도눈물도 없이'
지켜지기를
빌어본다
2008년. 2월 3일 설 연휴를 앞두고
KB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