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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언어 (1)
『삶으로서의 은유』에서 레이코프와 존스는 은유적 표현이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의 사고 과정이나 계념 체계가 전반적으로 은유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레이코프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된 ‘프레임 이론’ 역시 크게 보면 은유에 대한 그의 성찰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A라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B라는 좀더 익숙하면서 구체적인 무엇을 끌어오는 것이 은유라면, 이때 B를 어떤 것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A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는 것이 ‘프레임 이론’이기 때문이다. 은유가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바로 그 은유로 인해 사물이나 현상의 특정한 면이 은폐되거나 아예 전반적인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는 설명 역시 ‘프레임 이론’과 맥이 닿아 있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은유에 얼마나 크게 의지하고 있는가를 각양각색의 예를 통해 보여주는 『삶으로서의 은유』에 따르면, 언어에 대한 우리의 이해 역시 은유적이다. 즉, 사물을 어떤 그릇에 담아 전달하듯이, ‘특정한 의미를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 전달’하는 것으로 우리가 의사소통 행위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를 저자들은 ‘도관 은유’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치 수도관을 통해 물이 흘러가듯이, 기호에 저장된 의미가 손상됨 없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온전히 전달된다고 믿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도관 은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은유는 레이코프와 존스가 지적하듯이 필연적으로 언어행위의 특정 측면을 은폐한다. 마치 “낱말과 문장이 어떤 맥락이나 화자로부터도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레이코프․존스 1980/1995:31) 화자와 청자가 처한 맥락과 관계없이 설명될 수 있는 언어행위는 그리 많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런데 사실 언어행위 일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근대언어학이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전제로서 이는 예컨대 아래와 같은 야콥슨의 의사소통 모델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언어행위를 이루는 요소를 ‘발신자, 수신자, 상황, 메시지, 접촉, 코드’ 6가지로 제시하는데, 상황(지시물)을 반영한 메시지(내용)를 발신자가 코드화(encoding)하여 어떤 접촉(경로)을 통해 수신자에게 전달하면 수신자는 이것을 탈코드화(decoding)하여 메시지(내용)를 해석한다는 것이 아래 그림이 뜻하는 바이다. 따라서 이때의 상황은 발화 맥락이나 조건 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야콥슨 본인이 지적했듯이 ‘지시물’ 정도의 의미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발신자와 수신자가 공유하는 ‘코드’에 의해 메시지의 의미는 발신자가 생산한 그대로 수신자에게 전해진다는 것이고, 이는 위에서 레이코프와 존스가 지적한 도관 은유와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다.
| 상황 |
|
발신자 | 접촉… 메시지… 접촉 | 수신자 |
| 코드 |
|
사실 야콥슨은 위의 의사소통 모델을 통해 언어로 인해 벌어지는 다양한 국면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모델에서 관건이 되는 사항은 발신자와 수신자가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제되는 ‘코드’이다. ‘코드’를 특정한 표현(기표)에 어떤 가치(기의)를 부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체계라 할 때, 코드의 불일치는 결국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반대로 ‘코드화’와 ‘탈코드화’는 방향만 바뀐 것일 뿐 실질적으로는 동일한 행위의 반복인 셈이다. 그리고 근대언어학이 의미 있는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것 역시 바로 이 ‘코드’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특정 언어에서 일정한 음운이, 형태가, 통사 구조가 가지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런 가치를 결정하는 음운론적, 형태론적, 통사론적 체계와 법칙은 또 무엇인가? 위의 의사소통모델에 의하면 이런 질문은 모두 ‘코드’의 해명에 해당한다. ‘코드’에만 집중했다는 것은 화자와 청자는 누구인지, 선택된 경로(매체)는 무엇인지, 지시 대상의 성격은 어떠한지 등은 메시지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았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20세기 초 이 땅에서 주시경이 주도적으로 제기한 ‘국어’에 관한 담론 역시 이러한 의사소통 모델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그가 1905년경부터 ‘국어’의 실체로 끊임없이 언급했던 ‘본음, 원체, 법식’이란 것은 ‘국어’에 고유한 ‘코드’를 주시경식으로 부른 명칭에 다름 아니다. ‘원소, 합음, 씨, 변체, 짬듬’ 같은 특유의 개념들 역시 ‘국어’에 고유하게 체계화되어 있다고 가정된 ‘코드’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들이다. 평등하면서도 합리적인, 그러나 그러면서도 민족적 정체성을 간직한 근대적 주체의 탄생을 바랐던 주시경의 소망 역시 결국은 위의 의사소통 모델과 부합하는 것이다. 언어적으로 ‘국민화’된 이상, 즉 ‘국어’ 고유의 ‘코드’를 공유한 이상 그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성적 지역적 차이는, 위의 의사소통 모델에서도 또 주시경의 ‘국어문법’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의사소통 모델은 분명 중세적 세계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것이다. 보편어로 씌어진 성스러운 텍스트를 특수한 계층이 독점하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평등한 인간관계를 전제로 민족어를 통해 세속적 텍스트를 대량으로 유통, 소비하게 되는 근대 사회에 이러한 의사소통 모델은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의사소통 모델은 분명 언어행위의 특정한 국면을 은폐한다. 우선 이 모델은 의사소통 행위에 권력 관계가 개입되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예컨대 의사와 환자, 교사와 학생, 또는 경찰과 피의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에는 그 대화가 기대고 있는 제도로 인해 대화 참여자 간에 힘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러나 야콥슨의 의사소통 모델은 일테면 무중력 상태 같은 것을 가정하는 것으로서 의사소통에 개입하는 권력 관계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또 다른 문제는 이 모델이 언어를 정보 전달의 관점으로만 보게 만들어, 오스틴이나 설의 설명처럼 말한다는 것이 어떤 특수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 판사가 법정에서 피고에게 내리는 판결은 단지 정보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배를 퀸엘리자베스 2호로 명명하노라!”라는 말은 일정한 조건에 부합할 경우에만 이른바 ‘발화수반력(illocutionary force)’을 갖는 것으로서 정보 전달의 관점으로는 이 발화가 자칫 아무런 의미가 넌센스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정보전달이라는 측면을 도외시하고 우리의 언어행위를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언어행위의 다양한 측면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야콥슨의 의사소통 모델은 그 유용성만큼이나 일정한 약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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