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

밥벌이 2004. 9. 13. 11:57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

클라이브 크리스티 편저, 노영순 옮김/ 도서출판 심산문화



1. 보편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동남아시아사를 위하여


동남아시아의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는 이 책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각국의 개별사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동남아시아사를 기술하고 있다. 지금까지 출간되었던 동남아시아 관련 역사서들은 대개 개별 국가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동남아시아’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이 지역은 유사한 역사적 경험의 공유를 통해 나름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이 책은 그렇게 일정한 지역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 동남아시아사 전체를 통합적 관점으로 다루고 있다.

동남아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의 장점은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매우 직접적이고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는 데에 있다. 이렇게 각 사건을 실감 있게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의 독특한 구성에 힘입은 바 크다. 이 책은 일종의 독본(讀本) 형식인데, 동남아시아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추리고 이 사건들의 배경과 의미, 그리고 그 영향 관계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각종 사료를 배치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장에서 직접 역사를 만들어 갔던 이들의 육성이 그대로 녹아 있는 여러 증언들과 문서 보관소에서 잠자고 있던 각종 원사료들이 우리에게 가감 없이 제시된다. 호찌민과 키신저의 회고담과 수까르노의 연설문이 등장하는가 하면,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서구 열강이 취한 동남아시아 정책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각국 행정부의 비망록과 정보국의 보고서 등도 제시된다. 물론 각 사건들의 의미를 깊이 있게 분석하는 역사학자들의 통찰력 있는 사적(史的) 기술 또한 만날 수 있다.

이 밖에도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약소한 국가, 또 민족국가의 염원을 달성하지 못한 소수민족, 나아가 이데올로기나 종교 때문에 주변화된 집단들에 대해서도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이제까지 들어 보지 못했지만,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여러 소수 민족과 각종 정치 단체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보를 얻게 된다.



2. 20세기, 동남아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동남아시아는 대륙부와 해양부로 나뉜다. 대륙부 동남아시아는 크게 보았을 때 타이, 버마, 베트남 등이 주축을 이루는 곳으로서 인도 문명과 불교 문명이 만나는 지역이었다. 이에 비해 해양부 동남아시아는 하나의 광범위한 언어-문화 집단(말레이 폴리네시아계)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5세기 이후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가 우세한 지역(필리핀)으로 나뉘게 된다.

이렇게 여러 문명권과 종족 및 왕조로 구성된 복잡한 형태의 각 구성체들을 ‘동남아시아’라는 하나의 테두리로 묶을 수 있는 통일성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 이 책이 제기하는 첫 질문이다. 여타의 아시아 지역과는 다르게 지배적인 종교도, 언어도, 문화도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지역으로부터 문화, 종교, 민족이 넘쳐 흘러들어 온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볼 때 놀라우리만큼 동질적인 경험을 해 왔다. 16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유럽의 해양 강대국은 종교적 상업적 목적을 위해 동남아시아의 주요 무역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20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는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미국 등이 동남아시아의 대륙부와 해양부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현재의 태국으로 이어지는 샴 왕국만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이다. 식민지 지배의 경험은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상정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이 다루는 첫 시기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수년 전이자 식민 강대국이 동남아시아를 거의 완전히 차지하고 있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 동남아시아의 각 민족들은 근대적 교육?종교?언론?정치 시스템을 갖추어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또한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치열한 저항과 정파간 연대가 모색되었다.

