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語`의 전통적 용법

책일기 2011. 3. 31. 15:04

1.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문학론』이란 글을 통해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문학을 전공한 내력을 설명하고 있는데, 어려서부터 한학을 한 영향으로 ‘문학이란 이와 같은 것이다’라는 정의를 ‘좌국사한(左國史漢)’을 통해 얻었으며, 영문학도 분명 그러한 것일 테니 그렇다면 평생 이것을 배우는 것도 후회할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나쓰메 소세키 1906/2004: 26) 그러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에 “어딘지 모르게 영문학에 속은 듯한 불안감”을 느꼈고, 영국 유학에서 그는 이러한 의혹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 전력투구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던 것이다. “한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한문학과 영어에서 말하는 이른바 영문학의 관계는 도저히 같은 정의에 포함할 수 없는 다른 종류의 형태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나쓰메 소세키 1906/2004: 27)

이는 서구의 ‘근대 문학’이라는 특수한 담론이자 제도를 동아시아의 전통적 용어인 ‘문학’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동양인’이 겪었던 곤란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소세키의 일화를 언급하는 것은 ‘근대문학’의 담론적, 제도적 특징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애초에 ‘문학이란 어떤 것인지’ 그 정의를 얻었다는 ‘좌국사한’ 즉, ‘좌전, 국어, 사기, 한서’에 들어 있는 ‘국어’가 우리의 이목을 끌기 때문이다.

백두현(2004)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의 번역본에서 ‘國語’가 모두 21회 발견되는데, 이 중 20회의 용례가 바로 중국의 역사서인 『國語』였다고 한다. 좌구명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이 책은 『춘추죄씨전』과 더불어 춘추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춘추외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춘추좌씨전』은 공자가 노나라의 사적을 편년체로 엮은 『춘추』에 주석을 단 것인데, 『國語』는 그 외에도 주나라를 비롯한 여덟 개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여, 각각을 「周語」「魯語」「齊語」「晉語」「鄭語」「楚語」「越語」「吳語」라는 이름으로 엮어 놓았다. 역사라고는 했으나 대개 왕과 신화들의 대화를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앞 절에서 『설문해자』를 통해 살펴본 ‘語’의 의미에 비추어 본다면 내용과 제목이 잘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겠다.

2.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에 나타나는 ‘國語’는 거의 대부분 이 춘추 시대의 역사서를 뜻하는데, 그 외의 경우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단 하나의 예밖에는 없다. 이는 ‘거란, 여진, 몽고족의 말’을 뜻하는 맥락에서 쓰인 것으로(四詩定譜 叶風雅頌於樂章 三史紏訛 譯遼金元之國語) 물론 지금 사용하는 ‘우리나라 말’이라는 의미의 ‘국어’와는 차이가 있다. 번역본이 아닌 원문에는 ‘國語’가 더 많이 발견되는데 예컨대 다음과 같은 고종 19년 12월 6일자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今與日本修好, 而不通其國語, 交際通商之際, 未免聾啞相對。

지금 일본과 수호(修好)하고 있으나 그 나라 말이 통하지 않아서 교제(交際)하고 통상(通商)할 적에 벙어리끼리 상대하는 것과 같음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國語’가 독립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其’의 한정을 받고 있다. 더구나 이 ‘其國語’가 ‘其+[國語]’인지 아니면 ‘[其+國]+語’인지 자체가 불분명하다. 그런데 이는 ‘譯中國語之書’(세종 16년), ‘亦有之琉球國語者’(중종 25년), ‘慣習貴國語’(인조 6년) 등의 예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해진다. ‘中國語’가 ‘中+國語’의 구조가 아닐 것임은 분명한 일이고, ‘琉球國語’의 경우에도 같은 기사에 ‘琉球國人’과 같은 용례가 여럿 나타나는데, 이를 ‘琉球+國人’으로 가르기 어렵다는 점에서 앞의 예들과 궤를 같이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만약 이들이 ‘中國+語’, ‘琉球國+語’의 구조라면 ‘其國語’, ‘貴國語’ 역시 ‘[其+國]+語’와 ‘[貴+國]+語’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고, ‘本國語’(태종 13년 등 총 9회 출현), ‘我國語’(세종 31년 등 총 18회 출현) 등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온당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에 사용된 ‘國語’를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아무런 수식어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국어’와는 같은 차원에서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당시에 ‘國語’가 하나의 단어로서 존재했었는지조차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최소한 『조선왕조실록』의 용례만 놓고 본다면 전통 사회에서는 ‘國語’라 하면 대개 ‘좌국사한’의 ‘국어’를 떠올렸을 것이고, 우리가 현재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국어’를 염두에 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3.

그러나 우리가 검토해야 될 또 한 가지 문헌이 있다. 바로 『훈민정음』이다. 이 『훈민정음』의 해례본에 ‘國語’가 어떤 수식어구도 없는 독립적인 구성으로 두 차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半舌有輕重二音 然韻書字母唯一 且國語雖不分輕重 皆得成音

반설음에도 경중의 구별이 있으나 운서의 자모에서는 구별하지 않았고, 또 우리말 역시 경중을 구별하지 않아도 역시 모두 소리를 이룰 수 있다.

