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근처에 지난 여름 새로 지어진 건물이 있다. 가깝지는 않지만, 자주 가는 식당 골목에 자리를 잡고 있어 초기 작업부터 건물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 볼 수 있었다.
콘크리트 살을 그대로 드러낸, 벽돌을 붙인다거나 페인트를 칠한다거나 하는 그런 짓을 전혀 하지 않은 채 거푸집 판 자국과 폼타이 자국을 자랑스럽게 드러낸 건물은, 그 앞을 지나는 우리에게 매번 한두 마디씩 지껄이게 했다.
노출 콘크리트로 건물 외벽을 처리한다는 게 대단히 품이 많이 든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으며 알았지만, 그래서 이거 다 지은 거 맞어? 하고 궁시렁거리던 혼잣말은 이제 사그러들었지만, 이 건물에 대고 툴툴거린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창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창문이 없는 건물은 도대체가, 그 무뚝뚝함이 무서울 정도다. 주위 건물과 또 사람과 전혀 말을 섞지 않겠다는 의지가 건물 곳곳에서 풍긴다. 건물 앞에는 “창의적인 작업을 하시는 분들과 공간을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듣기에 따라서는 재수 없을 수도 있는 ‘임대 광고’가 예사롭지 않게 걸려 있다.
그 건물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근대의 책읽기가 저렇게 무뚝뚝한 건 아닐까. 공동의 집체적 읽기에서 개인만의 묵독으로의 전환. 개인의 내면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이단이 발생할 수 있었던 읽기지만, 타인과의 대화를포기한 읽기가 아닌가.
읽기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소리는 소음이 되고 모든 타인은 불청객이 된다.
지하철에 앉아 책을 읽는 우리, 비록 엉덩이를 비비고 있을지언정 서로의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은 헤아릴 수가 없다. 그렇게 해서 또 섬들이 둥둥 떠다닌다.
2.
건축은 공간 기계를 배치하는, 그리하여 인간의 육체를 통제하는 기술인 듯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계단이 그렇다.
산을 오를 때 누군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논 계단은 사실, 화를 치밀게 한다. 있는 그대로 놔 두지 않아서가 아니라(사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빠대게 놔 두는 것보다는 계단으로 그 발길을 막아주는 것이 있는 그대로 놔 두는 방법이다), 내 보폭을 내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계단에 맞춰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가면 길이 된다, 고 어린 날 외쳤지만, 우리는 대개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길로 그것도 정해진 방향으로만 다닌다. 또한 출근부를 찍으며 들어가는 공간과 인사불성으로 되돌아가는 공간에서의 행동법은 분명 다르다.
근대적 시간 기계와 공간 기계가 마련한 습속은 아직 우리의 욕망을 통제한다.
3.
연희동 성당은 세로로 길게 뻗어 있지 않고, 옆으로 죽 퍼져 있다. 중세의 전형적인 성당이 좁은 폭으로 상승 이미지를 극대화시킨 것과는 다르게. 고로 연희동 성당엘 가면 하늘로 솟구치는 느낌은 들지 않고 한없이 옆으로, 그리하여 이웃에게로 넓어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 공간 배치와 앞쪽에 매달린 십자가의 형태는 동형적이다. 형제나, 부모 관계처럼 가족 유사성을 느끼게 한다고 할까? 이 십자가 역시 세로로 길쭉하지 않다. 세로 막대가 옆으로 퍼져 마치 티셔츠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거기에 새겨진 예수도 (원숭이처럼 긴) 팔을 쫙 벌리고 있다. 마치 우리들을 모두 안아 주겠다는 듯. 그리고 여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들'의 표정처럼 고통스러운 표정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성당의 공간적 배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표정에까지 그 아취를 전한다. 내가 연희동 성당엘 나가는 한 가지 이유다.
4.
스피노자적 범신론에 입각해서 보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신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인생의 목표는 이런 신적 속성을 되도록이면 많이 만나, 즉 신을 열심히 영접하여 신체의 조성을 높이는 것이다. (편식이 문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이없게도...)
이 책은 나의 신체적 조성을 많이 높여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만날 건물들을 통해 나의 조성은 더욱 높아질 터.
즐거운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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