1942년 초부터 1945년 중반까지 계속된 일본의 군사 점령도, 역시 참담한 경험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 지역이 또 하나의 공통된 경험을 갖게 해 주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지배 기간 중 이 지역의 주요 민족주의 단체들은 제법 큰 영향력과 세력을 가진 대중운동 조직으로 발전했고, 전후의 민족국가 건설 과정에서도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 지역은 모두 탈식민화를 경험한다. 비교적 빠른 시기에 탈식민화 과정이 진행되지만, 곧 동남아시아 전체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세계정세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하여 인도차이나 국가들과 여타의 나라들 간에, 그리고 각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과 반공산주의자들 간에 극심한 균열이 생겼고, 결국은 베트남전과 캄보디아 내전 등으로 치달아 동남아시아 전체가 쓰라린 피의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이 책은 1970년대 중반까지의 동남아시아를 다루고 있다. 때문에 현재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다. 이는 이 책이 다루려고 했던 역사적 시기의 한 매듭이 이때(1970년대 중반)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편저자의 설명이다. 그 후의 사건과 현상들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들이어서 아직은 역사 기술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의 언급은 그가 동남아시아의 근현대사를, 그리고 역사 기술이라는 것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땅거미가 내려앉아야 날개를 편다’는 헤겔의 유명한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사건의 ‘의미’와 장기간에 걸친 모양 갖추기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식민 시기, 탈식민 시기 그리고 그 직후에 대해 이러한 특권적인 시각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오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라는 레토릭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레토릭만큼이나 멀리 떠나가 버린 시대로 이동해 가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역사라고 간주할 수 있는 시점에 다다라 있다. (35쪽)

영화 '바람난 가족'에 대한 단상

삶읽기 2004. 9. 7. 13:26


가족은 사유제와 기원을 같이 한다.
물론 여기서의 가족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말한다.
'내 재산'을 '내 아들'에게 물려주어야겠다는 필요가 '내 피'와 '남의 피'를 구분하게 했다.
내 피와 남의 피의 구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순수한 '내 피'를 가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족제도 내에서 여성의 '바람'은 죄악이된다. 불결이고 욕됨이다.

새로운 사회에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제도가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의미 없는 소리이다. 대안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동어반복이기 때문.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관계와 생활 방식을 전제하는 것이고 이는 새로운 가족 관계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결국, 새로운 사회에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제도가 형성될 것이다, 라는 말은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사회다, 라는 말.

영화 '바람난 가족'은 "지금의 가족 관계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남편도 힘들고 아내도 죽겠고, 입양된 아이는 더더구나 미칠지경이고,
배에 복수가 차오르는 (시)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찾아가라하고, (시)어머니는 자기가 잘못 살았다고 한탄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가족 제도는 어떤것인가?


영화의 결말부에서 변호사의 부인(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good lawyer's wife'란다)은 옆집 고딩과의 관계에서 얻은 아이를 배속에 품고 이혼한다. 상투적이다. 하지만 상투적이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새로운 관계도 이 상투 속에서만 의미 있을진저.


가족의 균열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균열이 둘쭉날쭉 패인 홈에 매몰되지 않고 매끄러운 탈주의 선을 타기 위해서는, 잉여가치의 생산 과정을 규정하는 사회구성체의 균열과 접속해야 한다.
가족의 기원이 사유재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길버트 그레이프'와 비슷하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가족으로 인해 힘들어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가족 그 자체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가족에 대해 문제제기 한다는 점에서. 조니뎁은 간접적으로, 문소리는직접적으로였다는 점이 다르지만 말이다.

영화를 보고 할머니의 팔순 생신 때문에 경향 각지에서 모인, 할머니의 아들딸손주며느리생질당질....나에게 숙부, 당숙, 고모, 당고모가 되는 이들, 그리고 호칭조차 불분명한 사람들과 어울려 '가족' 행사를 했다. 근 스무 시간 동안.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상가와 결혼식에 찾아가 또 다른 형태의 가족 행사에 참여했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 관계는 분명 꿈틀거리고 있지만그것의 실현은, 지리멸렬하고 괴롭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 역시 분명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속에서도준비되고는 있지만,못지 않게 지리멸렬하고괴롭다.

사회적 관계의 변화 없인 가족 관계의 변화 없다?
가족 관계의 변화 없인 사회적 관계의 변화도 없다!

