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쉰은 본래 자연과학 쪽의 공부를 했다. 그것이 본인의 의지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으나, 어쨌든 10대 후반 난징에서 해운과, 광업 관련 공부를 했고(水師學堂, 陸士學堂 附屬 鐵路學堂을 도합 3년 반 정도 다녔는데, 이 학교는 사실 군사력 증강을 도모하기 위해 양무파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도쿄에서의 준비 기간을 거쳐 센다이에 있는 의학전문학교를 2년 정도 다녔다.
그러던 그가 문학으로 방향을 돌린 것은 그 유명한 ‘환등기 사건’ 때문이라고들 한다. 러일전쟁 중 러시아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중국인을 일본인들이 처형하는 장면, 그리고 이를 대단한 구경거리로 알고 몰려든 중국인들의 몰골을 환등기로 본 후, 중요한 것은 육체의 강건함이 아니라, 정신의 개조라는 생각으로 문예활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러일전쟁이라는 일본인에게는 가슴 벅찬 사건을 일본인의 시각으로 해석한 사진과 그에 덧붙여진 이야기, 일본인들의 냉소와 멸시의 대상이 된 중국인. 그리고 이러한 배치에 일부로 참여하고 있는 (중국인) 루쉰. 아마 그 상황 자체를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이 가능했을 터. 그 무리에 끼어 함께 중국인을 비웃거나, 아니면 거기서 뛰쳐나오는 것. 물론 루쉰이 택한 것은 후자이다. ‘정신의 개조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 후의 문제가 아닐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일단 거기서 벗어나는 게 먼저다. 그러고 나면 그 행동에 대한 나름의 설명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2.사실 그는 이 사건 전에 일본인 학생들로부터 시험에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았었다고 한다. 중국인 치고는 너무나 좋은 점수를 받았기에. 이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환등기를 통해 루쉰이 본 것은 필경 루쉰 자신이었을 것이다. 일본인의 눈을 통해 그는 중국인, 그리고 그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 초라하고 비굴한 자신의 얼굴. 그가 일생 동안 추구한 것은 그 자신의 눈으로 그 자신을 직시하는 일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것만이 센다이에서의 ‘굴욕감’을 씻을 수 있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의 ‘혁명’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의 혁명은 처음부터 ‘영구 혁명’이 아니면 안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그가 왜 문학을 선택했는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왜 정치는 아니고 문학인가.
3.竹內好. 80년대 후반 일월서각에서 나온 <노신 문집>의 역주자로 올라 있던 이름을 다시 만난 것은 중문과의 한 박사학위 논문에서다. 일본에서의 루쉰 연구를 통해 동아시아의 ‘근대’를 조망한 것. 일본문학자들의 루쉰 연구를, 한국의 중문학자가 차분히 읽어가며 ‘근대’를 더듬는 작업. 역기서 죽내호, 즉 다케우치 요시미는 단연 선구자로 그려진다. (이 논문, 책장 어디쯤엔가 꽂혀 있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근대일본정치사상사>의 원고 일부를 태평양전쟁 종군 직전에 유언과 같은 심정으로 썼듯, 다케우치는 중국 전선에 배치되기 직전에 그의 청춘의 서 <루쉰>을 탈고했다고 한다. 44년에 출판되었다는 이 책은 그래서인지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한편으로는 초조하다. 루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그만큼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만큼 문제적이다. ‘영구 혁명’ 운운한 위의 몇 마디는 죽내호의 표현이다.아래는 이 책의 한국어판 첫 페이지에 써 넣은 몇 마디.
丸山眞男와 竹內好, 노신과 호적에 관한 학술대회(국학연구원)에 잠깐 들렀다가 죽내호와 魯迅에 관한 생각이 동動해 알라딘에서 주문함. 埈廈의 백일을 앞두고 夏目(1867~1916)와 루쉰(1881~1936)의 사이에서 周時經(1876~1914)을 생각하다. 2011.5. 昌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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