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본다'는 것에 대하여 - 루쉰의 경우

pourm 2013. 4. 23. 17:19

 

1.

 

1881년 저장(浙江) 성 사오싱(紹興)에서 태어난 루쉰의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이다. ‘루쉰(魯迅)’이란 이름은 그가 사용한 수많은 필명 중에 하나인데, 1918년 ‘문학혁명’이 제창되던 『신청년』에 「광인일기」를 발표하며 처음 사용한 것이다. 루쉰이 태어났을 때만 해도 그의 집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으나 조부가 부정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고 부친이 중병으로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가문 자체가 매우 쇠락하게 된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은 대체로 『아침 꽃 저녁에 줍다(朝花夕拾)』(1927)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당시 중국 문단의 한 가운데 있었으나 결코 편치 않은 상황에 처해 있던 루쉰이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되돌아보는 산문들을 써내려 간 것이 바로 이 책인데, 예컨대 여기에 실린 「키다리와 『산해경』」, 「오창묘의 제놀이」, 「백초원에서 삼미서옥으로」와 같은 글들은 다복했던 유년 시절을 그리고 있으며, 「아버지의 병환」이라는 글에는 부친의 병으로 인해 초래된 곤란함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소한 기록」과 「후지노 선생」이란 두 편의 글에서 그는 난징(南京)과 일본 유학 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과학 기술과 의학을 공부하던 모습, 그리고 이런 방향에서 갑자기 일탈하여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가 밝혀진 곳이 바로 이 글들인 것이다.

 

 

 

 

 

 

 

 

2.

 

1898년 5월 18세의 나이에 그는 난징의 수사학당(水師學堂)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에 의해 설립된 곳으로 ‘수사(水師)’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양식 기술에 입각한 해군(海軍)을 양성하기 위한 곳이었다. 그러나 양무운동이라는 것이 청나라의 정치 제도나 학문 사상은 그대로 두고 서양의 무기와 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던 만큼 이 학교의 교과 과정 역시 구태의연했던 듯하다. 입학시험 문제 자체가 『춘추좌전』이나 『주역』, 『논어』 등에 나오는 구절에 대해 논하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적인 교육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기계, 천문, 항해 등의 과목이 있었지만 비중이 매우 미비하여 ‘수사(水師)’를 길러 내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는지 루쉰은 1년이 채 못 되어 이 학교를 그만두고, 1899년에는 역시 난징에 있던 육사학당(陸師學堂) 부설의 광무철로학당(鑛務鐵路學堂)에 다시 입학한다. 탄광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기술자를 길러낼 목적으로 설립된 이 학교에서 그는 처음으로 물리학, 지질학, 광물학 등을 배웠고 거기에 신선한 흥미를 느꼈다. 또 여기서 그는 토마스 헉슬리의 사회진화론을 옌푸(嚴復)가 번역 소개한 『천연론(天演論)』을 읽고 이에 심취하게 된다.

 

3년 만에 이 학교를 졸업한 루쉰은 1902년 일본으로 유학하게 되고 1904년까지 도쿄의 고분(弘文)학원에서 수학한다. 중국 유학생들을 위해 일본어와 기초적인 서양 과학을 가르치던 이 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센다이(仙臺)의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그가 훗날까지 존경해 마지않던 ‘후지노 선생’의 해부학 수업을 듣게 되는데, 그의 인생행로를 바꾸게 했다는 그 유명한 ‘환등기 사건’이 발생한 것 역시 이 학교의 수업에서였다.

 

 

 

  요새 미생물학의 교수법이 어떻게 진보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시기에는 슬라이드 필름으로 미생물의 모습을 비쳐 주곤 했었다. 그래서 강의가 일단락된 뒤에도 시간이 남으면 교수님은 풍경이나 시사에 관한 그림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남은 시간을 때우곤 했다. 당시는 마침 러일전쟁 시기라 자연히 전쟁에 관한 화면이 비교적 많았다. 나는 이런 교실에서 언제나 내 동급생들의 박수와 갈채에 기꺼이 장단을 맞추어야만 했다. 한번은 화면에서 문득 내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중국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한 사람은 묶여서 가운데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좌우에 서 있는데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이었으나 무감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설에 의하면 묶여 있는 사람은 러시아를 위해 군사 기밀을 정탐하였기 때문에 바로 일본군이 참수하여 본보기를 보이려고 하는 중이었다. 둘러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 본보기의 성대한 행사를 감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2학기 종강하기 전에 나는 도쿄로 나와 버렸다. 왜냐하면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나는 의학이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릇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멀쩡하고 건장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관객이 될 수밖에 없으며, 병으로 죽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불행하다고 여길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첫 번째 중요한 일은 그들의 정신을 고치는 데 있다. 당시 나는 정신을 고치는 데 있어 최선으로 당연히 문예를 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리하여 문예 운동을 제창하게 되었다. (『외침』 서)

 

 

 

 

 

 

3.

