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1.
소설가 이청준의 작고 소식이 얼마 전 여러 매체를 타고 들려왔다.
매우 지적인 이 작가의 소설중에는 <언어사회학서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연작이 있다.
93년 냄새나는 개봉관 단성사-실제로 냄새가 났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요즘의 최신식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당시의 개봉관을 한 화면에 띄워놓고 보면 분명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을 받을 터-에서 본 <서편제>의 동명 원작 소설 역시 이 연작집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물론 서편제는 언어사회학서설 연작은 아니다.
2.
최근에 길 출판사에서 벤야민 선집의 6번째 책으로 나온, 언어관련 글 모음집을 보고, 벤야민도 언어사회학서설이란 말을 30년대 언어학과 그 관련분야의 움직임을 정리하면서 사용했다는 걸 알았다.
이 별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신비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유물론자(라는 말이 성립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는 특히 말에 관해서 많은 말을 했다. 30년대 미메시스 이론을 펼칠 때도 언어에 관한 관심을 잊지 않았는데, 그는 자연에 대한 모방이 언어적 실천의 기원이라고 보는 듯하다. 뭔가 의미심장하지만, 알듯말듯한, 벤야민 특유의 언명이다. 관심의 대상이다.
3.
또 90년대 초반 이병혁이라는 사회학자가 까치출판사에서 <언어사회학서설-언어와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펴냈다.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과학적 관점으로 언어적 실천을 분석한 것은 거의 최초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사회학 쪽에서 언어사회학이라는 용어를 별로 쓰는 것 같지가 않다. (물론 이병혁의 관련된 후속 저작이 하나 있기는 하다.)
4.
이청준의 이 연작은 70년대의 것이다. 언어사회학이라는 용어를 소설 제목에 사용했다는 것부터가 이 지적인 소설가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주인공은 신문기자 출신의 자서전 대필가이다. 작업중에 걸려 오는 전화 때문에 진저리를 친다. 그중 태반은 잘못된 것이거나 심지어 혼선으로 인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것들이 바로 말의 유령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업은 코메디언의 자서전이다. <그의 말은 그의 말이 아니었고, 그의 웃음은 그의 웃음이 아니었다.> 따위의 몇 문장에서 한치도 더 나가지 못한다.
그러던 차에 이상한 전화 한 통화가 걸려 온다.말괄량이 아가씨는 전부터 죽 당신을 알아 왔다며 시시때때로 전화를 걸어 가뜩이나 심란한 주인공을 괴롭힌다. 처음에는 미심쩍어 하다가 이런 저런 수작 끝에 얼마간 말을 섞게 되고 급기야는 그녀가 입원했다는 병원까지 불시에 찾아 간다. 꽃다발까지 사들고.
그러나 병원에서는 그러한 여성이 입원했다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아니 그런 사람은 없었다.
역시 말의 유령.
말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말을 혹사시켰기에 말의 유령이 사람을 괴롭힌다.
전화벨 소리에 집어든 수화기 속에서는 또 말의 유령이 흘러다닌다. 그러다 혼선 된 전화 코드 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와 뒤엉킨다.
5.
사실 말을 유령으로 만든 것은 인간이다. 말을 그 말의 발화 상황으로부터 유리시킨 것은 근대적 인간이다.
근대는 말이 그 자체로도 유의미한 자립적 실체임을 강조했다.
언어는 외부로부터 영향받지 않는 법칙이 그 자체에 내재해 있고 구체적 발화를 규정짓는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영향받지 않는 랑그이어야 한다.
인간과 분리되어도, 아니 그래야만 똑부러진 말로 대접받게 되자, 말들은 미련없이 그들의 출처와 조건을 지워버리고 자유롭게 유영하기 시작했다. 분자적으로.
시간이 홀로 흐르고, 공간이 자족적이듯, 화폐가 실물과 관계없이 스스로 가치를 증식하듯, 언어는 세계나 인간과 별개로 자존한다.
다시 잡아 매야 하는가. 글쎄, 그것은 일단 가능하지가 않을 듯 싶다.
어렵다.
2008.8.19.
KBM
'책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격물치지 (0) | 2010.03.04 |
---|---|
죄의식 (0) | 2010.02.16 |
변유, 사유, 정경, 그리고 녹색평론 (0) | 2008.08.03 |
한일근대어문 연구의 쟁점_토론문 (0) | 2008.03.02 |
언어적 근대를 찾아 - 도쿄 여행 후기 (0) | 2008.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