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고종석, 엘리아의 제야, 문학과지성사

pourm 2004. 9. 6. 20:53


내가 좋아 하는 글쟁이는 셋이다. 김현, 김훈, 고종석.

그러나 셋의 글쓰기 스타일은 모두 다르다. 김현은 나를 힘들게 하고, 김훈은 나를 화나게 하고, 고종석은 나를 긴장시킨다. 그러나 고종석이 제일 편하다. 긴장시키는데도 제일 편하다. 아마도 그의 글쓰기 스타일이 나랑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 하면 아주 우스운 얘기가 될 터이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글을 보면 마치 내가 쓴 글을 보는 것처럼 편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헐거운 느낌이다. 그런 면에서 특히 김현이나 김훈과 다르다. 이네들의 글은 꽉 짜여져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알이 꽉 박힌 어떤 열매처럼 과육이 삐져나오는 어떤 열매처럼 나를 흥분시킨다. 그러면서도 김현은 신체적 조성이 맘껏 높아지는 기분을 선사하고(물론 가끔 책을 집어 던지게도 하지만), 김훈은 나를 뻣뻣하게 한다.

이 소설집은 전보다 훨씬 더 헐렁하다. 고종석의 글이 편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헐렁슬렁거리지는 않았다. 여전히 소재의 한정성을 지적하게 된다. 재망매로부터 이어지는 누이애. 그리고 언어학 관련, 기자 관련, 프랑스 관련(이번에는 홍세화도 등장했다. 맙소사). 안티조선과 지난 대선 이야기가 첨부되기 했지만.

'엘리야의 제야'는, 대선 이야기로 물타기를 했지만, 여지껏 고종석이 쓴 누이애 중 가장 찐한 근친상간 이야기. 누이 생각은 그에 비해 상당히 맥빠지는 누이애. 한 일이년 전쯤 어느 계간지에서 읽은 단편임에 분명하다. '파두'는 안티 조선과 유사 누이애 이야기. 전반부는 비교적 조여주는 맛이 있었지만, 안티조선이 느닷없이 돌출하는 후반부에서는 맥이 탁 풀림.

'피터 버갓 씨의 한국 일기'는 촘스키를 비아냥거린 일기체 소설로 읽힘. 촘스키를 꽤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이전의 입장이 왜 바뀐 것인지 아리송. 또 유태계인 촘스키를 게르만계로 설정한 이유가 뭔지 모르겠음. 그게 지적 정치적 위선을 비웃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인지... 그리고 남한의 사회언어학회를 실제 이상으로 고평가한 것은 그가 남한의 사회언어학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 봄.

'아빠와 크레파스' 프랑스와 한국의 교육문제를 걸고 넘어짐. 홍세화를 모델로 한 듯한 인물과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 딸아이가 하나 남은 눈의 시력마저 잃어버리게 될 때 눈물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림. 이제 생각해 보니 [아버지]류의 삼류소설이 아닌가 의심스러움. '카렌.' 몇 년 전 읽은 어느 문학 계간지(문학과경계거나 문학판이거나 문학동네거나...재작년 말이거나 작년 초일 게다. 그 후에는 어떤 계간지도 사 본 적이 없으니)에서 읽은 글인 것 같다. 그걸 하염없이 늘려 놨다. 하염없이 지루하다. 글맛 말고 소설맛은 없다.

고종석의 글쓰기는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임을 다시 확인했지만, 동시에 너무 허랑허랑한 소설이어서 아쉬움이 남는 읽기였다. 누군가 전작주의라는 말을 하더만, 한 작가의 글을 모두 읽는 읽기 방법을 전작주의라고 하더만, 나에게는 고종석이 그 비슷하다. 그의 소설과 에세이 중 제일 편하게 읽은 글이다. 하지만 그만큼 느낌이 없다. 쿵...하는 놀람도, 엇 하는 비켜섬도, 에... 하는 엇나감도...

그래도 마지막 소설 카렌의 첫장면은 아직 생생하다.

내 마음이 떨린다.