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그 첫 5,000년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정명진 옮김, 2021.
빚, 부채는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가? 왜?
빚을 갚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의식/감각은 어떤 제도적 기반에서 나온 것인가?

1.
이 책은 등가교환이라는 시장의 언어가 상식이 된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인류학적 비판, 그리고
물물교환이 경제 관계의 원초, 원시적 형태라는 상식과 경제학적 가정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경제학은 언제나 물물교환의 상황을 상상하고 그 번거로움을 극복하고자 화폐 제도가 등장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신용거래가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인류학적으로 보면 한 공동체의 경제가 물물교환으로 돌아가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고(물물교환은 언제나 한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오히려 신용거래가 고대사회에서부터 더 보편적인 형태라는 것.
2.
저자가 보는 경제적 관계-도덕적 원칙은 세가지.
공산주의, 교환, 계급
공산주의는 되갚음이 영원히 유예될 수 있는 관계/도덕이며,
계급은 되갚음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평등한 관계/도덕이며,
교환만이 등가의 되갚음이 요구되는 관계/도덕이다.
경제학 및 경제/시장의 탄생은 이 가운데 등가교환을 유일한 경제적 관계-도덕 원칙으로 전제한 것이다.
정치, 종교와 무관하게 자신의 원리/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경제/시장이라는 개념/인식의 탄생.
심지어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역시 이러한 부르주아의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사회의 탄생은 바로 이 경제/시장의 탄생과 더불어 비로소 가능했다.
셀프 거버닝, 자기통제(주권) 인민, 공론장이라는 개념과 더불어서.
그리고 '언어'라는 개념의 탄생 역시 이에서 비롯한 것.
3.
흔히 원시 화폐로 거론되는 것들은 모두 인간관계의 유지나 강화를 위한 목적에서 사용되는 것이었지, 재화의 거래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존엄과 관계되던 것들이 계란 값이나 이발비를 내는 화폐가 될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가.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자연(토지), 인간(노동)이 재화와 더불어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자유로이 거래된 시점을 물론 자본주의가 일반화된 시점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때는 시장이라는 악마의 맷돌이 모든 것을 갈아버리는, 균질화시키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이보다 적어도 2000년 전쯤, 심지어는 3000년쯤 전의 시기, 화폐가 일반화된 시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때는 바로 부채에 의한 노예가 대량으로 발생하던 시점이기도 하다.
사람에게 값을 매길 수 있는 것은 그를 그가 맺고 있던 인간적 관계에서부터 완전히 분리해 낼 때 비로소 가능하다.
4.
예컨대 BC 600년경의 그리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그리스 시절 노예제가 아테네에 일반화된다. (수메르와 같은 지역에서는 무려 BC 1000년 경)
그리고 고대 로마 시대의 로마법을 거쳐 .... 근대의 홉스에 이르기까지. 자유와 소유의 개념이 바로 노예 소유와 자유에 대한 관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소유와 자유의 개념은 내가 소유한 나 자신을 팔 자유를 포함한다.
임노동 계약은 하루 8시간 나의 자유(소유권)을 자본에 넘기는 것 아닌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부채가 도덕과 연관된 것은 따라서 자연적인 것이 결코 아니고, 사람들과의 소중한 관계를 확인해 주던 화폐가 재화의 거래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시점에 노예제라는 폭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
5.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이라는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경제학에서의 '가치', 언어학에서의 '가치', 일상적 의미에서의 '가치'는 모두 'value'에 해당한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이 당시에 막 학문적 시민권을 얻어낸 (정치)경제학을 모델로 삼았다는 게 내 지론이므로 흥미있게 읽었다.
이 책에서 역시 아담 스미스가 경제와 시장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발견해 내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성립시켰다는 대목에 특히 눈이 갔다.
다만, 교환을 등가교환에 한정하려는 집착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마르셀 모스의 선물경제 개념까지 등가교환의 부르주아 도덕 관념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서야.
그가 말하는 세 가지 경제적 관계-도덕적 원칙은 서로 다른 형태의 교환이라고 볼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세 가지 교환양식, 즉 증여-답례, 등가교환, 착취-보호에 거의 그대로 대응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6.
이 책은 일본 도시샤대학의 이타가키 류타 선생에게 소개 받은 것이다. 저자 그레이버가 몇 년 전 비교적 이른 나이에 타개했다는 소식과 함께.
이타가키 선생은 내가 교환을 의사소통의 은유로 읽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한 것인데, 이 책을 읽고 나서도 내 생각에는 큰 변화가 큰 없었다. (물론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지만)
이 책의 저자가 공산주의라고 본 경제적 관계-도덕 원칙 역시 내가 보기엔 여전히 교환의 일종이기 때문.
이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도착한 그의 유작, <모든 것의 새벽>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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