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적 근대의 해명을 위하여

책일기 2010. 3. 15. 09:08


1.
주시경은 1906년의 저작 『國文講義』의 말미에서 자신은 국문을 가지고 재주나 넘는 한낱 ‘어릿광대’가 될 터이니 고명한 분들께서 이를 연구, 수정하여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러나 주시경은 바로 이 시점에 ‘자율적 실체로서의 언어’를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때부터 ‘國語’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현실적으로 발화되는 구체적인 음이나 형태가 아니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추상적인 ‘본음, 원체, 격식’을 이 ‘國語’에 연결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이 시점부터 기존의 기독교적 흐름에서 일정 정도 일탈하여 박은식이나 신채호로 대표되는 개신(改新) 유학과 일정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보인다. 이 새로운 ‘접속’을 통해 ‘國語’는 드디어 어렴풋이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담론적 레벨에서, 그리고 제도적 차원에서 드디어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
이 연구가 일차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은 ‘언어적 근대’를 가능하게 한 담론들의 존재론이다. 그 담론들은 무엇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가? 이들 담론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존재한다’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국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근대 이전 우리는 그것의 존재 비존재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논의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그것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이 존재함이, 그리고 그것의 존재 방법이 해명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주시경은 두 가지 요소를 활용했다.

하나는 1890년대부터 주시경이 몰두해 온 표기법과 관련된 것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음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음을 표기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주시경의 줄기찬 주장이었는데, 바로 이 근원적인 음이 ‘國語’의 존재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 혼란스럽고 잡다하게 쓰는 말(“임시음”)이 아니라, 매끈하게 정돈된 말(“본음”)이 분명히 존재하며, ‘國語’는 후자와 관계된 것이지 절대 전자와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게 주시경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國語’의 존재를 해명하기 위해 활용한 다른 하나는 사회진화론의 맥락에서 유학을 다시 해석한 개신 유학자들의 논의였다. “音은 天地 固有의 理와 區域 人種의 性으로 二種의 別이 有”(주시경, <국문연구안>, 1907)에서처럼 ‘음’을 설명하는 데 ‘性’과 ‘理’를 주요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또 ‘장백산과 흥안령 산맥, 오츠크 해와 발해만’을 통해 대륙과 완전히 단절되었던 고대의 한반도에서 말해진 ‘순수한 언어’를 주창하는 모습은, ‘國語’를 언급하기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주시경의 면모이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國語’를 발견하고, 담론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필요했던 작업이었던 것이다.

3.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은 그 담론의 대상만이 아니다. 일정한 주체 역시 담론을 통해 구성된다. 이는 이중적인 의미인데, 그 담론을 통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의 ‘자리’가 마련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또 그 담론에서 상정하는 바람직한 주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스스로 ‘국문’ 및 ‘국어’의 전문가가 되고, 각종 조직을 통해 후계를 양성한 주시경의 면모가 익히 알려져 있거니와, 후자와 관련해서 즉 주시경의 작업이 근대적 ‘국민’을 발견하고 구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공통된 기억으로서의 ‘국사’가 그랬듯이, ‘국어’의 존재 역시 근대적 ‘국민’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자율적 실체로서의 언어’가 균질적 시민/국민/신민으로서의 주체를 구성하는 데 어떻게 관여했는가는 이 연구의 또 다른 주요 테마이다.

4.
대상이나 주체의 문제 이외에도 주시경이 사용한 각종 개념들 역시 주요한 분석 대상이다. 같은 어휘라 하더라도 담론적 배치가 달라지면 전혀 다른 의미와 기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코젤렉는 개념사라는 역사학의 새로운 흐름을 조망한 『지나간 미래』에서, ‘개념’은 물론 ‘단어’에 근거하지만, 언제나 ‘단어’ 이상이라고 했다.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의미연관과 경험연관들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단어로 유입될 때” 비로소 ‘단어’는 ‘개념’이 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본음, 원체, 격식’이라는 주시경 특유의 개념은 당시의 담론적 배치, 즉 정치 사회적 연관 관계 속에서만이 그 의미가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형태 품사론적 용어, 문장론적 술어 들 역시 모두 이러한 관점에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그가 1906년 이후 사용하는 성운학적 술어가 그의 논의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은 주요한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현재의 분과 학문(자율언어학)의 테두리를 거의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주시경 연구는 일종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측면이 있다.

5.
이 연구는 기본적으로 푸코의 담론 이론을 기반으로 주시경의 저술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19세기말 20세기 초 이 땅에서 이루어졌던 ‘거대한 전환’, 즉 ‘언어적 근대’를 해명해 보고자 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

1897년부터 1914년까지 이어진 주시경의 모든 저술(이에는 ‘국어’ ‘국문’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위생, 여성 교육, 종교 등에 관한 글까지 포함된다)이 분석 대상이 되고, 필요한 경우 이 시기의 다른 주요 인물들(지석영, 유길준, 이능화, 언더우드, 게일, 신채호, 박은식 등)의 저술 역시 참고할 것이다.

또한 당시의 제도적인 변화 과정, 즉 국문연구소 설립과 운영이나 신문 등의 매체 발행, 국공립 및 사립 학교의 설립 등과 같은 사항들도 주요한 참고의 요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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