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녹색평론 125호

pourm 2012. 7. 15. 09:11

 

1.
구독료가 밀렸다는 메모지와 함께 우송된 이번 호 <<녹색평론>>에서,
김종철은 72년 로마 클럽의 그 유명한 <성장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40년이 지나 되돌아 보니, 당시에 예측했던 각종 데이터 들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것.
1인당 식량, 1인당 산업생산, 환경오염, 비재생에너지자원(석유 등), 세계인구 등의 예측치가
현재까지 거의 정확히 맞아 떨어지고 있단다.
그리고 <성장의 한계>가 성장의 한계점으로 예상한 시점이 대략 2030년.
우리는 경제<위기>를 경제<성장>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그 <성장>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온다면?

석유 네 드럼으로 곡물 한 가마를 생산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생활 모든 것이 그렇지만, 석유가 없으면 농사도 지을 수가 없다.
<근대적 삶>이란 것 자체가 바로 이 값싼 에너지, 석탄과 석유 없이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던가.
몇 년 전부터 피크 오일, 즉 석유 생산량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시점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미 2006년경에 지났다고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그 피크 오일의 시점 부근에 있다는 것에는 대체적인 동의가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변경>의 소멸. 근대 세계 500년은 변경에 대한 착취, 그것을 통한 성장의 역사가 아닌가.
비서양이라는 변경에 대한 서양의 착취, 그리고 농촌이라는 변경에 대한 도시의 착취.
물론 <변경>을 기반으로 한 성장 역시 이제는 불가능하다.


2.
녹색평론이 주장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농업에 기반한 사회,
자립과 자치, 그리고 상호부조의 공동체가 기반이 되는 사회이다.
협동조합 '운동'을 강조하고(웰빙 산업으로 변질된 조합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을 도시에서 복원할 수 있는 삶의 방식으로서),
유럽과 일본에서는 이미 논의가 제법 이루어지고 있다는 기본소득 제도를 열심히 소개하기도 했다.
남녀노소, 빈부를 가리지 않고 국민 모두에게 최저 생활이 가능한 정도의 기본 소득을 제공하자는 것.

그리고 최근에는 현 금융 제도의 기본적인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은행은 제가 가지지도 않은 돈을 대출해주고, 게다가 이자까지 쳐서 받아 간다.
지금 준비율 제도에 따라, 스스로 가진 자본의 몇 배나 되는 돈을 대출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신용대출을 통해 은행이 실질적으로 돈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
중앙은행에서 실제로 발행하는 통화는 시중에 거래되는 통화량의 극히 미미한 수준이고,
대부분은 이렇게 은행이 대출을 통해 만들어 내고 있으며, 또 그 대출에 대한 이자를 받아 챙기는 것. (시뇨리티)

근데 이때 가장 큰 문제는 은행은 단 한번도 이자에 해당하는 돈은 만들어 낸 적이 없다는 것.
대출금은 통장에 숫자로 찍어주는 식으로 만들어 내지만(신용대출. 그리고 이것은 은행이 실제 갖고 있는 돈을 훨씬 뛰어 넘는다),
은행은 결코 이자에 해당하는 돈을 만든 적이 없다. 시중에는 이자에 해당하는 돈이 있을 수 없다는 말.
이를 해결하는 것은 시간차. 이자는 어차피 나중에 갚는 것이니까 그동안 <경제성장> 해서 그것을 기반으로 나중에 이자를 갚는 것.
결국 금태환 정지(브레턴우즈 체제 붕괴)로 인해 돈의 실물과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 버린 현 금융 체제 역시 '성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아니 거꾸로 지금의 금융 체제는 경제성장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
결국 빚으로 굴러가는 이 사회에서(재벌이든, 국가든, 개인이든 빚이 없는 자 누구인가!) '돈을 갚으라!'는 말은 사회 전체로 보면 곧 '경제 성장을 하라! 더 빨리 더 많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끊임 없는 경제 위기가 언제나 금융 위기와 동의어로 해석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성장>이 더 이상 불가능한 시점이 도래한다, 는 것이 40년전 부르주아학자들에 의해 작성된  <성장의 한계>가 말하는 것이고
이제 그 시점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 <녹색평론>, 아니 '상식'이 전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장' 없이는 존속할 수가 없도록 짜여져 있다.

3.
내가 읽은 <자본>의 가치론은 상품의 가치가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에 그 핵심이 있지 않다. (상품의 가치가 노동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담 스미스이고, 리카르도이다.)
오히려 상품의 교환(거래) 이후에야 노동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이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새로운 지점이다.

포털 사이트 <파란>이 7월 31일부로 문을 닫는다. 그리고 메일과 블로그가 <다음>으로 이전된다.
그래서 몇 가지 귀찮은 작업을 했댔다. 이전 계정으로도 메일을 받을 수는 있으나,
어쨌든 나의 메일 주소는 pourm0813@daum.net으로 바뀌었다.
블로그도 티스토리라는 듣도 보도 못한 곳으로 옮겨졌다.
아마도 크게 불편할 것은 없겠으나, 그렇다고 물론 기분이 썩 좋을 리도 없다.
물경 2만이 넘었던 블로그 방문자 수가 20명이 채 안 될 정도로 줄었다.
괘씸한 마음에 생각이 멀리까지 미쳤다.

이것들이 필경 회원수와 그들의 충성도 등을 근거로 <다음> 쪽과 거래를 했을 텐데,
그래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챙겼을 텐데, 그중에 내 몫은 없겠냔 거다.
나는 분명 그 상품의 가치 형성에 일정한 기여을 했다.(거래되었으므로 당연히 <파란>은 상품)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정치경제학적인 의미에서 노동을 했던 것이고 임금을 받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포털 사이트는 물론이고 페이스북, 트위터 사용이 무료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노동하는 자가 생산수단을 사용한다고 자본가에게 사용료를 내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오늘도 나는 주야를 가리지 않고서 열심히 노동한다.
나의 일터 (가운데 하나인) 페이스북의 사장, 저커버그여 나에게 임금을 지불하라!

비 오는 일요일 오전.
2012.7.15. 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