ㆍㅡ起ㅣ聲 於國語無用 兒童之言 邊野之語 或有之

ㅣ가 앞에 와서 나 ㅡ와 결합한 음은 우리말에서 쓰이지 않으나, 아이들의 말이나 변방의 말에는 그런 음이 혹 있기도 하다.

위의 내용은 해례 가운데 합자해의 거의 끝부분에 보이는 것인데, 이것만 놓고 보면 현재 우리가 쓰는 ‘國語’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말을 적기 위해 만들었다는 훈민정음이고 그것의 제자 원리와 활용 방법을 규정한 『훈민정음』에 ‘우리말’을 뜻하는 표현이 이 두 가지뿐일 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 『훈민정음』은 사실 한자음의 정리를 또 다른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자의 소리를 적는 방법에 대해 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합자해의 후반부에서는 우리말을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 하는 설명이 등장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렇다.

初聲二字三字合用並書 始諺語·爲地

초성 두 자 혹은 세 자를 아울러 쓰는 것은 가령 우리말 ‘·’로 ‘地’를 뜻할 수 있는 것과 같다.

各自並書 如諺語·혀爲舌而

각자병서는 가령 우리말 ‘·혀’로 ‘舌’을 뜻할 수 있는 것과 같다.

中聲二字三字合用 如諺語·과爲琴柱

중성 두 자 혹은 세 자를 아울러 쓰는 것은 가령 우리말 ‘·괴’로 ‘琴柱’를 뜻할 수 있는 것과 같다.

終聲二字三字合用 如諺語爲土

종성 두 자 혹은 세 자를 아울러 쓰는 것은 가령 우리말 ‘’으로 ‘土’를 뜻할 수 있는 것과 같다.

4.

위의 예들을 살펴보면, 모두 ‘우리말’의 의미로 ‘諺語’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 ‘諺語’의 ‘諺’은 익힐 알고 있듯이 ‘상(常)말, 속된말, 세련되지 못한 말’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한글을 천한 글이라고 해서 ‘諺文’이라고 불렀다는 바로 바로 그 ‘諺’인 것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에 쓰인 ‘諺語’와 ‘國語’가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분명히 구분되는 말이었을까? 『훈민정음』의 여러 곳을 살펴보아도 이 둘이 서로 구분되는 말이었다는 것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두 표현이 사용된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 두 말이 서로 바뀌어 쓸 수 있는 비슷한 말이었다면, 『훈민정음』에 등장하는 ‘國語’는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국어’라는 말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쓰고 있는 ‘국어’에는 단순히 ‘우리말’이라는 뜻 외에도 여러 가지 개념적 함의가 들어 있거니와 특히 근대 이후 우리는 ‘국어’를 국가적 위상 및 지위와 연관시켜 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국어’를 ‘諺語’와 동의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훈민정음』에서는 ‘諺語’와 ‘國語’가 구분되어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앞서 본 ‘國語’의 용례 바로 직전에 아래와 같은 예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諺語平上去入 如활爲弓而其聲平 :돌爲石而其聲上 ·갈爲刀而其聲去 ·붇爲筆而其聲入之類

우리말의 평상거입은 예컨대 활이 평성이되고, :돌이 상성이 되고, ·갈이 거성이 되며, ·붇이 입성이 되는 따위와 같다.

文之入聲與去聲相似 之入聲無定

한자의 입성은 거성과 비슷한데, 우리말의 입성은 일정하지 않다.

初聲之ㆆ與ㅇ相似 於可以通用也

초성의 ㆆ과 ㅇ은 서로 비슷해서 우리말에서는 서로 통용할 수 있다.

5.

요컨대 『훈민정음』 합자해에서는 ‘우리말’의 뜻으로 ‘諺語, 諺’ 등의 표현이 지속적으로 쓰이고 있으며 마지막에 가서 두 차례 ‘國語’라는 말이 앞의 표현과 큰 의미 차이 없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합자해 외에서는 이런 표현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종성해에 “且半舌之ㄹ 當用於而不可用於文(반설의 ㄹ은 마땅이 우리말에만 쓸 것이요 한자(의 음을 적을 때)에는 쓰지 말 것이다)”와 같은 용례가 보이는데 이 역시 앞서 본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나쓰메 소세키가 한학에서의 문학과 영문학에서의 문학이 같은 정의 하에서 논의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전통 사회에서의 ‘國語’와 근대 이후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국어’ 역시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 더구나 ‘國語’라는 표현은 ‘좌국사한’의 ‘국어’를 제외한다면, 수식 어구 없이 독자적으로 사용된 예가 손에 꼽을 정도이므로, 이것이 하나의 개념어인가를 따지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의 온전한 단어이기는 했는가 하는 의문을 거둘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