(2003년 10월어느날의 메모에 가필함)


고종석, 엘리아의 제야, 문학과지성사

책일기 2004. 9. 6. 20:53


내가 좋아 하는 글쟁이는 셋이다. 김현, 김훈, 고종석.

그러나 셋의 글쓰기 스타일은 모두 다르다. 김현은 나를 힘들게 하고, 김훈은 나를 화나게 하고, 고종석은 나를 긴장시킨다. 그러나 고종석이 제일 편하다. 긴장시키는데도 제일 편하다. 아마도 그의 글쓰기 스타일이 나랑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 하면 아주 우스운 얘기가 될 터이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글을 보면 마치 내가 쓴 글을 보는 것처럼 편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헐거운 느낌이다. 그런 면에서 특히 김현이나 김훈과 다르다. 이네들의 글은 꽉 짜여져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알이 꽉 박힌 어떤 열매처럼 과육이 삐져나오는 어떤 열매처럼 나를 흥분시킨다. 그러면서도 김현은 신체적 조성이 맘껏 높아지는 기분을 선사하고(물론 가끔 책을 집어 던지게도 하지만), 김훈은 나를 뻣뻣하게 한다.

이 소설집은 전보다 훨씬 더 헐렁하다. 고종석의 글이 편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헐렁슬렁거리지는 않았다. 여전히 소재의 한정성을 지적하게 된다. 재망매로부터 이어지는 누이애. 그리고 언어학 관련, 기자 관련, 프랑스 관련(이번에는 홍세화도 등장했다. 맙소사). 안티조선과 지난 대선 이야기가 첨부되기 했지만.

'엘리야의 제야'는, 대선 이야기로 물타기를 했지만, 여지껏 고종석이 쓴 누이애 중 가장 찐한 근친상간 이야기. 누이 생각은 그에 비해 상당히 맥빠지는 누이애. 한 일이년 전쯤 어느 계간지에서 읽은 단편임에 분명하다. '파두'는 안티 조선과 유사 누이애 이야기. 전반부는 비교적 조여주는 맛이 있었지만, 안티조선이 느닷없이 돌출하는 후반부에서는 맥이 탁 풀림.

'피터 버갓 씨의 한국 일기'는 촘스키를 비아냥거린 일기체 소설로 읽힘. 촘스키를 꽤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이전의 입장이 왜 바뀐 것인지 아리송. 또 유태계인 촘스키를 게르만계로 설정한 이유가 뭔지 모르겠음. 그게 지적 정치적 위선을 비웃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인지... 그리고 남한의 사회언어학회를 실제 이상으로 고평가한 것은 그가 남한의 사회언어학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 봄.

'아빠와 크레파스' 프랑스와 한국의 교육문제를 걸고 넘어짐. 홍세화를 모델로 한 듯한 인물과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 딸아이가 하나 남은 눈의 시력마저 잃어버리게 될 때 눈물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림. 이제 생각해 보니 [아버지]류의 삼류소설이 아닌가 의심스러움. '카렌.' 몇 년 전 읽은 어느 문학 계간지(문학과경계거나 문학판이거나 문학동네거나...재작년 말이거나 작년 초일 게다. 그 후에는 어떤 계간지도 사 본 적이 없으니)에서 읽은 글인 것 같다. 그걸 하염없이 늘려 놨다. 하염없이 지루하다. 글맛 말고 소설맛은 없다.

고종석의 글쓰기는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임을 다시 확인했지만, 동시에 너무 허랑허랑한 소설이어서 아쉬움이 남는 읽기였다. 누군가 전작주의라는 말을 하더만, 한 작가의 글을 모두 읽는 읽기 방법을 전작주의라고 하더만, 나에게는 고종석이 그 비슷하다. 그의 소설과 에세이 중 제일 편하게 읽은 글이다. 하지만 그만큼 느낌이 없다. 쿵...하는 놀람도, 엇 하는 비켜섬도, 에... 하는 엇나감도...

그래도 마지막 소설 카렌의 첫장면은 아직 생생하다.

내 마음이 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