 

그가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수학하던 1904년에서 1905년의 시기는 마침 러일전쟁이 벌어지던 때이다. 세균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활용되던 환등기는 러일전쟁의 승전보를 확인하는 슬라이드를 돌리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루쉰 역시 그의 일본인 동급생들에게 장단을 맞추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환등기에 의해 비추어졌던 화면은 패퇴하는 러시아군도, 용맹무쌍한 일본군도 아니었다. 거기에 드러난 사진에는 루쉰과 같은 중국인들이 있었다.

 

‘무감각한 표정’의 그들 가운데 한 명은 묶여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묶인 사람은 일테면 러시아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것이고, 본보기 삼아 그를 처형하는데 그것을 구경하고자 또 수많은 중국인들이 모여든 상황이었다. 이 사진을 보고 루쉰이 생각한 것은 중요한 것은 의학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신체의 병을 낫게 하는 것보다 ‘저들의’ 정신을 고치는 것이 훨씬 급하고도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신을 고치는 데 최선은 문예라 여기고 ‘문예 운동’을 제창하게 되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무엇을 보았느냐가 아니라, 그가 그것을 보게 된 상황의 특수성이고 또 그 배치의 이질성이다. 그는 환등기로 비춰지는 일본군의 ‘승전보’를 그의 일본인 동급생들과 함께 ‘박수 갈채’를 보내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본인의 시각에서 슬라이드를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처음에는 마지못한 호응이었겠지만, 이 상황이 반복되면서 그는 그의 말처럼 ‘기꺼이 장단을 맞추’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던 순간 그는 바로 그 화면에서 중국인들을 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때 그는 중국인의 시선으로 중국인을 바라 본 것이 아니다. 이 상황과 배치가 특수한 것은 중국인인 그가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의 시선으로 중국인을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루쉰이 이 장면을 먼 훗날까지도 잊지 못하고 충격적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위와 같은 정도의 사건을 중국 내에서 접했더라면 이와 같은 충격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4.

 

사실 이 ‘환등기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케우치 요시미(1961/1997: 72-73)에서 지적된 것처럼 이 앞에 있었던 또 하나의 사건을 알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아침 꽃 저녁에 줍다』의 「후지노 선생」에서 그 전모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이 사건을 간단히 말하면, ‘후지노 선생’이 루쉰의 필기 노트를 고쳐주면서 시험 문제를 유출했을 것이라고 오해한 일부 학생들이 루쉰에게 짓궂은 짓을 한 일이다. 이 일에 대해 그는 “중국은 약한 나라이므로 중국 사람은 당연히 저능아이다. 점수를 60점 이상 맞은 것은 곧 자기의 실력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이 의혹을 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어 나는 중국 사람들을 총살하는 장면을 참관하는 운명이 되었다.”(「후지노 선생」)라고 회고하고 있다. 뒤에 나오는 ‘중국 사람들의 총살 장면’이란 바로 앞의 ‘환등기 사건’을 말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다케우치 요시미가 지적한 것처럼 그가 환등기를 통해 본 것은 동포의 비참함 뿐만이 아니라 그 비참함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루쉰은 ‘아 중요한 것은 질병의 치료가 아니라, 정신의 개조로구나!’라는 식의 즐거운 발견을 했다기보다는 일종의 처절한 ‘굴욕감’을 맛보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다케우치 요시미 1961/1997:73). 이것이 루쉰의 ‘회심’을 보다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루쉰의 ‘회심’을 가능하게 한 배치의 특수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했던 독특한 상황을 의미한다. 자신의 행동이나 행위를 스스로 평가했을 때는 어쩔 수 없거나 당연한 것으로 인정될 수도 있는 것이 ‘타자의 시선’을 취함으로써 지극히 부자연스럽거나 매우 비합리적으로 다가 올 수 있는 것이다. 루쉰의 ‘회심’은 결국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특수한 배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학위 논문 예심 원고에 있던 것인데, 본심 때 덜어내고 책으로 엮기에도 부적절한 듯하여 여기에 올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훗날 따로 발표할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13. 4. 昌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