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의 올빼미

삶읽기 2009. 1. 13. 09:19

1.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나 날아오른다.

그리하여 온갖 흔적들을 살펴보고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혜의 여신에게 일러준다. 필경 그 큰 눈을 꿈벅이며...

헤겔은 자신이 그 올빼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프로이센을 절대정신의 궁극적 현현이라고 보았으니.

역사의 흔적을 보고그 법칙을 읽을 수 있는 자, 바로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면에서 맑스는 헤겔의 충실한 후계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보다 더 늦게 날아오른. (물론'갈리아의 수탉'을 이야기했던 맑스이지만 - 아마도미네르바의 올빼미 운운에어깃장을 놓고 싶었겠지- 그가 스스로를 '수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수탉'은 '갈리아'의 프롤레타리아트였고 그는 그 흔적을 살피고 해석하는 자였을 뿐이다.)

미네르바의 날개짓에 사방이 휘청하더니, 이내 그를 잡아가두었다.

그가 정말 '그'이냐 하는 소동은 도무지 무의미한 짓거리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헤겔만도, 맑스만도 아니듯이, ‘그’만일 수도 없다.

미네르바는 항상 이미 여럿이다.

물론 지금이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야 하는 황혼녘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멘셰비키는 주객관적 요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할 테고,

볼셰비키라면 ‘임박한 파국’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팜플렛을 벌써 나눠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혜의 여신을 지키던 올빼미는 이제,

네트의 바다에서 항상/이미 유영하듯 날아다니며, 그리고 비행하듯 헤엄치며

인간의 흔적(인문)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또 다른 흔적이 되고 있다.

(그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일러 지혜라 할 수 있을 터.)

2.

논문자격시험을 앞두고 마음이 답답해 책을 몇 권 샀다.

<현대과학의 풍경>1, 궁리

<네셔널지오그래픽의 과학: 우주에서 마음까지>, 지호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책갈피

100년도 더 전, 5,6년 간격으로 해운법과 측량술, 그리고 수리학을 공부한 조선어 연구자의 이력을 어떻게 이해할지가 고민이기 때문.




<현대과학의 풍경>은 제대로 된 과학사, 과학철학의 이론적 기반을 가지고, 근대과학의 성립사를 주제별로 정리했다. 시험 공부 중에 흘낏흘낏 쳐다보니, 장별로 완성도의 차이가 약간씩은 있고, 일정한 관련 지식을 전제하고 있는 서술이긴 하나, 매우 유용할 듯하다. 어느새 6장 '진화론'까지 내달았다.

나머지 두 권은 아직 맛만 본 셈. 도판이 시원시원한 <내셔널지오그래픽의 과학>은 비교적 평이한 대중서. 고대부터 현대 과학까지 흥미 있는 얘깃거리들을 모아 놓은 듯. <최무영교수의 물리학 강의>는 인문학도를 위한 현대 물리학 강의. 3강 정도 읽었는데, 그 인문적 감각에 고무됐고, 그만큼 기대가 크다.

3.

지난 학기 말, 누군가 내게 물었다. 네 공부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이냐고.

어색한 잠깐,이 지나고 잘 모르겠다고 어물거렸다.

안 됐다는 표정을 남기고 그는 돌아섰지만,

내내 불편했다.

새해가 밝아올 무렵,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다.

‘국어’ 그것은 국가와, (국가 단위의) 균질적 대중 교육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인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국가와 (국가 단위의) 교육이 공모하여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는 그 무엇(중의 하나)이다. (아, ‘올바른’ 한국어와 ‘정확한’ 모국어의 감옥이여.) 언어와 국가는 사실 어떠한 관계도 없는 이질적인 것이나, 근대에 들어 서로를 요구하였고, ‘국어’와 ‘민족정신’이라는 쌍생아를 만들어냈다.

만약, <녹색평론>이 이야기하듯, 소농 위주의 사회구성체가 대안이라면,

균질적 프롤레타리아를 국가적 단위로 생산해 내는 대중/보통 교육 체계에 일정한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고, 이는 그 매개인 ‘국어’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불가피함을 의미한다. 거꾸로 하나의 언어=민족=국가라는 단일 언어 사회를 그 이상으로 하는 ‘언어적 근대’를 넘어설 수 있는 지점은 지역적 생활공간의 부활일 터이다.

과학사 책 3권과 더불어 <레닌과 미래의 혁명>(책세상)을 산 이유이다.

지난 시대의 유령, 레닌이 우리에게 무엇이겠는가마는 (갈리아의 프롤레타리아트 모양으로) 황혼녘은커녕 신새벽에 혁명을 꿈꾸었던,

레닌은 여전히 나에게 동지다.

무엇을 할 것인가?


내 공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전망할 수 있는

새로운 추상기계의 일부이고 싶다.

새로운 내용(의 배치)와 조응하는

새로운 표현(의 배치)이고자 한다.

2009. 1. 13. K.B.M.

(새해 소망을 적으려고 시작했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내 의도와는 달리, 무척이나 헛헛한 글이 되어 버렸다. 이 허전함을 무슨 수로 채울꼬.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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